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
“늦었다.”
커다란 짐을 멘 우빈을 보며 시우가 말했다.
“짐 정리를 하느라 좀 시간이 걸렸어.”
우빈이 샐쭉거리며 웃었다.
“바로 시작하자.”
시우의 말에 세아가 놀라며 물었다.
“벌써요? 짐을 먼저 푸는 게 어떨까요?”
“쉬고서 마음 정리할 시간 필요해?”
시우가 묻자 우빈이 되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시우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먼저 움직였다.
시우는 곧장 최근에 지어진 실내 체육관으로 향했다.
트레이닝 룸을 비롯해 사우나와 목욕 시설이 갖춰져 있고, 간단한 물리치료까지 받을 수 있는 시설들이 완비된 체육시설이었지만, 미화관의 대원들에겐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정령을 소환할 수 있게 하는 매개체인 에테르가 시우가 펼쳐 놓은 마법진 위에서 더 잘 모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대원들은 근육운동이나 치료의 목적이 아니고선 실내체육관을 주로 사용했다.
건물의 한편 천정까지 시원하게 뚫린 대련장에 시우와 우빈이 들어섰고, 시우가 관심 있는 사람들은 참석해도 좋다는 말에 대부분의 대원들이 하던 것을 멈추고 시우를 쫓아왔다.
대련장에 들어선 시우는 특이한 모양의 벨트를 우빈에게 건네주었다. 꽤 묵직한 무게의 벨트는 흡사 아이들의 장난감처럼 여러 가지 문양의 장식들이 달려 있었다.
“이건 뭐야?”
“일단 착용해.”
시우의 말대로 벨트를 착용하자 우빈은 몸에서 생기는 이상한 느낌에 눈을 번쩍 떴다.
“뭐야, 이거. 지금 내공이…….”
우빈은 벨트를 착용하는 순간 온몸의 기운이 넘치며 다시금 활력을 되찾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본래 단전을 되찾은 것처럼 당장이라도 몸 안에서 뛰노는 기들을 맘껏 분사하고 싶었다.
“좋아하지 말고. 풀어 봐.”
“…….”
좋았던 것도 잠시 벨트를 풀고 나자 몸 안을 뛰놀던 내공이 사라지며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듯했다.
“얘기했잖아. 단전은 회복 못 시킨다고. 그건 가상 단전이야.”
“가상 단전?”
“그래. 벨트에 포함된 기는 단전의 그것처럼 사용할 수 있지만, 단전을 더 키우거나 더 성장시킬 순 없어. 벨트에 들어갈 수 있는 마나도 한계가 있고.”
“아…….”
우빈은 아쉬운 표정으로 벨트를 바라봤다. 벨트를 착용한 순간 느껴지는 바론 그리 오랜 시간 동안 무공을 부릴 수 없을 거라 예상되었다.
단전이라면 내 스스로 크기를 키우고 내공을 사용하는 시간 동안에도 계속 내공이 차오르기에 전투를 함에 두려울 것이 없었지만, 이 벨트론 그저 초식 한 두 개만 쓰면 그 이상은 할 수 없을 터였다. 그래선 진짜 무인이라 할 수 없었다.
“걱정마. 다 생각해 놓은 게 있으니까.”
“뭔데?”
시우는 구경하는 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혹시 오행진 펼칠 수 있는 사람들 있어?”
시우의 말에 김준상이 손을 들며 옆에 앉은 네 사람을 가리켰다.
“저희가 먼저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좋아. 보여줘.”
“시우 님을 상대로 말입니까?”
“응. 그냥 대련이니까 가볍게 보여줘.”
김준상과 대원들은 복권에 당첨이라도 된 사람처럼 들뜬 얼굴로 나섰다. 그들에게 최고의 스승이자 경쟁자는 다름 아닌 시우였던 것.
시우 또한 완드 대신 검 한 자루를 들고 천요검법의 자세를 취했다.
“잘 보고 있어. 백면궁의 궁주 박거산을 일격에 처리한 검이다.”
시우의 말에 우빈과 미화관의 대원들은 일 초라도 그의 동작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깜빡였다.
김준상을 비롯한 4명의 대원들도 각오를 다졌다.
