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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토 시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노보루는 오늘도 조용한 밤 근무를 하며 차분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야토 시 자체가 유동성 인구가 많지 않은 도시였기에 편의점을 밤새 열어둘 필요도 없었지만, 온 세상에 혼자 남아 있는 듯한 적막감을 좋아하는 노보루는 아무도 없는 밤 편의점 여는 것을 좋아했다.
“음?”
편의점엔 형광등에서 울리는 팔라멘트 진동 소리와 냉장고 모터 소리 외에도 시끌거리는 소음들이 들려왔다.
읽던 책을 조심스레 내려놓은 노보루는 센서에 반응하는 자동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저 먼 곳에서 마치 축제라도 벌이는 듯 소음과 잔광이 흘러나왔다.
“아! 신들께서 노시는 모양이구나.”
하늘로 고개를 드니 야토 시 하늘엔 수십, 수백의 요괴들이 축제라도 벌이는 듯 음산한 분위기를 발하는 불빛들과 함께 줄지어 야토가미의 황거로 향하고 있었다.
“신들께서 잔치를 벌이시는구나!”
흡족하게 웃음을 지은 노보루는 다시금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읽던 책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평소와 달리 황거의 곳곳엔 환하게 불이 밝혀졌다.
건물과 바닥을 가리지 않고 나타난 요괴들은 서로를 때리거나 물어뜯으며 장난을 치고 놀았고, 음식과 술을 가져다주는 시비들을 놀리며 뛰어놀았다.
그리고 황거의 중심 황금으로 만들어진 대궁의 심처엔 평소와 달리 백색무문의 정의(淨衣)를 입은 오오가미 외에도 양옆으로 네 명의 인원들이 앉아있었다.
“한국의 한라검문과 해도문이 이번 일은 자신들과 상관없는 일이며 우리가 태백정가에 어떤 책임을 묻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문서를 보내왔습니다.”
오오가미의 오른편 가장 가까이 않은 창백한 얼굴의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두루마리를 펼친 후 손에서 놓자 두루마리는 천천히 날아가 오오가미의 눈앞에서 잠깐 멈춰 섰고, 이윽고 다른 다섯의 인물들 앞에 한 번씩 들른 다음 창백한 얼굴의 사내의 손으로 돌아왔다.
“감히 우리 야토가미의 후대를 죽여 놓고, 자신들은 책임이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들에게도 책임을 물어야지!”
유달리 코가 긴 사내가 분노를 일으키며 바닥을 주먹으로 치자, 그의 주먹에서 숯불을 뒤적인 듯 잔 불꽃들이 비산했다.
“책임을 무는 것을 떠나서 그들이 후대 오오가미를 어떻게 죽였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창백한 사내의 말에 검은 보자기를 쓰고 얼굴을 보이지 않는 이가 말했다.
“난, 솔직히 믿지 않아. 조선인들 그리 강하지 않아.”
“하지만 어디에도 중국이 개입되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중국, 그리 강하지 않아. 후대 오오가미 죽일 수 없어.”
그때 곧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여인이 손을 들며 말했다.
“중국에서 귀력을 제압할 만한 힘을 얻은 거 같아요. 중국에 보낸 첩자들 몇몇이 연락이 안 돼요.”
창백한 사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한라검문과 해도문은 뒤로 중국을 두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공문을 보낸 것은 그들의 뜻이라기보단 중국의 뜻으로 예상되니 이번 일에선 중국을 배제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만약 중국이 한 짓이라면! 한국을 이용해 우릴 칠 생각이라면?!”
“그들이 우릴 상대할 수 있었다면 진즉에 했을 겁니다. 이미 그럴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들어오는 정보에도 그렇고 그들의 움직임을 보면, 아직까지 우리를 대항할 만한 힘은 없다고 예상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지. 우리 가만히 있어?”
검은 보자기를 뒤집어쓴 자가 말했다.
“본래 동북아탈환계획은 백면궁을 이용하여 시작하려 했습니다. 때문에 귀능갑과 흑령갑이란 저희의 보물도 내려 주었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실패로 끝났지요.”
“내가 진즉에 얘기했지! 조센징들은 쓸모가 없으니 노예로나 쓰는 것이 적당하다고!”
“그래도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 상계의 힘이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으로 보입니다. 아주 실패한 작전은 아닙니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하지요?”
여인의 물음에 창백한 사내가 눈을 감은 오오가미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오오가미께선 다시금 동북아를 지배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흐흐흐. 드디어 다시 시작인가!”
코가 긴 사내가 즐거워하며 주먹을 꽉 쥐자 그의 주먹 사이로 또다시 잔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때 울 것 같은 여인이 끼어들며 말했다.
