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투명한 막 안으로 들어온 나루카미는 꽤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투명한 막 안으로 보이는 일대의 크기는 그리 넓지 않았건만 직접 투명한 막을 걷어 내고 들어와 마주한 공간은 광활한 넓이의 커다란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미지의 상황에 당황스런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류신에게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 일대는 버려진 창고 부지라며? 한국에 이렇게 광할한 대지가 남아 있었어?”
류신은 주변을 둘러보고 바닥을 바라보았다.
바닥엔 야생의 것이라 믿을 수 없는 잘 관리된 잔디가 깔려 있었고, 초원엔 그늘을 피할만한 나무 하나 피어 있지 않았다.
“또 다른 진입니다. 정말 놀랍군요. 이 정도의 술법을 펼칠 수 있는 주술사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이곳 일대에 광대한 영역의 진을 펼쳐 놓았습니다. 단순한 환영 진이 아니라 주위 풍경과 환경 전부에 적용된 진입니다.”
“그럼? 우린 이미 진에 갇힌 거야?”
나루카미가 귀공을 끌어 올리자 그녀의 하얀 옷들이 사방으로 나풀거리며 차가운 기웃을 흩뿌렸다.
그와 동시에 류신이 오른손의 수도를 세워 바닥을 향해 내리찍었다.
그의 손이 마치 물속에 넣는 것처럼 저항감 없이 들어가고 얼마 뒤에 꺼내었을 땐 그의 손엔 거뭇한 흙과 잔디 풀이 묻어 나왔다.
“저희를 속박하거나 공격하기 위한 진은 아닙니다. 단순히 공간의 영역을 넓히고 다른 환경을 만들어 낸 것 외에는 큰 효용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래도 갑자기 우릴 공격하거나 하면 어떻게 하는데?”
“진법은 기본적으로 환영과 최면에 조종됩니다. 인간의 의식에 직접 자극을 가하는 것이 그 기본 요체이죠. 그렇기 때문에 술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대의 의식을 지배해 바꾸는 것이 가능하지만, 이렇게 공간을 늘리고 바꾸는 술법이라면 한 번 변경된 형태를 재조립하기 불가능하거나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래도 기분 나빠. 해제할 순 없어?”
“글쎄요. 이걸 설치한 것만큼 오랜 시간이 걸릴 일이라 당장에 저희가 이곳에 온 목적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군요.”
나루카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그녀의 기운과 합쳐져 얼음 결정이 되어 바닥에 떨어졌고, 그때마다 바닥의 잔디들이 뻣뻣하게 얼어붙어 버렸다.
“이 정도로 진을 만들 수 있다면서 왜 직접적으로 효용성 있는 진을 만들지 않은 거지? 류신 너라면 이해할 수 있겠어?”
“글쎄요.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고 자랑하고 싶은 거라면 매우 미련한 사람일 테지만 그럼에도 이런 형태의 진을 만들었다는 건, 다른 목적이 있다고밖에 볼 수 없겠군요.”
“다른 목적?”
“가령……. 이독제독 같은 걸까요?”
류신의 시선이 왼쪽으로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나루카미도 류신의 시선을 따랐다.
그곳엔 수많은 무인들이 한국 상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빌어먹을!”
귀검을 가까스로 피한 강형산의 손에서 죽엽수와 옥수십이식이 동시에 펼쳐졌다. 그의 손을 따라 펼쳐지는 죽엽수를 따라 그의 손이 마치 그림자를 남기듯 허공에 수없이 많은 손자국을 남기었고, 동시에 그 환영들에선 장법들이 쉴새 없이 쏘아져 나갔다.
퍼퍼퍼퍼퍼퍼펑!
허공을 가득 메운 공기 터지는 소리와 함께 충격으로 튀어 오른 땅거죽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흙먼지를 가득 메웠다.
불어온 바람에 한차례의 먼지가 쓸려나가 핏물을 뿌리며 곤죽이 되어 있어야 할 귀검사 앞엔 귀갑을 착용한 귀갑사가 검을 휘두르며 강형산의 급소를 노리고 들어왔다.
“젠장! 주작단! 모산파! 뭐 하는 거냐!”
강형산은 구궁매화보를 펼쳐 순식간에 뒤로 물러나며 전장의 함성이 묻힐 만큼 쩌렁쩌렁하게 외쳤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제길!”
화산의 절기들을 마구 쏟아부었지만, 상대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동안의 야토가미와의 전투는 압도적으로 강호맹의 인원이 많은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항상 위기를 대비하여 무인과 주술사가 1:1의 비율로 다녔고, 무인 둘에 주술사가 하나인 삼방진을 펼치며 상대해 왔다.
야토가미의 전체 규모는 강호맹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이미 동남아의 지배권은 강호맹이 가지고 있었기에 간혹 침략해오는 야토가미의 규모는 매우 소규모였다.
이토록 많은 야토가미의 인원들과 붙어 봤던 경험이 없는 강형산으로선 매우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대체 한국 상계는 뭘 하는 거야!”
