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
-···그럼 전 다시 정가 사람들을 구하러 가겠습니다.
“진이 펼쳐져 있다 하지 않았느냐? 지금에 와서 가는 건 소용없는 짓이다. 본가로 돌아오거라!”
-···하지만 이렇게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소빈아! 소빈아!”
전화가 끊긴 정형진은 떨리는 손으로 다시 소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상대방의 전화가 끊겨 있다는 안내 음성만 들려올 뿐이었다.
“무슨 소리냐? 진이라니?”
정순지가 다급하게 물었다.
“···아무래도 함정에 빠진 것 같습니다. 정가의 사람들은 진에 갇혀 빠져나올 수 없었고, 백면궁은 괴이한 힘을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할머니께서, 본가에 정보를 알려 주라 하셨답니다. 이대로라면 본가마저 당할 거라고.”
“백면궁의 힘이 그렇게 강하단 말이냐?”
“아무래도 야토가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복귀를 장담하시지 못하셨다고 하니···.”
정순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이나 말없이 정순지를 바라보던 정형진이 결의에 찬 얼굴로 정순지에게 말했다.
“구하러 가야 겠습니다.”
“···무슨 소리냐! 너는 정가의 가주다!”
“제 자식들이 지금 그곳에 있습니다. 아버지!”
“멍청한 놈! 최악의 위기 속에서도 어머님께서 연락을 한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냐!”
“자식이 죽어가는 데 어찌 부모 된 자로서 기다리기만 한단 말입니까!”
보타암의 생존자의 전화를 받고 구하러 가는 인원에 우빈과 소빈이 속해 있던 것은 전적으로 남궁혜자의 실력을 믿어서였다.
한국 상계(上界)의 검후라 불리 우는 그녀라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우빈과 소빈을 지킬 수 있을 거라는 강한 믿음에서였다. 하지만 현 상황에선 우빈과 소빈은 커녕 남궁혜자의 생존마저 확신할 수 없었다.
무인이자 정가라는 커다란 세력의 가주였지만, 결국 그도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때, 조용히 듣고 있던 현민이 나서며 말했다.
“안 된다! 너마저 위험에 빠진다면 정가는 더욱 큰 위험에 처해질 것이다.”
정순지가 추상같이 이야기 했지만 현민은 흔들리지 않고 답했다.
“아직 생존자가 있을 지도 모르는 데 그저 기다리기만 한다면 그것 또한 정가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또한 우빈이와 소빈이는 제게도 소중한 조카들입니다.”
“······.”
“할머님께서 목숨을 걸고 정보를 전해주신 이상 정가는 최대한 방비를 해야 합니다. 전 최소한의 인원으로 멀리서 지켜 본 후 생존자만 수습해서 돌아오겠습니다.”
정순지는 결국 허락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이런 일이···.”
깊게 한 숨을 내쉬는 정순지는 예상과는 달리 무섭게 다가오는 거대한 절망의 그림자를 보며 그저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만이 있던 허공에서 까마귀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개 열린 병에서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튀어나온 까마귀들은 집단으로 움직이더니 이내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까악 까악 거리는 까마귀의 울음소리에 사람들은 그저 ‘갑자기 웬 까마귀여 재수 없게.’라고 말하며 하던 일을 할 뿐이었지만, 시우에 의해 소환된 패밀리어인 까마귀들은 사방을 스캔하며 에너지가 응집된 곳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량의 패밀리어를 흩뿌린 시우는 곧장 서천을 향해 속도를 올렸다.
마력을 끌어 올려 속도를 올리기 시작하자 투명화 마법을 건 그의 등 뒤로 검은 날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제멋대로 나타난 검은 날개에는 기괴한 입과 눈이 달려 비명을 질렀고, 시우는 귀찮다는 듯 어깨를 털었다.
“들어가 있어.”
괴인들을 상대하며 상당한 양의 마나를 퍼부었지만, 괴인들을 흡수한 다크 사이트는 괴인의 몸에서 흑마나를 뽑아내어 시우에게 돌려주어 대부분의 마나는 회복된 상태였다.
점점 성체에 가까워지는 다크 사이트는 차츰 욕구에 대한 지각이 강해지기 시작했고, 곧이어 대량의 피를 볼 거라는 시우의 예상을 읽어낸 다크 사이트는 기쁨의 비명을 질렀던 것.
이 다크 사이트는 모든 마법사들이 흑마법사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결정적 이유였다.
인간이 가진 마이너스적 감정을 흡수해 마나를 생성하고, 시술자의 마법을 증폭시키는 이 마법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악인을 흡수할수록 더더욱 강해진다는 것.
