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
“하아, 하아, 하아.”
남궁혜자는 조금이라도 더 산소를 흡입하기 위해 거친 숨을 내쉬었다.
100년이 넘는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유일한 증표인 흰 머리카락이 산발적으로 휘날려 있었다.
온 몸엔 적포인들의 피와 살붙이 들이 달아 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써도 써도 부족하지 않았던 내력은 이제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빌어먹을···.”
자식의 자식이 자식을 낳고 그 자식들이 성장해가면서 품위를 지키고자 하지 않았던 욕지기가 절로 나왔다.
태백정가의 정예중의 정예만을 모아 꾸린 태백 삼십 육검의 태반은 이미 목숨을 잃었고, 보타암에서 도망쳐 왔던 생존자들도 대부분 불귀의 객이 되어 버렸다.
보타암이 당하는 것을 알았을 때도, 상대의 힘이 이토록 강력할 것이란 예상은 하지 못했다.
삼백에 가까운 백면궁의 무인들을 상대함에도 죽음이라는 긴장감 같은 건 느끼지 못했던 그녀였지만, 지금보다 더 죽음이 가깝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타핫!”
그녀의 검에서 검기가 쏟아져 나가며 접근을 막았다.
몸이 비대하게 커진 적포인들은 어떻게든 검세를 피하고자 몸을 날렸고, 그 사이를 흑포인들이 달려들며 검기를 막았다.
날카로운 남궁혜자의 검기에 흑포인들 또한 대부분의 검기를 놓쳐 온 몸으로 검기를 받았지만, 그들의 옷가지만 뜯겨져 나갈 뿐 그들 중 상처를 입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대체 몸뚱이에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이 사태의 원인은 대부분 저 흑포인들 때문이었다. 수백에 달하는 백포인들을 막아내던 태백 삼십 육검과 태백정가의 정예들은 온 몸을 부풀리며 달려드는 적포인들을 상대로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남궁혜자와 그의 직계 후손들이 전장에 뛰어들면서 전세는 다시 태백정가의 것이 되었지만, 궁주인 박거산과 가장 가까이 서 있던 흑포인들이 태백정가의 정예들을 상대하면서 전세는 역전 되었다.
날카로운 칼날은커녕 강력한 검기의 공격에도 생체기 하나 나지 않는 그들의 몸은 태백정가의 무인들에게 끔찍한 공포로 다가오기 시작했고, 그들의 손에 순식간의 수십에 달하는 무인이 고혼이 되고서야 심각한 사태를 직감한 남궁혜자가 흑포인들을 막아섰다.
남궁혜자는 심상치 않은 흑포인들의 능력에 시간을 끌지 않기 위해 강대한 내공이 필요한 강기를 끌어 올렸다.
무려 1미터나 솟아 오른 푸른색의 강기가 흑포인의 검을 지나쳐 목을 쳐낸 순간. 남궁혜자는 경악 할 수밖에 없었다.
쾅!
검강에 의해 목이 잘려 나갔어야 할 흑포인은 심각하지만 부상을 입었지만, 죽지 않았다.
“···이럴 수가···.”
남궁혜자는 벌어진 상처를 부여잡고 일어나는 흑포인을 보며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더구나 강기에 의해 벌어졌던 상처가 조금씩 수복되고 있는 모습까지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 다른 흑포인들이 남궁혜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남궁혜자의 손과 발이 묶인 후부턴 일방적 학살이 자행되었다.
“이 따위 짓을 하고도 너희가 무인이라 할 수 있느냐!”
남궁혜자의 이야기에도 백면궁의 궁주 박거산은 미미한 표정변화 조차 없었다.
“결국 강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법. 역사는 우리의 승리만을 기억할 것이오.”
“우리가 사라진다고, 다른 이들이 너희를 인정 할 것 같으냐!”
“과거 우리의 실수는 후환이 될 만한 것들을 인정이라는 이름으로 남겨 두었다는 것이었소. 이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일은 없소.”