“잠깐만요. 중국의 힘이 작지 않다고 했는데. 이 일로 대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울보 계집! 싸움이 무서우면 집에 처박혀 있어라!”
코가 긴 사내의 말에 여인이 날카로운 표정을 지으며 쏘아붙였다.
“이 썩은 내 나는 새 새끼야! 과거 전쟁의 패배가 전선이 양분되면서 전력을 집중하지 못한 결과란 걸 모르는 것이냐!”
사내와 여인은 금방이라도 싸울 듯이 일어나려 하자 창백한 사내가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어차피 한국 상계는 예전부터 중국 상계를 경계해 왔고, 중국 상계에서도 한국 상계를 탐탁지 않게 생각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 이번 일의 책임을 물어 태백정가와 보타암을 비롯한 그와 관련된 세력들을 잡아들이는 건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또한 문제가 된다 해도 크게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동북아 전체로 나아가기 위해선 피할 수 없는 상대니까요.”
“준비할 게 많겠네요.”
여인은 다시 울상이 되어 말했다.
“그럼, 우리는 뭘 하지? 어차피 준비는 네가 다 할 거 아니냐?”
“우선은 본격적인 전쟁에 앞서 죄인들을 일벌백계해야겠지요?”
“좋아! 그건 내가 가겠다. 어떻게 데려오면 되지?”
“최시우만 빼놓고 모두 귀와 코를 잘라 오셔도 상관없습니다. 최시우는 필히 살려 오셔야 합니다. 놈의 기술이 우리 야토가미의 힘을 상대할 수 있다고 하니 연구가 필요합니다.”
“알았다. 손과 발을 자르는 건 상관없겠지?”
“숨만 붙여 오셔도 됩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나가려 할 때, 눈을 감고 가늘게 숨소리만 들려오던 오오가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예의 그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방심 말라.”
그렇게 이야기한 오오가미는 다시금 눈을 감고 입을 닫았다.
네 사람은 오오가미의 이런 모습에 살짝 놀라는 눈치였다.
* * *
세아가 알려 준 곳으로 향하던 곽동원과 전혜성은 어느 한적한 외곽지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한때 융성했던 유통업과 더불어 활기를 가지고 있던 이곳은 경기 하락과 더불어 줄어든 유통 유입량에 창고 임대를 하던 업체들이 줄도산을 신청했고, 가치 하락으로 채권을 회수하지 못한 은행들마저 폐기자산으로 평가한 뒤 새 주인을 찾고 있다고 했다.
세아가 접선 장소를 알려 준 뒤 그 일대를 조사한 후에 알게 된 정보였다.
‘한참 의문의 재력가가 일대의 폐업한 창고부지를 매입하고 있다고 했지.’
그 의문의 재력가가 누군지는 굳이 찾아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혜성이었다.
현 한국 상계는 미화관의 존재를 꽤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미화관의 실력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고, 기존 상계 세력에서 뻗어 나온 하위 세력도 아니었으며 정부와의 협력에 긍정적이라는 것이 그들을 불편하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 상계는 그런 불편한 것들에 대해 대응할 시간이 전혀 없었고, 언제 침략해 올지 알 수 없는 야토가미의 공격에 대비하거나, 대외적으로 활동을 중단하여 그들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게 행동하는 것에 신경 쓰기 바빴다.
‘정말 무서운 여자라니까.’
그리고 한세아는 그 틈을 타 태백정가, 보타암과의 협력 관계를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한편 공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아예 도시 하나를 짓나 보군.”
옆에서 운전하던 곽동원이 네 번째로 나오는 덤프트럭을 피해 한쪽 길가에 차를 세우고 중얼거렸다.
“이런 공격적인 세력 확장은 결국 부작용을 초래할 거예요. 지금은 잠자코 있는 한국 상계도 결국은 어떻게 해서든 미화관을 억압하려 할걸요?”
“그래도, 그 나이에 이 정도 능력을 가지게 된 것도 이런 밀어붙이는 실행력 덕분인지도 모르지. 어쨌든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우리한테 우호적이잖아?”
“이렇게 억지로 확장하다 결국 그 화살이 우리한테 돌아올까 봐 그러죠.”
“아마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거야. 어쨌든 미화관은 최시우가 키우고 있는 곳이니까.”
“그 고삐리가 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니.”
최시우.
전혜성은 그의 이름에서 그가 풍기는 거대한 힘의 무게가 실감 나지 않았다.