“진정하시오, 강 형! 애초에 그들에게 허락받지 않는 방문이었지 않소.”
처음 한국 상계가 강호맹과의 동맹을 거절했다는 이야기에 기가 찼다. 두손 두발 들어 환영해도 모자랄 판에 거절이라니. 그럼에도 맹에선 최대한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협력하라는 말과 함께 여의치 않을 경우 야토가미보다 먼저 한국 상계를 제압하라는 말이 있었다.
그랬기에 최대한의 많은 인원과 함께 동맹들의 주요 전력까지 동원한 강형산으로선 위풍당당하게 한국 땅을 밟았던 것.
태백 정가에서 그리도 뻣뻣하게 굴던 남궁혜자를 무릎 꿇리고 사술로 자신을 농락했던 시우를 곤죽 낼 생각으로 즐거웠던 그의 심경과는 달리.
한국 상계의 모든 인원들이 모여 있다는 시우의 아지트에서 처음 만난 것은 태백 정가와 한국 상계의 인원이 아닌 야토가미의 본진 세력들이었다.
당황스런 그의 심경을 이해해주지 않는 듯 야토가미는 자신들을 보자마자 덤벼들기 시작했다.
두드드드득.
땅거죽이 뒤틀리며 붉은 껍질을 가진 지네가 솟아 나왔다. 사람 몸통만 한 지름을 가진 지네는 순식간에 칼날과 같은 발을 휘둘러 무인 수명을 죽이고 불까지 내뿜어 그 공포를 확산시켰다.
“한낱 미물 따위가!”
매화검법의 요체를 담은 검기가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며 지네를 동강 내려 했다. 하지만 검기가 몸통에 닿는 순간 지네의 형체가 흐릿해지더니 검기가 지네를 뚫고 백호단원의 머리 위로 떨어지며 삽시간에 세 명의 목숨을 앗아 갔다.
지네는 강형산을 놀리듯 몸을 흔들며 다시 땅속으로 사라졌다.
“모산파! 모산파!”
계가림을 비롯한 전원 주술사로 이뤄진 모산파의 인원들을 애타게 불러 보았지만 모산파들 중 아무도 응답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지금 그들도 야토가미의 음양사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소.”
“무인을 먼저 보호해야지! 저들이 죽더라도 무인을 보호해야 우리 맹이 이기는 거다!”
강형산의 버럭거리는 외침에 몇몇 모산파의 문도와 주작단의 문도들이 강형산을 노려보고 고개를 돌렸다.
“강형 일단 후퇴하는 것이 좋겠소.”
“후퇴? 후퇴라니? 후퇴라니! 절대 안될 말이지!”
단청이 인상을 찌푸리며 한마디 하려는 찰나 발악적인 외침과 함께 비명소리가 울렸다.
“조, 조로구모다! 피해!”
동시에 서른 개의 조로구모가 음양사들로부터 쏘아져 강호맹의 무인들을 덮쳤다.
“끄아아악!”
“비, 비켜!”
“피해!”
꺌꺌꺌꺌꺌꺌꺌꺌.
꺌꺌꺌꺌꺌꺌.
끔찍한 웃음소리와 함께 회전하는 조로구모의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지도 않는 얇은 실들이 뻗어 나와 무인들의 머리와 팔을 잘라냈다.
그중 하나가 곧장 강형산과 단청이 있는 곳으로 날아오며 그의 앞에 선 무인들의 목을 베어내고 있었다.
“아…… 싫어!”
검을 들도 날아오는 조로구모를 멍하니 보던 무인의 머리가 허무하게 잘라 나가며 피 분수가 사방으로 뻗어 나왔다.
강형산도 피할 방향을 찾지 못해 두 눈을 감았을 때.
챙하는 소리와 함께 조로구모가 방향을 뒤틀어 다른 무인들을 사살하기 시작했다.
아직 자신의 숨이 붙어 있다는 것을 느낀 강형산이 두 눈을 번쩍 떴을 때 단청이 태청검을 들고 지친 듯 숨을 몰아쉬었다.
“단청, 그 검은?”
“겨우 방향을 돌리는 것이 다였습니다. 다음엔 우리 차례일지도 모릅니다. 강형.”
강형산은 자신의 얼굴로 튀는 뜨뜻한 액체를 닦아내며 손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손은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사방엔 무인들이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죽어 나가고 있었다.
초록색의 잔디로 가득했던 대지엔 강호맹의 무인들의 피가 흐르고, 무인의 시체가 산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무인들은 몇 초라도 더 살기 위해 동료의 시체를 밟고 던지며 발악을 하였고, 그들의 눈동자엔 더 이상의 투기는 보이지 않았다.
“후퇴하라!”
강형산이 결국 그렇게 외치자 단청도 내력을 담아 외쳤다.
“강호맹! 전원 후퇴하라!”
단청의 말을 기점으로 무인들이 하나둘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것을 기회 삼아 공격하던 야토가미의 무사들에 의해 피해가 컸지만 주작단이 필사적으로 퇴로를 열면서 피해는 점점 줄었다.
그렇게 강호맹은 야토가미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빠져나갔다.
