082
백색무문의 마로 만든 정의(淨衣)는 소매가 길게 뻗어 내려와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고, 금으로 만든 포와 속대는 그가 만인지상의 위치에 놓여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시우를 바라보는 그의 눈엔 하얀 공막 대신 붉은 공막이 자리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할 만큼의 귀기를 풍겼고, 그의 주위론 금방이라도 현신할 것 같은 요괴들이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냈다 감췄다.
오오가미의 등장만으로 황거의 요괴들은 힘을 얻은 듯, 더욱 흉폭해진 모습으로 골렘과 다크 나이트를 덮치기 시작했다.
황거 주변으론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요괴들이 날아들기도 했고, 날 수 없는 요괴들은 꾸역꾸역 담을 넘어 황거를 침입한 침략자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황거 안에는 이미 요괴들이 차고 넘칠 만큼 몰려들어 보는 것만으로도 질리게 만들었다.
“안타깝네. 우리 애들이 감정이 있었다면 조금은 무서워했을 텐데 말이야.”
시우는 동시에 네 개의 마법진을 만들어 휘둘렀고, 마법진은 빛을 발현한 후에 스르륵 사라졌다.
[다크스킨]
[스트롱 업]
[프렌지]
[버서커]
꾸아아악!
시우의 마법이 발현되자, 요괴들에 파묻혀 점점 형태를 잃어가던 다크 나이트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사방으로 요괴들을 날려 버렸다.
“안면이 있을지 모르겠네? 당신의 도움을 받던 백면궁도 들이거든. 저기 유달리 잘 싸우는 이가 백면궁의 궁주 박거산이고.”
시우가 한쪽을 가리키자 오오가미도 고개를 돌렸고 그곳엔 혼자서만 눈에 붉은빛을 발하며 요괴와 야토가미의 무사들을 척살하는 박거산이 있었다.
“어때? 자신이 돌보던 이들이 자신을 무는 느낌은?”
“…….”
오오가미는 긴 소매가 달린 팔을 들어 시우를 겨냥했다.
푸욱!
질퍽하게 핏물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오오가미의 소매 속에선 끔찍한 형상의 장기와 근육으로 이어진 길다란 팔이 뻗어 나와 순식간에 시우와의 거리를 좁히려 했다.
“거참 대화로 풀어 보려 했는데. 성질이 급하시네?”
시우는 말과 달리 기다렸다는 듯 완드를 휘두르며 마법진을 생성했다.
[윈드 커터][온 더 파이어]
[윈드 커터][오버 더 스틸]
[윈트 커터][커싱 오브 포이즌]
[페이크 일루젼]
시우의 마법과 함께 시우와 오오가미 사이에는 수십 개의 윈드 커터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오오가미에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스가가가각.
시우에게 다가오는 끔찍한 팔은 수십 개의 윈드 커터와 부딪치며 사방으로 핏물을 뿌리며 잘게 잘려나갔다.
잘려나간 팔의 단면에 시우의 마법의 불이 붙자. 오오가미는 자신의 팔을 떼어내듯 소매를 흔들었고, 방금까지도 막 꺼낸 것처럼 꿈틀거리던 장기와 근육 조직들은 생명을 다한 듯 검게 물들며 궁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거 생각보다 몸이 부실하시네?”
하지만 아직 환영과 함께 하는 수십 개의 윈드 커터는 남아 있었다.
맹렬하게 회전하는 윈드 커터는 목표를 오오가미로만 잡은 듯 크게 산개했다가 한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각양각색의 윈드 커터는 부여된 속성마저도 제각각이고 그 안에 환영 마법까지 포함되어 어떤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윈드 커터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오오가미는 소매가 긴 손을 휘휘 흔들었고, 그와 동시에 오오가미와 윈드 커터들 사이엔 커다란 진흙 벽이 나타나 윈드 커터를 막기 시작했다.
푹푹푹푹.
끄아아악.
기이하게도 오오가미가 만든 진흙 벽은 윈드 커터의 공격에 끔찍한 비명과 함께 핏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오가미의 행동.