그렇게 흡수한 악인들을 자양분으로 지옥에 있어야 할 악마를 인간세계에 소환하곤 하였다.
지구에서야 다크 사이트를 키울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시우가 백면궁으로 인해 다크 사이트를 키우게 되어 귀찮은 일들이 많아 졌으니 그들에게 더욱 분노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너희들이 뿌린 씨다. 거둘 수 없다면 책임은 져야겠지.”
다크 사이트가 펼친 검은 날개를 회수해보려 했지만, 마력 공급 때문에 여의치 않자 시우는 투명 마법을 풀고 광범위한 인식 불능 마법을 펼쳤다.
시우의 제재가 풀리자 다크 사이트는 더 넓게 검은 날개를 펼쳤다. 그의 비행속도는 점점 올라가 그 주변으로 수증기 응결현상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흑포인의 검이 남궁혜자의 몸 깊숙이 파고들었다.
가까스로 흑포인의 검을 피한 남궁혜자는 뒤이어 들어오는 다른 흑포인들의 검을 동시에 처내며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이미 뒤에선 또 다른 공격을 준비하던 흑포인이 있었다.
펑!
불의의 기습으로 장을 얻어맞은 남궁혜자의 내부가 진탕이 되어 피가 끓어올랐지만, 남궁혜자는 필사적으로 올라오는 핏물을 집어 삼키고 그녀를 지켜보며 방심한 흑포인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다.
“크으윽”
검기에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던 단단한 몸이었지만, 남궁혜자의 십성의 내공이 담긴 검강의 날카로움에는 결국 당해내지 못했다.
검을 비틀어 꺼내면서 흑포인의 심장을 완전히 조각내자. 드디어 쓰러지지 않을 것 같았던 흑포인이 쓰러졌다.
그녀 주위로 쓰러진 흑포인들의 사체는 이걸로 네 구째.
합공을 이어가던 흑포인들의 눈에 살기가 더더욱 어른 거렸다.
“죽여라!”
뒤에 선 흑포인이 지친기색이 가득한 남궁혜자를 향해 달려들며 외쳤다.
검을 휘두르던 남궁혜자는 흑포인의 검을 흘려 냄과 동시에 이화접목의 수법으로 그의 몸을 당겨 앞선 흑포인들을 향해 던졌다.
검기를 줄기줄기 뿜으며 남궁혜자에게 달려들던 흑포인들은 잠시 당황하다가도 검을 회수하기는커녕 흑포인의 몸을 이용해 초식을 이어나갔다.
파파팍!
“크흑”
이화접목의 수법으로 아군에게 공격을 당한 흑포인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곤 다시 일어났다. 그들 사이의 검기는 그들의 신체에 상처를 주지 못했다.
뒤로 물러서던 남궁혜자는 소백신장을 흑포인과 바닥에 마구 잡이로 쏘아 냈다.
흙먼지와 함께 거대한 흙거죽이 일어나면서 찰나간의 시야를 가렸고, 남궁혜자는 태백신보를 펼쳐 미끄러지듯 일행의 곁으로 빠져나갔다.
“하아, 하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남궁혜자는 최대한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궁주를 비롯한 백면궁의 대부분 무인들은 남궁혜자가 끝에 몰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만 포기하시구려. 가는 길 고통 없이 보내드릴 테니.”
“살려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잘 죽여주겠다는 데. 무얼 포기하란 말인가.”
“헛된 저항은 서로를 고통스럽게 할 뿐이오.”
태백 정가의 정예였던 태백 삼십 육검의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남은 인원들도 중상을 입은 체 겨우 검만 쥐고 있는 상태였고, 보타암의 무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부상자를 보호하던 무인들은 백면궁의 수십 개의 검에 온 몸이 꿰뚫려 죽었고, 부상자들은 저항한번 해보지 못하고 고혼이 되었다.
“최소한 네놈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 할 수는 있겠지.”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이오.”
그때, 백면궁의 적포 무인이 어깨에 시체 같은 인영 하나를 들쳐 매고 장내에 들어섰다.
인영을 바닥에 내던진 적포 무인이 말했다.
“다른 두 명은 추적 중입니다.”
태백 정가의 사람들과 백면궁의 사람들의 시선이 널브러진 인영에게 모였다.
바닥에 널브러진 인영은 단전 부근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입가에 핏물을 쏟은 체 생기 없이 죽어가는 모습이었다.
“우, 우빈아!”
