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이토록 많은 인원들을 데려왔단 말이냐?”
남궁 혜자가 백호단과 주작단을 보며 물었다.
“강호맹의 의도가 심히 궁금하구나.”
“이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강호맹과 대상자를 보호하기 위함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보호? 강호맹의 무력 집단이 한국에 있기라도 할 것이란 말이냐?”
남궁혜자는 계속 속내를 감추는 강호맹의 인원들을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들이 노골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붙였다.
“음…… 그건 아닙니다.”
단청이 곤란한 듯 말을 잇지 못하자 강형산이 당당하게 앞서며 말했다.
“그자를 맹으로 데려오라는 상부의 지시입니다.”
“허허……!”
정순지를 비롯한 정형진, 그리고 태백정가의 모든 이들이 놀란 얼굴이 되었다.
현재 시우는 한국 상계의 최후의 보루와 같은 존재다. 한 창 야토가미와 전쟁이 본격화되는 와중에 시우의 부제는 자연히 최악의 상황으로 다다를 수밖에 없어진다.
“강호맹이 무슨 권리로 맘대로 데려간다는 말이냐?”
“그런 권리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리 부탁드리는 것이지요.”
강형산이 뻔뻔하게 말했다.
“거절한다면?”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형산의 물에 남궁혜자가 분노를 쏟아 내며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범 등에 올라탔다고 자신이 범인 줄 아는 멍청한 녀석이 다 있구나.”
“범이 아니란 건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범의 등에 올라타 있는 동안은 누가 덤벼들지 않을 거란 건 확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호오! 그러느냐! 한번 확인해 보자꾸나.”
남궁 혜자가 양 손에 수기를 뿜어내며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것을 기점으로 백호단과 주작단의 무인들 모두가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먼저 시작한 것은 태백정가임을 기억해 주십시오.”
“네놈이 끝까지 잘난 듯 혓바닥을 놀리는구나.”
정가의 인원들도 모두 검을 뽑자 일대는 순식간에 전투의 장이 되어버리기 직전이었다.
“그만!”
정순지가 사자후의 수법으로 쩌렁하게 외치자 살기를 줄기줄기 내뿜던 무인들이 우뚝 멈추었다.
“어머니, 그만하시지요. 자네들도 그만하게나. 장난이 심하면 끝이 안 좋은 법이네.”
“지금 이런 굴욕을 당하고도 나더러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냐?”
“지금 저희의 적은 이들뿐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들뿐만이 아니다’라는 말에 단청이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남궁세가와는 많은 교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태백정가는 강호맹과 많은 연관이 있었다. 해방 전에는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야토가미와 대응했고, 해방 이후에도 나쁘지 않은 관계를 계속 이어왔다.
하지만 강호맹에게 한라검문과 해도문이 생기면서 태백정가는 자연스레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태백정가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강호맹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난 독자적인 세력을 추구했던 것도 있었다.
그리고 방금전의 자신들의 태도와 그에 대응하는 태백정가의 태도로 인해 확실하게 태백정가는 강호맹을 ‘적’으로 규정했다.
강호맹은 한국 상계에 주종관계를 원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상 이런 상황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강호맹이 한국 상계에 키울 세력은 한라검문과 해도문이면 충분했다.
“또한 시우는 저희가 이래라저래라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아이가 도와 달라 하면 얼마든지 돕겠지만, 선택은 그 아이만이 할 수 있습니다.”
정순지의 말에 남궁 혜자가 손에 모았던 수기를 서서히 풀었다.
“그래, 애초에 내가 뭐라 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지.”
남궁혜자는 고개를 선선히 끄덕이며, 말했다.
“어디 데려가고 싶다면 그리 해보아라. 하지만 알아 두거라. 그 아이의 의지에 조금이라도 반하는 결정을 하게 하는 순간. 태백정가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놈은 스스로 중국에 가고 싶다고 빌게 될 겁니다.”
강형산이 남궁 혜자를 보며 비아냥거렸다.
남궁 혜자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부르르 떠는 모습을 보이다가 이내 무표정한 표정이 되었고, 이윽고 서서히 웃는 모습까지 보게 되었다.
물론 강형산은 남궁 혜자의 그 웃음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 * *
“방학 때 심화반 안 들어갈 거야?”