바닥에 내려 두었던 손을 쑥 하고 올리자 궁의 밑바닥에서 붉은 껍질을 가진 지네가 승천하듯 치솟아 올라 남은 윈드 커터를 막아냈다.
퍽퍽퍽.
윈드 커터의 공격에 지네는 흩어지듯 다시 바닥으로 추락했고, 오오가미는 붉은 공막을 움직여 시우를 바라보았다.
“글세, 그거 막았다고 좋아할 때가 아닌데?”
시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오가미의 사각을 타고 양옆과 앞에서 윈드 커터가 새로이 생겨나 오오가미에게 쇄도했다.
“마법을 발현하고 내가 뭐 하고 있었을 것 같아?”
오오가미가 시우의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번쩍 눈을 치켜떴다.
퍼퍼퍽!
오오가미는 실에 끌려가는 인형처럼 순식간에 궁의 벽면에 부딪쳤고 그의 몸을 타격한 윈드 커터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백색무문의 마로 만든 정의(淨衣)를 붉게 물들였다.
-커흑
오오가미가 핏물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 * *
미화관의 참전으로 전투의 양상은 조금 한국 상계의 무인들에게 유리해지는 듯했다.
합일된 그들의 무력은 무인들이 펼치는 개개인의 무력에 비하면 조금 모자랐지만 철저하게 5인이 한 개의 몸처럼 움직이는 그들의 힘은 상상 이상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한국 상계의 무인들이 한 번씩 위험할 때마다 25인이 모여 펼치는 정령술은 일거에 야토가미의 무사들과 요괴들을 쓸어버리고도 남음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일전의 시우가 선보였던 자연검에 가까운 새로운 힘을 가지고 온 우빈의 활약도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무공을 잃고 실의에 빠졌던 우빈이 새로운 힘을 가지고 전장에 등장하자 태백 정가의 무인들의 기세도 점점 오르고 있었고, 소빈과 합공을 펼치는 우빈은 그 일대의 야토가미 무사들에게 공포를 안겨 주기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궁혜자의 미간은 쉽게 펴지질 않았다.
야토가미의 숫자가 많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그들의 힘은 흔들림 없어 보였고, 태백 정가의 무인들은 나루카미를 상대하느라 다른 이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류신의 존재였다.
야토가미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나서지 않은 류신은 자신들이 조금 밀리는 상황에서도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듯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류신이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이니 야토가미의 무사들도 그를 완전하게 믿고 거침없이 공격하는 중이었다.
실제로 전투의 양상은 한국 상계가 조금씩 밀리며 야토가미의 무사들에게 둘러싸이고 있었다.
남궁혜자의 전음을 들은 한세아의 주도로 미화관의 전투원들이 한 번씩 활로를 뚫어 보았지만, 죽은 야토가미의 무사들의 시체를 밟고 새로운 야토가미의 무사들이 그 틈을 채웠다.
“어찌해야 하는 것이냐.”
상념을 지우고 다시금 검을 흔드는 남궁혜자.
그녀의 손에 귀검사 셋이 고혼이 되었지만 그녀의 얼굴에 기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 * *
오오가미가 핏물을 뱉어낼 때마다 그의 주변으로 귀기가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인간의 귀엔 끔찍하게밖에 들리지 않는 요괴들의 목소리가 시우를 죽일 듯 압박했지만 시우는 개의치 않다는 듯 스윽 손을 휘둘렀고, 요괴들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직 진지하게 할 마음이 들지 않나?”
시우가 이죽거리며 웃자 오오가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의(淨衣) 사이로 삐져나온 잘게 잘린 장기들이 스스로 회복되고 수복되며 흘러넘치던 핏물이 어느새 멈췄다.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가 처음 입을 열자 황거 일대가 찌르르 울리며 요괴와 인간을 구분하지 않고 고통스럽게 머리를 부여잡았다.
시우 또한 갑자기 큰 소리를 들은 것처럼 귀를 부여잡았다.
“거참 목소리 한번 끔찍하네.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오오가미의 주위로 기류가 모이기 시작했다.
그가 살짝 무릎을 구부리자 그가 딛고 있던 궁의 바닥이 우지끈하며 조금 파고 들어갔고, 그가 고개를 들어 시우를 바라보자 그의 신형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쾅!
