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남궁혜자와 곽동원이 딱딱한 얼굴로 마주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시우가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준비는 잘 되고 있느냐?”
“장비를 조금 손보고 있었습니다.”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남궁혜자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시우를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자신들이 안전할 거라는 생각을 버리게 해야지요. 큰 소득은 없다 해도 전략상 충분한 이점은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제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고요.”
“그렇지.”
남궁혜자는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간소한 대화가 끝이 나자 곽동원이 말문을 열었다.
“강호맹에서 이런 게 왔습니다.”
곽동원은 총 5장으로 된 공문서를 시우에게 보여주었다.
SNH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지금 삼국 간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다다라 있는 상황이기에 정식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지 못했지만 강호맹은 SNH를 한국 상계의 공식기구로 인정하고 공문을 보내왔던 것.
공문을 읽던 시우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곽동원에게 공문서를 돌려주며 말했다.
“이게 지금 우리에게 허락을 구하는 건가요? 협박하는 건가요?”
“그게 지금 한국 상계의 위치라는 것이겠지.”
남궁혜자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공문을 보내온 만큼 동맹을 맺고 야토가미를 상대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됩니다.”
곽동원이 씁쓸하게 이야기하자 시우는 남궁혜자를 보며 물었다.
“할머님의 세가는 강호맹에서 활동하는 무인들이 있나요?”
“대부분의 중국 상계 세력들은 의무적으로 강호맹에 인원을 파견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 세가야 워낙 주류에서 벗어난 지 오래기에 파견되는 무인들도 대부분 변방이나 잡일을 하는 것이 지나지 않는다. 전투 단체 안에 포함되는 것도 결국은 주류 세력들과 그들을 따르는 이들만으로 구성된단다.”
“결국 주류 세력들이 대부분의 전투에 돌아오는 전과와 전공들도 모두 가져가겠군요.”
“그런 셈이지.”
“혹시 이번 파견에 합류되어 올 가능성도 있을까요?”
“글쎄다. 연락을 해 보아야 하겠지.”
“그럼, 어떻게 해서든 남궁세가의 인원들을 빼내라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팀장님은 중국 강호맹에 동맹을 거부하며 무단으로 한국 땅을 밟을 경우 침략행위로 생각하겠다는 공문을 보내주세요.”
“뭐?!”
“네?!”
시우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곽동원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겨우 말을 이어갔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현재로선 야토가미를 하나 상대하는 것조차도 우리에겐 버겁습니다. 더구나 강호맹은 단순 인원의 수로만 봐도 한국 상계 전체와 일본 상계 전체의 인원들을 합친 것에 몇 배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무인을 보유하고 있어요. 그들을 적대하는 것보단 동맹을 맺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겁니다.”
“그래, 우리가 아무리 많은 준비를 해도 결국은 인원수에서 절대적으로 밀린다. 중국 상계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어마어마한 규모를 가지고 있단다.”
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팀장님의 자료를 통해서 파악하고 있어요. 하지만 동맹은 우리에게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만약 동맹을 맺는다면 중국 강호맹은 느긋하게 우리 뒤에 서서 야토가미와 한국 상계 간의 일전을 지켜보기만 할 거예요. 그리고 모든 전투가 끝난 다음엔 동맹이라는 이름 하에 획득물을 모두 빼앗아 가려고 하겠죠.”
“·……!”
“그들이 이렇게까지 강수로 나오는 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는 거예요. 사실 그게 아니라면 야토가미와 한국 상계가 싸우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필요한 거라면…… 설마?”
곽동원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야토가미의 힘 말이에요.”
“하지만 야토가미의 힘 같은 건 저희가 이긴다고 해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닐 텐데요.”
“그거야 100년 전의 이야기이고, 지금은 달라졌잖아요. 우리가 야토가미와 대적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 이상 우리가 야토가미의 힘을 빼앗을 가능성도 그들은 배제하지 못하는 것이겠죠.”
“……아!”
“야토가미의 힘을 우리 한국 상계가 가져가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을 거예요. 일전에 절 데려가려 했던 것만 보아도. 아직 그들에게 야토가미의 힘을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 같은데. 그 와중에 우리가 야토가미와의 전투를 통해 이기고 힘까지 가져간다면 강호맹으로선 엄청난 위험부담을 짊어지게 되는 거죠.”
“하…….”
팀장은 시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자신의 머리는 거기까지 회전하지 않는 것에 대해 자책아닌 자책에 빠졌다.
“그러니 강력하게 강호맹을 거부한다는 공문을 보내면, 급박해진 강호맹은 어떻게 해서든 이번 전쟁에 참여하려 할 거예요. 그렇다고 우리를 적대할 순 없겠죠. 타국에서 야토가미를 앞에 두고 우리까지 적대할 수는 없으니.”