“응. 방학 때는 개인 공부를 조금 더 파고들고 싶거든.”
시우의 담담한 대답에 소혜는 아쉬움을 느꼈다.
“갈 대학은 정했어?”
“일단은 서울대.”
“내가 다니는 학원에 서울대 심화반 있어. 테스트 강의 같은 것도 있으니까 한번 들으러 와.”
“응. 필요하면 가도록 할게.”
시우의 대답에 그가 학원에 올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느낄 때쯤 옆에서 우빈이 끼어들었다.
“소혜야, 나도 거기 들으러 가도 돼?”
“안됐네. 우리 학원은 기본 커트라인이 1등급이거든! 그리고 그 공 좀 치워 하루 종일 뭐 하는 거야!”
우빈은 얼마 전부터 검은색의 공을 하루 종일 가지고 다녔다.
수업 때건 밥 먹을 때건, 공을 손안에서 놓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팔을 타고 굴리거나 몸 전체를 이용해 묘기를 부리는 등 전혀 학생답지 않은 모습으로 매번 소혜의 경고의 대상이 되었다.
“이건 내 재활 훈련용 공이야. 나도 서울대 가려면 빨리 몸을 회복해야지.”
“너도 서울대 가게?”
“너희 다 서울대 간다며? 나도 같이 가야지. 우리 중곡 삼총사잖아.”
우빈의 말에 소혜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우빈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기말고사 이후로 우빈이 복귀한 후 세 사람은 다시금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소혜도 우빈이 있어 시우를 대하는 것이 더 편했고, 예전보다 더욱 가깝게 지내는 것도 불편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소혜가 우빈과 시우를 독점한다며 소혜를 질투하던 이들이 많았지만 우빈 특유의 친화성과 시우 특유의 냉담함으로 인해 두 사람에게 더욱 친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이들은 소혜에 대한 질투심마저도 내려놓은 채 팬의 입장으로 바뀌어 두 사람의 연결 지점을 소혜로 삼기 시작했다.
다행히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소혜가 우빈이나 시우와 사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인 것도 있었고, 소혜 또한 두 사람에 비해 외모나 성적으로 떨어지는 입장도 아니었기에 소혜를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그 때 즈음 사람들은 세 사람을 삼총사로 부르기 시작했고, 소혜는 그 별명을 질리도록 싫어했다.
“으……. 너 다시는 그 이야기하지마. 중곡 삼총사? 초등학생도 아니고 으…….”
우빈은 소혜의 반응을 더욱 즐거워하며 몇 번이나 삼총사를 외쳤다.
그렇게 장난스레 행동하던 우빈의 표정이 일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
하교하던 걸음마저 멈춘 채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보며 소혜가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우빈이 시우를 바라보자 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떡볶이는 못 먹겠다. 소혜야.”
“응? 왜?”
“……그게 갑자기 똥이 마려워서 말이야 하하하하하. 나 터질 것 같아!”
우빈이 빵하고 웃음을 터트리자 소혜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꽥 소리를 질렀다.
“내가 진짜 너랑 다신 떡볶이 먹으러 가나 봐!”
“에이! 뭐 한번 가지고 그러냐! 다음에 내가 순대랑 같이 거하게 쏠게!”
“됐거든!”
소혜는 후다닥 달려가며 자신을 기다리는 차에 타 버렸다.
그 모습을 보던 시우가 입을 열었다.
“그런 식으로 대하면 좋아하던 여자들도 도망치겠다.”
“뭐 어때 어차피 잰 너 좋아하잖아.”
“…….”
“근데 내가 느낀 거 맞지?”
“감각의 범위가 더 넓어졌냐?”
“응, 그런 거 같아.”
“근데 우리나라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아는 사람들이냐?”
“중국에서 만난 사람들이랑 비슷한 거 같은데.”
우빈은 교복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투박한 모양의 벨트를 꺼내 들었다. 얕은 주머니에서 그 큰 물건이 나오는 모습이 꼭 마술같이 신기하게 보였지만 우빈도 시우도 그 모습에 큰 감흥이 없어 보였다.
“중국?”
“어, 증조할머니가 남궁세가 사람이시거든. 어렸을 땐 자주 놀러 가고 그래서 알아.”
“중국에서 움직인 건가?”
“근데 그들이 왜 왔을까?”
