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
한종수와 장만재를 비롯한 두 문파의 무인들 수십이 두 사람을 둘러쌓자 놀란 세아와는 달리 시우의 음성은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일이지?”
“크흐흐, 이놈! 네놈은 나와 풀어야 할 회포가 더 있지 않느냐?”
한종수가 이빨 빠진 채로 괴상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렇게도 상대와 자신의 실력이 가늠이 되지 않는 것인가?”
“역시나 허풍이 센 놈이구나.”
시우는 장만재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도 저 멍청한 대머리와 같은 수준인 건가?”
“뭣이! 이놈이! 아직도 건방지게 주둥일 놀리느냐!”
한종수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장만재가 한종수를 말리며 말했다.
“후후, 그래도 똥오줌은 가릴 줄 아는가 보구나.”
“그건 아니야. 내 가족을 들먹인 저 대머리는 언젠가 쳐죽여야겠단 생각은 가지고 있지만 뒤에 서서 저 멍청한 대머리를 조종하는 당신까지 나선 게 궁금해서 말이야.”
“이런 씹어 먹을! 장문주! 더 이상 들을 것이 뭐가 있소!”
한종수가 당장이라도 뛰어들 듯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장만재는 한종수를 말리며 말했다.
“작은 격장지계일 뿐이오. 흥분을 가라앉히시오.”
장만재가 옳은 소리를 했지만 한종수는 어쩐지 시우의 말대로 자신이 장만재에게 휘둘리는 것 같아 미간을 찌푸렸다.
“네놈의 그 마법이란 것이 야토가미의 귀술을 상대로 꽤 효과적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그걸 넘겨준다면, 태백 정가와 보타암 대신 우리가 네놈을 보호해주마.”
“당신들에게 그 정도의 힘이 있었나? 내가 듣기론 백면궁의 일전만 없었어도 태백 정가와 보타암 앞에서 기도 못 폈을 거라고 들었는데?”
“감히 어떤 놈이!”
“…….”
장만재는 시우의 말에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놈 말이 틀리지 않다. 하지만 해방 이후 상계의 판도는 바뀐 지 이미 오래다.”
“실력의 차가 있는 데 뭐가 어떻게 바뀐다는 거지?”
“우리는 단순히 중국 상계와 교류하는 것이 아니다. 혈맹을 맺었다.”
“당신들이 당하면 중국이 나서준다는 말인가?”
“그래. 그렇기 때문에 태백 정가와 보타암을 비롯한 상계의 모든 세력들이 우리가 나서주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렇군.”
시우가 장만재의 이야기에 생각에 잠기자 장만재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
장만재의 이야기에 시우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푸후후훗. 나 참.”
장만재는 갑작스런 시우의 웃음에 왠지 모욕당한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웃음이 나오느냐?”
“어찌 웃음을 참을 수 있지? 개의 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호랑이가 개 밑으로 들어가는 법이 있던가?”
“갈!”
시우의 말에 한종수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소리를 빽 질렀다.
장만재의 심경 또한 한종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가 개란 말이냐?”
“말이 그렇단 이야기지…….”
시우가 말을 늘이자 세아가 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 주변에 둘러싸인 무인들만 해도 수십. 저들 각자가 풍기는 기운은 태백 정가의 일반 무인을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워야 했음을 세아는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언제나 그의 예상을 깨는 시우의 입에선 세아가 경악할 만한 말이 흘러나왔다.
“도의와 명예를 잃은 너희들은 어찌 개에 비교할까. 개새끼만도 못한 존재지.”
“!”
시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라검문과 해도문의 무인들의 몸에서 온몸을 찌르는 듯한 살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결국 벌주를 선택하는구나.”
“내 뭐라 하였소. 저놈은 말로 상대할 놈이 아니라 하지 않았소. 여봐라!”
한라검문의 문주가 소리 높여 외치자 무인들이 지체 없이 검을 뽑았다.
“저놈이 말은 해야 하니 손과 발을 잘라 데려오라!”
“넷!”
한라검문의 무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세아가 고양이 모양의 정령을 소환하였다.
[썬더 펠레스]
뇌전의 힘을 사방으로 흩뿌리는 고양이 정령이 나타나 세아의 어깨 위에 떠 올랐다. 정령은 세아의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듯 사나운 모습으로 무인들을 향해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꺄아아아오!
“시우 님, 미화관에 지원 요청을 하겠습니다.”
세아가 시우에게 바짝 붙으며 작게 이야기했다.
세아는 백면궁의 사태 이후로 야토가미가 한국 상계를 그냥 두지 않을 거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녀가 분석한 바론, 야토가미의 힘은 이미 지난 70년간 차오를 때로 차올랐고, 야토가미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일본 정부도 동북아시아의 전쟁을 바라고 있었다.
그저 명분이 필요했을 뿐. 야토가미의 침략은 필수 불가결한 일.
아직 상계에서의 힘이 미비했지만 불평 따윈 할 시간이 없었다.