박거산은 야토가미를 보며 자신들이 가야할 길을 정했다.
오래 전 야토가미는 일본 상계(上界) 안에서의 작은 세력에 불과했다. 공력(功力)과 귀력(鬼力)을 사용하는 그들의 힘은 공력(功力)만을 인정해주는 상계(上界)에서도 이단에 속했고 그 때문에 공적(公敵)으로 취부 되어 척살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야토가미는 그런 상계(上界)의 인식에도 불구, 사람들이 백안시 하는 그 힘을 포기하지 않고 키워 결국엔 상계의 모든 세력을 척살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일본의 상계(上界)는 야토가미로. 야토가미는 일본의 상계(上界)를 상징하는 말이 되어 버렸다.
박거산은 한국의 상계(上界)도 백면궁 하나로 상징되길 바라고 있었다.
“상계(上界)의 모든 무인을 죽이겠다는 것이냐!”
“나는 광인이 아니오.”
“······.”
“다만, 한국 상계(上界)엔 백면궁의 이름 외엔 필요 없다는 것뿐이지.”
박거산의 이야기는 결국 한국 상계(上界)에 피바람을 몰고 오겠다는 말이었다. 그저 이야기만 들었다면 현실성 없다며 비웃었을 남궁혜자였지만, 그들의 실력을 본 남궁혜자는 그 말을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망할 땡중아. 무슨 방법이 없겠느냐?
흑포인들의 공격에 손이 점점 엉키고 있는 남궁혜자가 한쪽에 누워있던 혜강을 향해 이야기 했다.
-···저들이 펼친 진은 저들이 해체 할 때까지 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강대한 기를 한순간 폭발시켜서 진을 때리면 순간적으로 틈이 생기더군요.
-어느 정도의 파괴력이 필요한 것이냐?
-금수인을 십이 성의 힘으로 펼쳤었지요.
-제길··· 그 정도로 때렸는데. 진이 파괴가 되지 않았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함정을 파기 위해 저흴 놓아 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대로 있다간 죽는다. 금수인에 십이 성에 달하는 파괴력이라면 이곳에 있는 자들 중 진에 틈을 만드는 것이 가능한 자는 자신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빠지는 순간 몰살이었다. 확률은 작더라도 운에 맡겨 보는 수밖에 없었다.
-수빈, 우빈, 현미는 들어라.
남궁혜자가 전음을 보내자 세 사람이 순간적으로 남궁혜자를 보았다.
-세 사람은 이곳 진을 나가 정가에 연락을 해라.
-할머니 그럴 순 없습니다.
현미의 다급한 음성에 남궁혜자가 일갈을 내질렀다.
-멍청한 것! 여기서 다 같이 죽자는 이야기냐? 본가가 백면궁에 대해서 대비하지 못한다면 본가 또한 우리와 똑같은 꼴이 될 뿐이다.
검을 어지럽게 놀리는 현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떻게 하면 진을 나갈 수 있습니까?
푹.
“끄억!”
수빈이 검으로 백포인 하나의 목을 꿰뚫으며 차분하게 물었다.
-세 사람이 동시에 진의 경계선을 때려라. 신법을 펼칠 내공만 빼고 모두 쏟아 부어야 할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이 빌어먹을 진은 꿈쩍도 하지 않을 테니.
-연락을 하고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아니, 돌아오지 말거라. 아마 이곳에 남은 자들은 모두 죽을 것이 분명하니.
-어찌 그런 말씀을.
-더 이상 지체 할 시간이 없다. 내가 시선을 끌면 곧장 움직이거라!
남궁혜자는 그 말을 끝으로 사방으로 검강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내공 소모가 극심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흑포인들이 움찔 거리며 뒤로 물러서기 바빴다.
“그런 단단한 몸을 가지고도 사내다운 모습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구나.”
흑포인 넷이 뒤로 물러난 사이 남궁혜자는 절정에 다다른 태백신보를 펼쳤다.
그녀의 신영이 나타났다 사라 졌다를 반복하며 순식간에 궁주와 그저 지켜보고만 있던 야토가미 일행들에게 다다랐다.