“뭐, 필요한 것이 있으니 왔겠지.”
“필요한 거?”
“우리가 목적인 거 같으니 가 보자.”
우빈이 벨트를 착용하자 시우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거 좀 작게 만들어 줄 순 없어? 꼭 애들 장난감 찬 거 같단 말이야.”
“그게 없이도 힘을 쓸 수 있게 하면 되지.”
“젠장.”
* * *
강형산 일행은 태백정가 측에 시우를 불러 줄 것을 요청했지만, 남궁 혜자의 단호한 거절에 더 이상 시우를 만나기 위한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은 모두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그들은 직접 시우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시우에 대한 조사는 강호맹 자체에서 이미 끝난 상태였기에 그가 이 시간에 어디 있는지는 얼마든지 예상 가능했다.
“어째서 맹과 정가는 그놈에게 목을 매는 거지?”
“야토가미의 힘을 제압할 수 있다잖아요. 그것만으로도 그에겐 충분한 가치가 설명되는 거죠.”
주작단의 단주 맹소현이 말했다.
“그거야 태백정가에서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어. 아니면 한라검문이나 해도문 녀석들이 잘 못 봤거나.”
“어쨌든 그의 등장으로 패배를 모르는 야토가미가 한발 물러선 것만큼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해요.”
“쳇, 실제 야토가미가 물러선 것도 아니잖아. 그놈들의 힘은 그 정도가 아니라고.”
야토가미와의 직접적인 전투를 몸소 겪어 봤던 강형산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강호맹은 야토가미와 종종 부딪치곤 했었다. 야토가미가 물러난 후 무주공산이 된 동남아시아의 지배권을 가지게 된 강호맹은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금 동남아시아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 나타난 야토가미와 번번이 신경전을 벌였어야 했다.
이에 청룡단과 백호단이 매번 야토가미의 그 괴랄한 요괴들과 일전을 벌여야 했고, 강형산 역시 그 악몽의 피해자였다.
“그게 진실이든 거짓이든 무에 상관인가? 거짓이라면 아쉽겠지만 본 맹의 힘을 믿을 수 있는 것이고, 진실이라면 본 맹이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으니 이 또한 나쁜 것이 없지.”
“과연 태백정가에서 순순히 물러날까요?”
남궁혜자와의 일전을 뒤에서만 바라보던 주작단의 부단주 장혜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글세, 순순히 물러난 걸 보면 그게 거짓인 거 같기도 하고, 자신들의 의지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보면 진실인 거 같기도 하고. 헷갈리는군.”
“뭐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는가? 일단 맹에 데려가면 되는 거지.”
강형산이 더 이상 생각하기 싫다는 듯 말했다.
“근데 이 정도 인원으로 괜찮겠어요? 그도 자신만의 세력을 가지고 있다던데.”
“아, 아직 신생 세력이고, 대부분 무공을 익힌 사람이 없다고 하니 걱정할 건 아닌 듯해.”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뒤를 돌아본 장혜란이 불안한 듯 말을 흐렸다.
맹에서 함께 온 주작단과 백호단의 인원은 각각 스무 명만을 제외하고 태백정가에 남겨둔 상황이었다.
명분으로는 대인원이 움직이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이 두렵다고 이야기했지만 실상 태백정가가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손과 발을 묶어 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전히 겁이 많군. 왜 우리가 그리 못 미덥나?”
“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말한 것뿐이라고요!”
장혜란이 발끈하며 이야기하자 강형산이 비웃음을 흘렸다.
“어떤 사태든 걱정하지 마. 우리 백호단은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잠깐.”
강형산의 말을 자르며 맹소현이 차갑게 말했다.
우뚝 멈춰선 그녀의 손이 주먹을 쥐고 올라갔고, 그들을 따르던 무인들도 우뚝 멈춰섰다.
“왜? 무슨 일인데?”
강형산이 껄렁하게 말하자 맹소현이 도끼눈을 뜨며 그를 바라봤다.
“이게 느껴지지 않아요?”
그녀의 말에 사방으로 기감을 펼친 강형산은 그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소리가 왜 안 들리지?”
“그것뿐만이 아니예요. 살기…… 살기를 품고 있어요. 이건 진(陣)이에요.”
세 사람의 시선이 맹소현에게 모였다. 맹소현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