시우가 짜 놓은 숱한 지옥훈련과 마법을 이용한 생사를 넘나드는 대련 속에서 점점 스스로가 강해졌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시우를 뛰어넘는 것은 요원한 일이였다.
하지만 정령과 검법을 이용한 오행진을 익힌 후부터는 그들 마음속에 새로운 자신감이 감돌았다.
다섯이서 손이 맞아 갈수록 점점 더 강해지는 효력을 갖춘 오행진은 총 오십 명으로 구성되는 최종진이 되었을 때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하는 궁금증까지 가질 정도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오행진을 맞춘 다섯 사람은 드디어 시우를 당황하게 할 수 있을 만한 찬스가 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늘 처음으로 시우 님께서 당황한 표정을 지을 수 있도록 해드리자.”
“기대되는군요.”
김준상 옆에 선 박철호가 웃으며 말했다.
“긴장 풀지 마. 만만치 않은 분인 건 잘 알고 있지?”
“넵!”
네 사람이 기합이라도 넣듯 대답하자 김준상이 곧장 선수를 시작했다.
“발진!”
맨 앞에 선 김준상이 왼쪽으로 빠지자 박철호가 앞으로 나섰다.
시우는 검기가 어린 검을 쭉 내 뻗으며 검기를 날렸다.
끼야야아아악!
천요검법 특유의 비명소리가 울리며 날카로운 검기가 오행진에 직격했다.
“온다!”
김준상이 외치자 박철호와 그 오른쪽으로 선 차철진이 앞으로 나서며 검을 들어 막는 모습을 보였고, 그 순간 그들의 앞엔 철로 만든 방패와 흙벽이 솟아오르며 검기를 집어삼켰다.
“가자!”
다섯 사람은 마치 한 몸이라도 된 듯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기며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럴 때마다 그들의 머리 위로 떠 오른 정령들도 기민하게 움직이며 시우를 몰아치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팍!
시우가 연달아 검기를 날리면 허공의 방패 모양이 나타나기를 막아 내고 시우가 뒤로 빠지면 불과 물의 화살이 시우를 향해 날아들었다.
전체적인 전투 양상이 시우에게 불리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때 시우가 모두를 향해 말하듯 크게 외쳤다.
“지금부터 더 집중해!”
시우는 그렇게 외치며 검을 가슴께까지 올렸다.
그러자 그의 검에 어렸던 선명한 검기가 천천히 옅어지기 시작하며 종국에는 검기가 금방이라도 끊길 듯 아슬아슬해 보였다.
김준상을 비롯한 대원들 또한 시우가 이상한 모습을 보였지만 방심하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을 기회 삼아 어떻게 서든 시우에게서 일승을 얻어 오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를 몰아붙였다.
오행진으로부터 수십 개의 불화살과 물화살 거기에 더불어 철화살까지 시우의 요혈을 노리며 날아들기 시작했다.
시우는 눈앞을 가득 메우는 화살들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차근차근 화살들을 헤치며 나아갔다.
스스스슥!
방금까지 마치 철과 철이 부딪친 듯 굉음을 울렸던 시우의 검은 전혀 힘들이지 않고 자신에게 날아드는 화살들을 소멸시켰다.
마치 거대한 힘 앞에 집어 삼켜지는 듯 오행진에서 뿜어내는 기운들이 시우의 검 앞에서 허무하게 사라질 뿐이었다.
시우와 오행진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김준상은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검을 익히기 시작한 후로, 보이지 않은 것에 얼마나 커다란 힘이 담겨 있는지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꼈던 그였다.
하지만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오행륜!”
김준상의 외침과 함께 그들의 정령들이 자신들의 주인을 떠나 한 대 뒤엉키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지며 종국에는 하나로 합쳐진 것처럼 오색의 띠를 완성시켰고, 그 중심에 하얀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체육관 내부의 있는 이들은 이미 정령의 힘을 부리기 시작한 이들.
그 하얀 빛에서 엄청난 양의 파괴적인 힘이 쌓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저마다 대비를 하기 시작했다.
끼야야야야아악!
시우의 검에서 다시 한번 끔찍한 비명이 내질러지자 오행륜은 그에 답하듯 엄청난 압력의 빛기둥을 발사했다.
파스스스스스스스스!
“저럴 수가!”