그리하여 미화관의 모든 자원을 무력 증강에 쏟아붓는 한편 언제라도 적의 기습에 대비할 수 있는 비상대기 시스템을 만들어 두었다.
“아니, 다른 생각이 있어.”
하지만 세아의 그런 완벽한 준비에도 시우는 고개를 저었다.
“불편해도 조금만 참고 있어.”
시우는 그렇게 이야기 하며 한 손으로 덥석 세아의 허리를 감았다.
‘어멋!’
겉으로 보기엔 잘 구분할 수 없었던 시우의 단단한 팔 근육이 세아의 촉감으로 느껴지자 세아는 얼굴을 붉히며 자연스럽게 그에게 기댔다.
[블링크]
세아를 한 손으로 안은 시우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어, 어디 간 것이냐! 놈을 찾아라!”
시우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한종수와 무인들은 패닉에 빠지며 사방으로 시우의 흔적을 찾았다.
“……도망친 건가?”
마법에 이런 기술까지 있을 거라 예상 못 했던 장만재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을 때. 그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아무런 기척 없이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대경실색한 한종수와 장만재가 시우를 확인하고 뒤로 물러나려 했다.
“늦었어.”
시우는 손에선 이미 완성된 마법진을 발동시켰고, 동시에 한종수와 장만재, 시우와 세아는 그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 * *
국정원 구석에 자리한 ‘초자연현상 연구팀’의 팀장인 곽동원은 머리가 아픈 듯 양손으로 미간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장장 지난 몇 주 동안 낮과 밤을 구분하지 않고 잠을 줄여 백면궁 사건을 수습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팀장과 팀원밖에 없는 팀이었기 때문에 하나부터 열까지 외부의 손을 빌려야 했고, 아무리 통신기기가 발전하였어도 인간의 몸으로 움직여야 하는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무려 평균 56시간씩 연속으로 깨어 있으면서 일 처리를 해낸 것은 그가 내공을 지닌 무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겨우 사태를 수습하고 사람 모습으로 돌아오려 할 때 쯤 일본 CIRO(내각 정보 조사실)에서 공문이 날아왔다.
……이번 사태에 책임이 있는 최시우를 소환하고, 태백 정가와 보타암의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책임져야 할 것이며, 불 이행시……
대충 이런 내용의 공문은 백면궁과 야토가미의 피해에 대하여 철저하게 한국 상계의 책임을 묻고 있었다.
곽동원은 현실 도피를 하듯 이야기 했다.
“한글로 공문을 보낸 거 보니까, 얘네 들은 직원과 지원이 빵빵한가 보다?”
곽동원의 말에 전혜성이 작게 한숨 쉬며 이야기 했다.
“일본은 정부와 천황, 오오가미 이 세 개가 한 몸이나 다름없다고 하잖아요.”
“우리도 답신을 보낼 때 일본어로 보내면 좀 간지가 날까?”
곽동원이 한 번 더 현실 도피를 하며 이야기 하자 전혜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팀장님! 지금 그런 생각이나 하실 때에요?”
“그럼 뭐 어떡하냐? 우린 백면궁 사건을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버거운데. 얘네 들은 어떻게 처리해?”
언론 차단과 공권력의 개입을 막는 것은 기본이고, 보타암의 화재를 막기 위해 소방관들의 기억들을 지우는 것을 포함해. 시체처리까지.
백면궁의 사건을 덮는다고 온갖 일을 다 했다. 하지만 수습 막바지에 가선 부족한 수면으로 곽동원의 기억이 뜨문뜨문 끊겼고, 그 과정에서 곽동원은 몇 사람의 기억을 제거하지 않은 건 아닌지 확신이 잘 들지 않아 고민하고 있던 찰나였다.
그런 작은 고민으로도 그의 머리가 지끈 거렸는데. 일본이라니, 야토가미라니.
“일단 저희부터 바뀌어야 해요. 상계에 적극 관여하고, 요원들을 더 뽑아서 수습에 나서고, 안 그럼 두 번째 사건과 세 번째 사건에선 수습이 안 된다고요.”
“에이, 설마 또 이런 사건이 생기겠어. 백면궁이야, 원래 한국으로 드럽게 돌아오고 싶어 했으니까 그런 거고, 이미 다 끝난 마당에 전쟁을 벌일 것도 아닌데 일본이 나서겠어?”
한가한 곽동원의 이야기에 혜성이 세아에게 들은 이야기를 했다.
“……이번 전투에서 다음 대의 오오가미가 죽었답니다.”
“……뭐?”
한가하게 귀를 파던 곽동원의 눈이 귀신이라도 본 듯 한 표정이 되어 전혜성을 바라봤다.
“그 만쇄진 안에서 엄청난 전투가 일어났는데. 그때 다음 대의 오오가미가 도망가다가 죽었답니다.”
“한국 상계의 힘으로 그게 가능해?”
곽동원은 들으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과연 무인 중에 야토가미의 상급 무사를 상대할 수 있는 무인이라도 있었던가.
전혜성은 공문에 나와 있는 최시우의 이름을 가리키며 말했다.