* * *
“역시나 대단한 놈들이구나.”
빌리언트가 띄워준 화면으로 야토가미와 강호맹의 싸움을 지켜보던 남궁혜자의 입에서 작게 신음이 흘렀다.
그들의 전력은 100년 전에 비해 더 강해졌으면 강해졌지 약해지지 않았다.
반면에 해방 이후 전력을 다해 야토가미를 상대하기 위해 수많은 연구를 해왔던 강호맹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그런 강호맹을 우습게 볼 수만은 없었다.
시우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자신들 또한 강호맹에 아쉬운 목숨을 맡겨야 하는 상황이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끔찍하군.”
야토가미의 요괴들에 순식간에 죽어가며 시산혈해를 만드는 장면에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더구나 더욱 화나는 것은 야토가미 측의 모습은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100년 전에도 같은 모습이었나요?”
한세아가 옆에서 묻자 남궁혜자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더 끔찍했지. 그때는 귀공이라는 것. 요괴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 알지 못했으니까. 우린 왜 죽는지도 모른 채 죽어갔지.”
“정말 무서운 상대네요.”
“재앙이야. 재앙 그 자체인 놈들이야.”
야토가미의 일방적인 무력에 강호맹은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하고 피해만 늘려 갔다.
이윽고 강호맹의 대표로 보이는 이가 후퇴를 명령하자 무인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강호맹은 전면전으로 수 많은 피해를 입었고, 후퇴하면서 더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야토가미는 그들을 쫓을 마음이 없는 듯 그들이 빠져나가는 걸 구경하기만 했다.
“양패구상은 결국 되지 않네요.”
“비등한 힘이었다면 가능했겠지. 하지만 힘의 차이가 너무나도 극명해.”
“그들이 걸려들까요?”
“그 녀석의 말대로 그저 찔러 보는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 않더냐. 그 녀석이 훌륭한 법사라 하면 그런 것이겠지.”
“……저도 가서 준비를 해야겠네요.”
“그래…… 죽지 말거라.”
걸음을 옮기던 한세아가 남궁혜자의 말에 돌아보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한세아의 이상한 시선을 느낀 남궁혜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100년 전 우리가 동지들에게 해 주었던 말이었다.”
남궁혜자는 그녀의 음성에 고개를 끄덕이고 애써 웃어 주며 말했다.
“이따 뵙겠습니다. 선배님!”
* * *
“재미없네. 뭐야 간에 기별도 안 가게.”
죽은 무인의 배를 갈라 간을 꺼내 먹은 나루카미가 죽은 무인의 신체를 가볍게 던지며 말했다.
류신은 나루카미의 흰옷 위로 뚝뚝 떨어진 핏물과 그녀의 입가에 잔뜩 묻은 장기의 흔적들을 보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독제독을 노렸다면 뭔가 상대가 될 만한 녀석들을 보냈어야 하는 거 아냐? 최소한 우리한테 뭔가 제약이라도 걸던가.”
“그는 우리가 서로 싸우다 죽는 걸 바라는 건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
“아마도 강호맹이 그에게 큰 필요가 없는 상태 정도가 아닐까요?”
“하?! 그럼 우릴 쓰레기 처리 업자쯤으로 생각한다는 거야? 이 야토가미의 나루카미를?!”
“그렇지 않고서야 이 조잡한 작전 같은 게 이해되지 않는군요.”
“퉤! 이 새끼의 간을 씹어 먹어 치워주겠어!”
나루카미가 먹던 간을 뱉고 손에 쥐어진 간을 터트리며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왜!”
나루카미는 곧 울 것 같았다.
“이 앞으로 또 진입니다.”
“이익! 빌어먹을 애새끼!”
나루카미가 분을 참지 못하고 부르르 떨자 그녀의 주위로 차가운 냉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냉기 중 일부가 어느 한 지점을 중심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저거 보십시오. 저기부터 또 다른 진의 시작입니다.”
“저곳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데?”
“아마도 카가미가 당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당하게 될 겁니다.”
“그 새 새끼가 당했던 방법이라고? 그럼 어떻게 해?”
“걱정마십시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류신이 앞장서며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음양사의 무리 속에 숨어 있던 초대급 10인의 술사도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음양사들 틈에서 숨 가쁘게 수인을 맺던 그들의 눈동자가 부르르 떨리기 시작하더니 동공이 사라지며 백안으로 물들고 그들의 발은 땅에서 약간 떨어진 채 허공을 부유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시우가 펼쳐 놓았던 몇 개의 마법진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기 시작했다. 만경진과 환영마법진을 비롯한 방어진과 살상진까지 그렇게 진들이 모조리 사라지자 류신과 나루카미의 눈앞에 정렬한 태백 정가와 한국 상계의 인원들이 나타났다.
“이 망할 쥐새끼 같은 놈들 여기에 숨어 있었구나!”
나루카미가 입가에 묻은 핏물을 닦으며 흐느끼는 음성으로 외쳤다.
“최시우는 어디 있느냐. 그놈 먼저 죽여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