오행륜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기둥의 힘이 건물 하나를 날려 버릴 만큼 대단한 것임을 알고 있던 이들은 시우의 천요검법 앞에 빛기둥이 사라져 가는 것을 보며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척!
빛기둥의 힘이 다하고, 시우의 검이 김준상의 목에 닿자. 김준상이 손을 들며 말했다.
“오늘도 졌습니다.”
“어땠어?”
“……역시 대단하십니다.”
시우는 고개를 돌려 우빈을 바라보았다.
“어땠어?”
우빈은 완연히 놀란 얼굴로 귀신을 본 것처럼 물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 그 작은 힘으로 저 커다란 힘을 압도할 수 있는 거지?”
기억이 시작될 때부터 무공을 익힌 무인이었던 우빈의 보는 눈은 역시나 달랐다.
성인이 다 된 후에야 시우가 펼친 마법진 위에서 넘쳐흐르는 에너지 중에서 에테르를 쌓는 미화관의 무인들과 달리 아주 어린 시절부터 미약한 기를 느끼며 내공을 쌓았던 우빈은 한순간에 시우의 힘에 대해서 느낄 수 있었다.
“이 검 주위로 뭐가 느껴지지?”
“설마…….”
시우가 검을 좌우로 휘두르고 상하로 내리그었다.
그렇게 차분한 와중에 기의 흐름을 확실하게 느낀 우빈의 눈동자는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떠졌다.
“대……자연의…….”
우빈의 입장에선 말도 안 되는 일인지라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말도 안 돼. 그건 그냥 설화에 나오는…….”
시우는 다시금 검을 좌우로 위아래로 휘둘러 보였다.
우빈은 벨트의 기운을 이용해 오감을 날카롭게 하며 시우의 검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몸으로 느꼈다.
시우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대기에 흔적 없이 퍼져 있어야 할 기운들이 모여 시우의 검을 따랐다.
“앞으로 네가 익혀야 할 검이야.”
“검에 이름이 있어?”
“천살지존검.”
우빈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 * *
출전의 준비로 잔뜩 흥분하던 카가미는 창백한 얼굴의 미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인상을 찌푸렸다.
요괴의 세계에서 잘 생기고 못생김의 기준 자체가 전무하지만, 반은 인간인 그들에게 류신의 아름다운 외모는 언제나 카가미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뭐야? 엄마 노릇이라도 하려 하나?”
카가미가 가시 돋친 혀로 이야기하였지만 류신에게선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오가미께서 이걸 전해 주라 하셨습니다.”
한 개의 두루마리를 건네받은 카가미가 류신에게 물었다.
“받는 사람은?”
“한국의 지도자.”
“흠…….”
“오오가미의 뜻은 확고하십니다. 그저 경고성에 지나지 않는 행보가 아닌 걸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류신의 말에 카가미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1세기 전의 일을 재현하란 건가? 오오가미도 잔인하시군.”
카가미는 그리 말했지만 입가의 미소를 지울 수 없었다. 압도적인 강자로서 약자를 괴롭히는 건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이었다.
“후대를 잃으신 오오가미의 슬픔과 분노를 아신다면 장난은 안 하실 거라 믿습니다.”
“흥! 일의 경중도 모르는 애송이로 보는 것이냐?”
“중국에서도 움직인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빨리 움직여 주십시오.”
“흐흐. 중국 놈들도 가지고 노는 맛이 있지. 흐흐흐.”
류신이 무표정한 얼굴로 카가미를 보았지만 카가미는 이미 돌아선 뒤였다.
아무도 쓰지 않는 황거의 연무장엔 일백의 귀검조와 일백의 귀갑조, 오십의 귀술조가 대열을 갖추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의 맨 앞으로 나아간 카가미는 땅바닥을 찼고, 그의 발밑에서 붉은색의 털을 가진 거대한 괴조가 떠오르며 대기하던 이들을 등에 태웠다.
꺄아아아악!
거대한 괴조가 비명을 지르자 황거 곳곳에서 카가미를 지켜보던 요괴들이 후다닥 도망치기 시작했다.
땅바닥에서 몸을 드러낸 괴조가 그 커다란 날개를 퍼덕이자 작은 요괴들이 황거 곳곳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몇 차례의 날갯짓으로 벌써 밤하늘의 작은 별처럼 사라져 가는 카가미를 보며 류신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