시우는 말을 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서든 우리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한국에 들어오는 방법을 선택할 거예요. 그러니 최대한 강력한 거부 공문을 보낼 필요가 있는 거죠.”
시우의 이야기에 곽동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강력하게 거부 공문서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민간인 대피와 공역 형성은 어떻게 처리되고 있죠?”
“주술사들이 나서서 대피시켰고 공역 형성은 삼일 안으로 완성될 겁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곽동원은 일 처리를 위해 자리를 먼저 떴다.
“제가 없는 동안 지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시우가 남궁혜자를 보며 이야기하자 남궁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한국 상계에서 상계 인간들 간의 대단위 전투 경험이 있는 것은 혜강과 남궁혜자밖에 없었다.
“언제 돌아올 생각이냐?”
“그렇게 늦지 않을 겁니다.”
“알겠다.”
“지휘는 남궁혜자 님께 맡겼으니 전적으로 그분을 따르도록 해.”
시우는 팔과 다리에 은색의 파츠를 끼우며 말했다.
“정말 괜찮을까요? 아무리 시우 님이라도.”
한세아는 걱정을 가득 담은 눈동자로 시우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전면전을 펼칠 것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방어만 하고 있으면 그사이에 돌아올 거니까.”
시우의 말에 한세아는 고개를 절레 저으며 말했다.
“소녀가 걱정하는 건 저희가 아니라 시우 님의 안위여요.”
곽동원을 비롯한 모두가 참석해 있던 회의 도중 전술·전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던 순간 시우는 자신이 생각하던 작전을 안건으로 내밀었고, 곽동원을 비롯한 모두가 경악을 하며 반대를 했다.
시우의 부재는 한국 상계에 커다란 전투력 손실을 말하는 것과 같았고, 야토가미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시우의 부재를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시우는 야토가미를 상대할 무기들이 대부분의 무사들에게 공급되었고, 한세아를 비롯한 미화관의 정령무사들이 전투 준비가 완료된 상황에서 한국 상계의 압도적인 패배는 없을 거라 확신에 가까운 말로 설득했다. 결국 남궁혜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인원들은 시우의 부재를 용인하였다.
“내가 같이 안 가도 되겠어?”
“네가 천살지존검을 완벽히 다룰 수 있었다면 함께 갔겠지만, 지금은 힘들어. 그리고 그렇게 오래 걸릴 일도 아니고.”
“한 번에 넘어갈 수는 없는 거야?”
“한 개의 성 규모의 대단위 연성진은 나도 펼쳐 본 적이 있지만, 국토 전방위 크기로 펼쳐진 건 나도 처음이야. 억지로 들어가려다간 시공의 틈새에 끼어 가루가 되어 버리겠지.”
“야토가미의 힘은 진짜 대단하네.”
“아마도 모두가 그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지 않을 거야. 그랬다면 아시아는 모두 그들의 손에 진즉에 넘어갔겠지. 카가미를 죽일 때 나를 지켜보고 있던 놈인 거 같아. 이번에 그자가 참전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조심하도록 해.”
각반과 팔 토시 모양의 은색의 파츠를 모두 착용한 시우는 아공간에서 간소한 모양의 벨트를 하나 꺼냈다.
“개량한 거야 용량은 두 배정도 밖에 안 되니까. 먼저 적응부터 시켜.”
“모양도 작으니 훨씬 좋네.”
“애초에 그런 걸 안 쓸 생각을 해야지.”
한세아는 시우와 우빈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면서 폭풍 전의 이 평화가 조금이라도 더 지속되길 바라고 있었다.
* * *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린 밤바다는 수평선 너머로 움직이는 무역선조차도 오가지 않을 만큼 어두웠고, 그 표면으로 쉴 새 없이 파도를 쳐댔다.
인간이 찾지 않는 방파제 주변을 둘러싼 테트라포드는 천천히 삭아 가고 있었고, 시간의 유한함 속에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는 진리를 깨달은 나루카미는 울먹거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카가미는 죽은 거야?”
“그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십니까?”
“아니, 그놈의 귀력을 내가 흡수하지 못했다는 게 아쉬워서.”
나루카미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얼굴로 류신을 바라보았다. 기괴하게도 그녀의 입은 얼굴 전체와는 달리 활짝 웃고 있어 소름 끼치는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도 그가 죽은 건 꽤 큰 전력 손실입니다.”
류신은 무감각한 표정으로 나루카미를 보며 말했고, 나루카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재수 없는 놈이 그나마 다른 놈의 손에 죽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 안 그랬으면 내 손에 죽었을 거니까.”