순식간에 커다란 충격음과 함께 시우가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이런, 꽤 하는데?”
방금의 충격으로 시우의 몸을 보호하던 코트의 절반이 떨어져 나가 버렸다.
“어이! 먹보 그만 먹고 돌아와!”
황거 곳곳에서 요괴와 무사들을 공격하던 다크 사이트가 탄환처럼 쏘아져 시우에게 날아갔다.
오오가미는 여전히 형체를 보이지 않은 채 눈이 쫓을 수 없는 속도로 다시금 시우에게 달려들었다.
[다크 배리어]
중첩으로 쌓아 올린 배리어가 완성되기도 전에 부서져 나갔다.
“그렇게 안 보이는데 육탄전을 좋아하나?”
[매직 에로우]
윈드 커터 사이에 숨겨 놓았던 타겟 마법이 발동하며 매직 에로우가 보이지 않는 오오가미를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느린 매직 에로우는 오오가미가 지나간 자리만을 쫓아가는 형태였다.
이대로라면 끝이 없겠다 생각한 시우의 두 손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윈드 커터]
[프리즌 노바]
[파이어 볼]
수십 개의 마법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오오가미를 쫓기 시작했다.
펑펑펑.
수십 개의 마법 들 중 일부의 마법들이 소멸되며 그 폭발음과 함께 오오가미가 보이긴 했지만 그의 속도는 여전히 빨랐다.
시우는 더욱 빠르게 캐스팅을 펼치며 마법을 물처럼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우의 전면은 벗어날 곳 없이 불의 폭발음과 프리즌 노바의 냉기로 가득 차 피할 곳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폭발의 여파에서 진작에 피했던 오오가미는 시우의 뒤편에서 잠깐 모습을 드러낸 뒤 다시금 모습을 감추며 시우에게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때 바닥에서 검은색의 사슬들 수십 가닥이 뻗어 나와 즉석에서 커다란 그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다크 체인]
촤르르르르.
중첩으로 펼쳐진 마법에 황거의 바닥에서 뻗어 나온 쇠 그물에 오오가미는 물고기처럼 걸려들었고, 오오가미가 그물에서 빠져나가기 전 다크 체인이 살아있는 것처럼 오오가미를 되감기 시작했다.
[다크 체인][온 더 파이어]
수십 번이나 오오가미를 되감은 탓에 오오가미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시우는 다크 체인에 불의 기운을 가득 집어넣어 오오가미를 산 채로 태워 버리려 했다.
검은 다크 체인은 순식간에 온도를 높이며 시뻘겋게 물들었고 오오가미는 그곳에서 살아 나올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촤르륵.
시우의 완드 끝에선 붉은빛이 번쩍이고 계란을 쥘 듯 구부린 왼손은 주먹을 쥘 수 없는 듯 부들거렸다.
촤르륵.
붉게 달아오른 쇠사슬이 다시금 움찔거렸다.
툭 투툭.
마법으로 만들어진 쇠사슬의 장력이 점점 커지며 쇠사슬이 하나둘 튀어 나가기 시작했다.
촤르륵 촤르륵.
쇠사슬이 떨어져 나갈 때마다 오오가미를 감고 있던 쇠사슬의 부피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다.
“으, 먹어 치워!”
다크 사이트가 시우의 코트에서 떨어져 나와 쇠사슬을 한입에 삼켰다.
쇠사슬이 통째로 다크 사이트 입안으로 들어가자 그제 서야 시우는 한 시름 놓은 듯 몸을 축 늘어뜨렸다.
“휴, 오오가미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상대였네.”
바닥에 떨어져 자신이 삼킨 것을 잘게 분쇄하듯 다크 사이트가 절그럭거리며 입을 계속 놀렸다.
“그래 오늘은 봐준다. 맘껏 소리 내서 처먹어라.”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려는 순간. 다크 사이트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당황스러운 듯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시우 또한 다크 사이트의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을 때.
다크 사이트가 산산이 찢겨 나가며 그 안에서 거대한 검은색의 인형이 나타났다.
“이건 또 뭐야?”
시우의 고개가 검은색의 거대한 인형을 따라 끝도 없이 들어 올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