“그렇게 몸에 자신이 있다면 이것도 받아 보거라. 태백망망(太白莽莽)!”
남궁혜자를 중심으로 강력한 강기의 파도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이 있던 적포인들은 그 거대한 몸체가 우습도록 아래에서 튀어 나온 강기가 그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냈고, 그 강기의 파도는 연쇄적으로 밖으로 퍼져나가며 파도타듯 백면궁의 무인들을 찢어놓았다
“크아아악!”
“컥!”
“끄아악!”
“사, 살려!”
“크어어억!”
순식간에 수십 명의 무인이 강기의 파도에 고혼이 되자, 백면궁 무인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뭐하느냐! 어서 오지 않고!”
우빈은 그 틈을 타 백면궁의 무인에게서 몸을 빼내 현미와 수빈을 전력으로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현미, 수빈, 우빈 세 사람이 동시에 같은 속도로 무리의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120보 앞이다. 내 신호와 함께 동시에 내력을 쏟아내라.”
“네.”
“네!”
남궁혜자의 강기의 파도가 한차례 휩쓸고 지나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백면궁의 무인들이 우빈 일행을 쫓기 시작했다.
“저기 도망자가 있다!”
“쫓아라!”
야토가미에게 받은 만쇄진은 포획에 더욱 특화되어 있는 강력한 진이었지만, 보타암에서의 도망자를 겪었던 백면궁의 무인들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다 왔다. 셋에 쏟아 내거라.”
만쇄진의 경계선을 감각적으로 가늠한 현미가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우빈과 수빈도 그녀의 신호에 맞춰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뒤로는 백면궁의 무인들이 필사적으로 쫓아오고 있었고, 기회는 단 한번 뿐이었다. 만약 실패한다면 모든 내공을 쏟아 부은 그들은 죽음을 면치 못할 터였다.
“하나···, 둘, 셋!”
현미의 검이 가장 먼저 진의 경계선을 내리 찔렀다.
“태백파천(太白擺川)”
“태백쟁춘(太白爭春)!”
“태백지천(太白之穿)!”
쉬이익!
퍼펑!
펑펑펑펑펑!
맨 처음 현미의 검을 집어 삼켰던 진은 뒤이어진 우빈의 검에 의해 작은 폭발음을 내었고, 마지막 소빈의 내력이 가득 든 검을 맞는 순간 굉음을 내며 폭발음과 함께 공간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뛰어라!”
현미를 쫓아 우빈과 소빈이 동시에 진 밖을 나섰다.
진의 안쪽과 바깥쪽은 서로간의 다름이 없었지만, 진을 나온 순간 세 사람은 세상의 소음을 들음으로서 현실에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흩어진다!”
현미는 말과 함께 가장 먼저 중앙으로 뛰기 시작했고, 소빈은 우측, 혼자 남았던 우빈만이 정신을 퍼뜩 차리고 좌측으로 뛰기 시작했다.
‘정가로 전화를···’
정가로 전화를 하려던 우빈은 우뚝 손가락을 멈췄다.
과연 정가로 전화를 하는 것이 모든 이들을 구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인가 하는 물음에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때, 우빈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시우라면···.’
시우가 현 상황을 타개 할 수 있다는 근거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우빈의 본능이 전화를 본가가 아닌 시우에게 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X발 모르겠다. 누나 고모 두 사람이 본가에 전화 하겠지!’
생각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우빈은 곧장 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짧은 통화 연결음 후에 통화가 연결되고, 우빈은 곧장 외쳤다.
“시우야!”
핸드폰 반대편에선 특유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우빈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도와줘! 이러다 우리 다 죽을 지도 몰라!”
-너 어디야?
“여기가 어디냐면···.”
우빈이 바로 위치를 이야기 하려 할 때. 그의 단전에 인두가 꿰뚫은 듯한 극심한 고통이 전해졌다.
“크아아악!”