들리는 얘기에 따르면 그가 단독자로서 백면궁을 상대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가 도착할 때까지 살아 있었던 사람들 중에 추가로 죽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들었으니 그가 얼마나 압도적인 힘으로 백면궁을 상대했을지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보타암에서 직접 그의 신위를 본 자신도 이런데 다른 이들은 어떨까.
실제 자신들이 쓰는 힘 자체가 일반인의 상식에사 한참이나 벗어난 것임은 분명하다.
금강문이란 약소 문파의 제자인 전혜성도 건장한 20~30대 남자 열 명 정도는 가볍게 상대할 수 있다. 그만큼 상식을 벗어났지만 이 안에서도 그 힘의 한계란 항상 존재했다.
지금 시우는 그 힘의 한계라는 것은 한참이나 뛰어넘은 존재였다.
전혜성이 한참이나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자 곽동원이 슬쩍 흘러가는 투로 이야기했다.
“조심하자고. 한세아 씨의 말에 의하면 말은 통하는 사람이지만, 호불호가 강해서 찍히고 나선 되돌리는 경우는 없다고 하니까 말이야.”
“네.”
덤프트럭이 지나가고, 두 사람의 차는 다시 움직였다. 이윽고 대규모 건설현장이 양옆으로 나타났고, 그곳을 지나자 보초를 서고 있는 사람들과 큰 대문이 나타났다.
창고만 일색이고 정돈되지 않은 이곳에 보초까지 세워둘 필요가 무엇일까 생각하던 전혜성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공간의 모습에 감탄했다.
“세상에.”
대문을 지나자마자 눈앞에 보이던 산과 폐창고가 가득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새로운 건물과 정돈된 잔디밭이 넓게 나타났다.
지금까지 이어오던 덜컹거리는 콘크리트 도로는 사라지고 새로 깐 아스팔트 도로가 나타났고 주변은 완벽하게 조경으로 꾸며져 흡사 대학 캠퍼스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법이란 게 진짜 대단하군.”
곽동원은 혜성의 마음을 대변하듯 짧게 이야기했다.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자. 수십의 사람들이 전투용 특수복을 착용하고 곳곳에 퍼져 수련하고 있었다.
진검을 가지고 대련을 하는 무리, 적수공권으로 대련을 하는 무리 등등 그중에 혜성과 동원의 눈을 사로잡은 건 정령술을 수련하는 부류였다.
불타는 인간의 형상을 한 존재가 허공에 부유하며 손에서 불공와 불창을 뽑아내고 있었고, 한쪽에선 그것을 막기 위해 인어의 형상을 한 존재가 물로 만들어진 투명한 막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처음 보는 기이한 광경에 시선을 빼앗겨 버린 두 사람은 뒤에서 누가 다가오는지도 모른 채 한참이나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계의 분들에게도 신기한 광경인가 보군요.”
뒤에서 들리는 음성에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평상복 차림의 한세아가 두 사람을 보며 싱긋 웃고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본래 남의 수련은 보면 안 되는데, 너무 진기한 광경이라.”
곽동원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상계에선 자신의 수련 장면을 몰래 훔쳐본 이를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수련의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자신의 약점을 노출시키는 것이고 이는 곧 목숨을 노리는 것과 같은 뜻이었기에 무인들은 설사 다른 이의 수련 장면을 본다고 해도 눈을 피해 주는 것이 예의였다.
“들어가실까요? 시우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세아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웃으며 두 사람을 안내했다.
주변의 새로운 건물들이 높게 들어선 것과는 달리 그 건물들의 중심엔 예전에 별장으로 사용된 듯한 작은 건물이 존재했다.
실내도 새로 인테리어를 한 듯 깔끔하다는 것 외엔 특별할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세아도 특수복을 입은 사람들도 이 건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오랜만이네요.”
곽동원과 전혜성이 들어서자 시우가 혜성을 보며 아는 척을 했다.
“아, ……예.”
어색한 기류가 세 사람 사이를 감돌자 한세아가 끼어들었다.
“두 분께서 본래 아시는 사이셨습니까?”
“지난번에 나를 보호해주려 했던 분이야. 은인이지.”
“호호, 그랬나요?”
세아가 눈을 빛내며 묻자 혜성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보,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어떨까요?”
혜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시우가 물었다.
“필요한 이야기는 미화관주랑 다 끝낸 거로 아는데. 굳이 절 보자고 하신 이유는 뭐죠?”
“……시우……군 ……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곽동원이 호칭이 어색한지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시우는 그저 곽동원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곽동원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시우를 보며 결국 입을 열었다.
“시우 님이 한국 상계를 지배해 주셨으면 합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곽동원의 말에 전혜성이 충격받은 얼굴로 곽동원을 바라보았고, 좀 전부터 표정 변화 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세아도 놀란 표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