“……그렇습니까?”
“오오가미께 다음 카가미는 좀 잘생긴 미남자로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어. 류신 네 얼굴은 내 취향이긴 한데. 그 뻣뻣한 감정 없는 표정이 영 마음에 안 들거든.”
“그 의견은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야가미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겠어?”
“그는 복귀 중입니다. 신쇼쿠를 지킬 인원도 필요합니다.”
“카가미가 죽었어, 그 의미를 모르고 하는 소리는 아니지?”
울 것 같은 표정의 나루카미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한국 상계는 독보적 존재인 최시우란 인물에 의해 과대평가 받고 있습니다. 한국 상계의 힘은 이미 100년 전에 비교해 보았을 때도 약 32%의 성장만을 보여 왔고, 최근 백면궁 사건을 통해 전체 상계의 힘 또한 약 42%가 소멸된 상태입니다. 최시우란 자만 잡으면 한국 상계는 더 이상 야토가미의 걸림돌이 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하는 소리야. 최시우란 놈이 문제인데. 그놈을 잡기 위해서 우리 셋 모두가 뛰어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는 제가 상대할 수 있습니다.”
나루카미는 이제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 빌어먹을 눈물…… 그게 불안한 거라고 왜 네가 ‘상대할 수 있다’란 말을 하는데? 평소처럼 ‘제압’한다나 ‘소멸’시킬 수 있다가 아니라.”
창백한 얼굴의 류신은 잠시 나루카미가 눈물 닦는 것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실수했군요. 그는 제 손에 ‘제압’되어 저의 실험체가 되고, 그가 가진바 힘을 모두 제 것으로 흡수하여 야토가미를 한 층 더 높은 단계로 끌어 올릴 겁니다.”
의심스런 눈으로 류신을 바라보던 나루카미는 다시금 눈물을 닦고 말했다.
“……중국에서 움직일 거라 하던데?”
“강호맹의 광동성 지부와 사천의 있는 문파들을 초토화시켰다고 하더군요.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가미를 남겨두고 가는 거야?”
“그저 만약을 대비한 것뿐입니다. 강호맹은 한국으로 움직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왜 한국으로 움직인다는 거지?”
“표면상으론 공동의 적인 우리를 두고 있는 동맹관계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제귀철이라는 무기도 건네 줬을 만큼 공고한 동맹관계.”
“그럼 진실은 뭔데?”
“저도 잘 알 수 없습니다만, 아마 한국이 저희를 상대로 해서 이길 경우를 생각하는 것이겠지요.”
“우리를 이겨?”
“한국 상계가 저희를 이기고, 저희의 힘을 가지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겠죠.”
“하하하하,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네.”
“뭐 그들이 생각할 만한 수준의 것이기는 합니다.”
“그럼 강호맹이건 한국 상계건 다 쳐 죽이면 되는 건가?”
“늘 하셨던 대로.”
류신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철그럭 철그럭 철그럭.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발광 조명을 보닛과 루프에 촘촘하게 달아 어두운 방파제를 낮처럼 밝히는 차량이 다가왔다.
차량의 바퀴에는 극한지방에서나 쓸 법한 스노우 체인이 바퀴 전체를 감고 있어 움직일 때마다 시끄러운 철근 소리가 울렸다.
“도착했나 보군요.”
류신이 고개를 돌려 차량 뒤쪽을 바라보았다.
어둠만이 가득하던 일대에는 환한 조명을 밝힌 차들이 도로를 따라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나루카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루카미는 모든 정복 전쟁에서 최선봉에 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나루카미는 대륙을 잇는 다리이고 길을 만드는 개척자였다.
전대 나루카미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죽어 간 것 때문에 무던히도 억울해했다는 것은 전해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삶 또한 다를 바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그럼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 살 필요가 없었다.
자신은 다리이고 길이었다.
나루카미가 방파제 끝에 다다라 두 손을 바닥에 대었다.
쩌저저적.
검은 바다에서 밀려와 방파제에 부딪쳐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다시금 바다로 끌려가던 하얀 거품들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검은 바다를 잠식해 가는 푸른색의 시퍼런 얼음들.
나루카미는 그렇게 세상에 없던 거대하고 긴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길이다! 1세기 만에 다시 돌아온 야토가미의 길이다!”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어두운 밤하늘을 가득 채울 듯 커다란 음성이 되어 사방을 가득 메웠다.
“길이다! 1세기 만에 다시 돌아온 야토가미의 길이다!”
“길이다! 1세기 만에 다시 돌아온 야토가미의 길이다!”
“길이다! 1세기 만에 다시 돌아온 야토가미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