“얘가 그 주인공이랍니다. 쓰는 힘은 그 유럽의 마법과 비슷하고 파괴력은…… 야토가미를 상회한다고.”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 되긴요? 얘들이 시키는 대로 안하면 야토가미가 한국에 들어오는 거죠!”
“뭣!”
곽동원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이건 그냥 경고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일본은 진심이라고요.”
“어, 어떡하지? 우린 둘 뿐이잖아.”
전혜성이 곽동원의 멱살을 잡으며 앞뒤로 마구 흔들었다.
“정.신.차.리.세.요!!!”
앞뒤로 한참이나 흔들리던 곽동원이 의자에 떨어지듯 앉자. 전혜성이 말을 이어나갔다.
“일단은 상계와 관계를 더욱 확장시키고 저희 부서 규모도 더 키워야 해요. 앞으로 벌어질 일은 전쟁이니까. 대 전쟁 수준의 준비를 해야 하고요.”
“하지만, 상계는 이미 몇십 년이나 정부와 관계를 차단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미화관이란 곳의 관주와 관계를 만들었어요. 그 분이 국정원 내의 상계 전담팀이 더욱 커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다고 했고요.”
“어떻게?”
“정·재계에 이미 엄청난 영향력이 있는 곳이더라고요.”
“그럼 난 뭘 해야 하지?”
“일단 보고부터 하셔야죠!”
곽동원이 후다닥 자리에 앉아 워드 프로그램을 켜고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 * *
시우의 품에 안겨 순식간에 한종수와 장만재의 뒤로 이동한 세아는 동시에 그의 손에서 그려지는 마법진에 눈을 빼앗긴 것도 잠시. 또다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였다.
그 공간은 시우와 세아, 그리고 한라검문과 해도문이 함께 있던 공간과 똑같았지만 한라검문과 해도문의 문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이상한 적막감이 공간을 맴돌던 곳이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진(陣)이라는 건가?’
만쇄진 안으로 들어선 시우는 곧장 한종수와 장만재의 협공에 대응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아 또한 그들의 싸움에 참전하려 했지만 그 틈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과 싸우는 시우의 모습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실력의 고하를 떠나 차원이 다르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시우의 모습은 여유 만만했던 반면 두 사람의 몰골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시우의 모습을 보며 세아는 과거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좋은 선택이었는지 감동하는 반면에 한종수와 장만재는 지금의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크아아악! 이 비겁한 새끼! 네놈이 사내대장부라면 정정당당하게 맞서라!”
한종수가 발악하듯 외치자, 시우의 손에선 주먹만 한 불꽃이 일렁이며 생겨났다.
[파이어 볼]
시우의 손에서 날아간 파이어 볼은 신법을 펼치며 도망치려는 한종수의 얼굴에 명중했고, 그의 얼굴은 또 한 번 뜨거운 열기에 감돌아야 했다.
“크아아악!”
한종수가 검까지 떨구며 자신의 얼굴을 마구 때리자 불꽃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장만재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시우를 쏘아보며 말했다.
“네놈 실력을 숨기고 있었구나.”
“숨겨? 네놈들이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것을 가지고 누굴 탓하는 거지?”
시우와 일전을 버리면서 장만재는 시우의 실력을 재평가 할 수밖에 없었다.
간간히 보이는 그의 마법과 움직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종합한 전투력.
시우는 자신과 한종수를 상대하면서 한 번도 전력을 다한 적이 없었다.
자신과 한종수는 이미 내력이 바닥나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없는 반면 시우는 조금도 지쳐 보이지 않았다.
“그래,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것은 뼈아프다. 하지만 우리를 죽이면 네놈과 태백 정가 또한 멀쩡하지 못할 것이다.”
“그 중국인 친구들 이야기 하는 것인가?”
“그래.”
“추하군. 끝까지 남의 도움 없인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인 건가? 당신들은?”
“뭐라 해도 좋다! 하지만 결국 힘의 논리만이 이 세계를 지배하는 법. 지금 우릴 풀어 준다면 더 이상은 문제 삼지 않겠다.”
장만재의 말에 시우가 혀를 찼다.
“별로 무섭지 않군. 그 힘이라는 거.”
시우의 완드가 검으로 형태 변화하자. 장만재가 더욱 다급하게 외쳤다.
“네놈은 이미 야토가미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중국마저도 적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냐?”
“중국마저 적으로 돌리면 한국 상계는 난장판이 되겠네?”
시우의 물음에 장만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중국의 티끌 같은 도움이라도 받으려면 더 이상의 문제는 일으키지 않는 것이 좋다.”
장만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우의 신영이 흐릿하게 흩어지며 사라졌다.
푸칵!
푸칵!
그리고 동시에 장만재와 한종수는 아랫배 부근이 불에 달군 인두로 지져진 듯 끔찍한 고통과 함께 단전이 부서지며 내공이 산산이 흩어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크아아아악!”
“……이런 개 같은…….”
자신들의 아랫배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시우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귓가에 시우의 차가운 음성이 울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 난장판이야. 너희들은 좋은 미끼가 되어줘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