남궁혜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남궁혜자는 곧장 우빈에게 다가가려 태백신보를 펼쳤지만, 흑포인 셋의 합공에 다시 뒤로 물러 설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찌 인간이 이리도 악독할 수 있단 말이냐! 저 아이는 이제 겨우 스무 살도 되지 않았건만!”
“검을 든 이상 무인에게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겠소. 저 아이도 그저 우리 앞길을 막는 장애물일 뿐이오.”
“···이익.”
검을 쥔 그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달리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흑포인 넷을 감당하기가 어려웠고, 다른 이들은 흑포인은커녕 적포의 괴인들을 상대하기도 힘들었다. 사랑하는 증손자가 고통 속에 죽어 가고 있지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100여 년 전 백면궁의 배신으로 인해 느꼈던 끝없는 무력감을 다시금 체감하며 그 무력감과 분노에 기혈이 뒤틀릴 것 같았다.
“하, 하, 할머니···.”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지 우빈이 남궁혜자를 향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뻗었다.
“우빈아! 정신 차리거라.”
“조, 조금만···.”
적포 괴인은 우빈의 움직임이 귀찮다는 듯 뻗어나가는 그의 손을 짓밟아 뭉개버렸다.
우드득.
우빈은 끔직한 고통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만 벌리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뱉을 뿐이었다.
“이 썩을 놈들! 크흑··· 우엑.”
결국 남궁혜자의 분노가 극에 달아 기혈이 뒤틀리며 내부가 진탕되어 버렸다. 그녀는 입으로 큼지막한 핏덩이들을 내뱉으며 바닥에 무릎 꿇었다.
한국 상계(上界)의 거목이라 불리던 검후(劍后) 남궁혜자가 그렇게 쓰러지자. 남아 있던 보타암의 생존자와 태백 정가의 인물들의 눈에도 절망이 어렸다.
“···정리해라. 곧장 태백 정가로 간다.”
박거산의 명령에 수십 명의 백포인들이 남은 인물들의 목숨을 끊기 위해 다가가기 시작할 때.
쩡!
하늘에 금이 가며 괴이한 소리가 전장에 울렸다.
쩡!
쩡!
콰즈즈.
곧 이어 하늘에는 거대한 유리창이 있었던 것처럼 사방에 금이 갔고, 끝을 모르고 이어지던 금은 종국에 깨지는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그 안에선 검은 날개를 펼친 인영이 나타났다.
[거인의 손][오버 더 아머]
[윈드 커터][온 더 파이어]
[프리즌 노바][커싱 오브 포이즌]
[다크 자벨린][어더라이즈 아이스]
검은 인영이 바닥에 내려옴과 동시에 허공엔 엄청난 양의 마법들이 생성되었다.
한데 모여 태백정가를 끝장내려던 백포인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크기의 아머를 착용한 거인의 손이 내려 쳤다.
쾅! 쾅! 쾅! 쾅!
“끄아아악!”
“컥!”
“윽!”
압착 프레스에 눌린 것처럼 순식간에 사람의 형체를 잃고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린 백포인들이 속출했다.
그들을 피해 몸을 날렸던 이들은 뒤이어 날아드는 불길을 품은 윈드 커터에 몸이 잘리는 것과 잘린 상처가 타들어가며 끔직한 고통을 야기하는 것을 느껴야 했다.
“크아아악!”
“불, 불! 누가 꺼줘!”
“물 가져와! 물!”
그런 백포인들의 바램이 닿아서 였을까? 뒤이어 냉기를 가득 품은 눈덩이 같은 것이 상대적으로 천천히 떨어졌다.
뜨거운 열기를 피해 눈덩이에 다가가던 백포인들은 눈덩이가 맹렬히 회전하고 보고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뒤이어 그들의 불안감이 상상으로 완성되기도 전에 맹렬한 회전을 하던 눈덩이 속에선 주먹만 한 송곳 모양의 얼음덩어리들이 불결한 녹색의 수증기를 풍기며 쏘아지기 시작했다.
“크어억!”
“누, 눈!”
“끄아아악!”
얼음 덩어리에 상처 입은 백포인들은 곧이어 자신들의 상처가 딱딱하게 굳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경을 타고 들어오는 강력한 독의 기운이 그들의 몸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마비시키고, 멈춰 있는 그들의 머리 위로 검은 창이 내리 꽂히며 그들의 생명을 빼앗았다.
그렇게 바닥에 내려선 시우의 주위론 태백 정가의 생존자 대신 잔혹하게 죽은 수십의 백포인의 시체만 가득했다.
< 47 > 끝
ⓒ 진(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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