극성의 태백신보를 펼치던 우빈이 대굴대굴 구르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쥐새끼 같은 놈.”
-야! 정우빈! 정우빈!
우드득.
우빈을 부르는 시우의 음성이 흘러나오던 핸드폰이 백면궁 무인의 발에 으스러져 버렸고, 단전이 부서지며 기혈이 뒤틀린 우빈은 쉼 없이 각혈을 내뱉었다.
우빈의 눈빛에선 조금씩 생기가 꺼져가는 모습이 보였다.
“흡!”
진 안으로 들어선 전혜성은 진 내부에 가득 찬 살기에 절로 숨이 막혀왔다.
‘이런 정도의 살기라니.’
진은 마치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만 만들어진 것처럼 조금의 자비 없이 옥좨는 살기를 뿌리고 있었다.
걷기는커녕 숨쉬기조차 어려웠던 혜성은 단전의 기를 끌어 올린 후에야 조금 편안하게 거동을 할 수 있었다.
혜성은 허리춤에 매여진 접이식 검을 펼쳤다.
국정원에 소속되면서 요원들이 받는 총 대신에 받은 것이었다.
촤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펼쳐지자 앞서 걷던 학생이 뒤를 돌아봤다.
“학생. 위험하니까. 이리와. 나랑 붙어 있어.”
시우는 혜성의 말을 무시하곤 곧장 보타암 내부로 걸었다.
쉬익!
그때,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두 개의 강대한 검기가 두 사람을 향해 날아들었다.
‘거, 검기!!’
바짝 긴장한 혜성과는 반대로 시우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검기를 향해 가볍게 완드를 휘둘렀고, 검기는 시우에게 짓쳐들기 직전 허공에 생겨난 흑색의 배리어와 부딪치며 산산이 부서졌다.
펑!
그와는 다르게 혜성은 온 내공을 끌어 올려 검기를 막아냈고, 겨우 검기를 흘려보냈을 땐 원래 있던 자리에서 열 걸음이나 물러난 뒤였다.
“켈켈켈켈. 죽을 자리를 제 발로 찾아오는 놈도 다 있구나.”
“큭큭크. 저기 여자랑 같이 온 걸 보니. 뇌물을 받치고 살길을 찾으러 왔는지도 모르지.”
대웅전 지붕 위에서 들리는 기괴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거대한 몸체에 붉은 피부를 가진 끔찍한 모습의 괴인들이 자신을 보고 웃고 있었다.
“괴, 괴물···.”
혜성의 말에도 두 괴인은 조소를 금치 않았다.
“클클클. 그래 괴물을 본 소감이 어떠하냐? 가슴이 쿵쿵 뛰느냐?”
“큭큭. 손에 든 검을 보니 무공을 익혔나 보구나. 이거 데리고 놀기에 시시하지 않겠구나. 큭큭큭.”
징그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온 몸을 훑는 괴인들의 시선에 혜성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켈켈켈! 수줍음이 많나 보구나! 걱정 말거라. 이 몸으로 운우지정을 나누고 쾌락의 끝을 보고 나면 다시는 수줍음을 느끼지 않을 테니 말이다 켈켈켈!”
[거인의 손][오버 더 아머]
웃음을 멈추고 있지 않은 두 괴인의 머리 위로 두 개의 마법진이 합성된 복합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갑작스런 기의 움직임에 깜짝 놀란 괴인이 고개를 위로 쳐들었지만, 이미 완성된 진 안에선 금속의 갑주를 착용한 거인의 주먹이 괴인을 향해 내려 꽂혀지고 있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괴인이 있던 자리에 내리 꽂혀진 거인의 주먹은 대웅전 일부를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린 후에야 사라졌다.
“이 X새끼들이 미성년자를 앞에 두고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혜성은 엄청난 파괴력에 깜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학생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느새 나풀거리는 검은 색의 롱코트를 입고 한 손엔 마법진과 완드를 들고 대웅전을 향해 거침없이 걷고 있었다.
< 45 > 끝
ⓒ 진(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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