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
전화를 받은 남궁혜자는 태백정가의 모여든 모든 정예를 이끌고 충청남도의 서천군의 외딴 마을로 향했다.
인구 감소로 유령마을이 되어버려 멀쩡한 도로 하나 없어 태백정가의 인원들은 차와 버스에서 내려 직접 걸어서 마을까지 가야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엔 단 몇 십 명의 상계의 무인들이 패잔병처럼 방문객의 작은 움직임에도 긴장을 했다.
몇 년 째 관리가 되지 않아. 부서지고 낡은 마을 회관에 들어선 남궁혜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너, 너 이 땡중···.”
회관의 안쪽엔 오른쪽 소매가 횡하니 비어버린 채 지친 기색으로 살짝 미소 짓는 혜강이 있었다.
“이, 이게 어, 어찌 된 것이냐? 그 오른손은 어디 갔다 팔아먹은 것이야!”
“허허, 남궁보살께선 그 걸걸한 입담이 여전하십니다.”
“이 망할 땡중. 다 늙어 이리 몸을 막 굴리면 네 수발드는 아이들이 얼마나 불편하겠냐.”
“···그럴 아이들이라도 남아 있다면 다행이겠군요.”
“······.”
남궁혜자는 얼마 남지 않은 보타암의 승려들을 보며 의료진을 찾았다. 혜강의 잘린 팔에선 아직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의료팀! 의료팀은 없느냐?”
“그, 그게 급하게 오느라 응급 키트만을 챙겨 와서···.”
“일단 지혈부터 해라. 이렇게 피를 흘리다간 곧 미라라도 될 것 같구나.”
안색마저 파리해져 가는 혜강을 보며 남궁혜자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일어서려 하자 혜강이 남궁혜자를 옷깃을 잡았다.
“그보단 이곳을 먼저 빠져나가야 합니다.”
“무슨 소리! 이 꼴로 어딜 가려고! 우선 치료부터 받아야지.”
“보살님. 저희가 정가로 가야함에도 불구하고 보살님께 전화를 드린 건 저희 힘으론 도저히 그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아무리 그들이 강하다 해도 보타암에 모인 인원이 몇인데.”
남궁혜자의 말에 혜강은 수심 가득한 얼굴로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모습을 버렸습니다. 이렇게 도망칠 수 있었던 것도 희생을··· 감수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인간의 모습을 버리다니?”
“그들은···. 그들은···.”
혜강은 무언가 말을 이어 가려다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혜강! 혜강! 정신차려라!”
남궁혜자는 혜강의 단전에 손을 대고 진기를 불어 넣었다. 남궁혜자는 혜강의 몸에 진기를 불어 넣는 순간 그의 몸이 위태할 정도로 안 좋은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진기를 받은 혜강은 겨우 눈을 떠 입술을 달착 거렸다.
“어, 어서, 도, 도망을.”
“알았다. 알았으니. 더 이상 말하지 말거라. 뭐하느냐! 얼른 응급처치를 하지 않고!”
태백정가의 인원들이 재빨리 다가와 대충 붕대로 동여맨 혜강의 잘린 팔 부분을 응급처치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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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빈아! 이리 오너라!”
회관에서 혜강을 부축해서 나온 남궁혜자는 밖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우빈을 불렀다.
우빈은 심각한 혜강의 상태를 보곤 재빠르게 달려가 그를 등에 업었다.
보타암에서 도망쳐온 사람들은 대부분 부상자가 많았지만, 태백 정가에선 의료팀이 함께 오지 않아 대부분 응급처치만 한 상태였다.
당장에 항생제가 필요한 환자가 많았음에도 부상자들이나 태백정가의 사람들이나 모두들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모두들 차가 있는 곳으로 가고 넌 얼른 정가에 연락해서 호위 인원을 보내라고 해라.”
“네.”
남궁혜자의 이야기에 형진이 고개를 끄덕여 핸드폰을 몇 번이나 눌렀지만 통화는 연결 되지 않았다.
그때, 현미가 핸드폰을 흔들며 얘기했다.
“할머니. 여기가 워낙 시골이라 그런지 전화가 안 통하는 거 같아요. 전파가 통하는 곳까지 나가서 연락해야 할 거 같아요.”
현미의 이야기에 보타암의 승려들과 무인들이 잔뜩 긴장된 표정이 되었다.
“해, 핸드폰이 안 터진단 말입니까?”
수박문의 갈상훈이 떨리는 음성을 다잡지 못하고 물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정가에 연락 하려고 했는데···.”
갈상훈이 우빈의 등에 업힌 혜강을 보며 눈으로 두려움을 표했다.
“스, 스님.”
“···어, 어서.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할···.”
그때, 차로 이어지는 거친 길을 따라 백면궁의 무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처럼 하나하나 내려와 태백정가와 보타암의 무인들을 막아섰다.
수백에 달하는 엄청난 인원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리자 태백정가와 보타암의 무인들은 검을 꺼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백면궁의 인원들이 가득한 곳에서 정 가운데가 갈라지며 궁주 박거산과 야토가미의 청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 몸이 말하지 않았소. 조센징들은 조센징을 불러들인다고.”
청년보다 청년 뒤로 서 있는 음양사들의 모습을 본 남궁혜자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너 어디야?”
시우가 우빈에게 그렇게 물었지만, 통화는 곧 끊어지고 말았다.
통화를 끊은 시우의 표정이 심각하자 세아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시우님.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
시우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눈을 감았다 뜨며 세아를 보고 말했다.
“백면궁이 한국에 들어왔나?”
“일본을 떠날 준비는 한다고는 알고 있었습니다만 아직 한국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해 보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배를 이용할 거라고 했지? 혹시 비행기를 이용해서 들어올 수도 있나?”
시우의 말에 세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미 양국 어떤 곳에도 시민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 많은 인원이 다 한국에 들어오려면 복잡한 절차를 필히 거쳐야 했을 겁니다. 혹시 그들이 한국에 들어온 건가요?”
“아마도···.”
“바로 대원들을 준비시키겠습니다.”
세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화관의 인원들은 모두 시우 앞에 정렬해 있는 상태였다.
대원들을 정렬시킨 김준상이 말했다.
“저희는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시우는 그런 그들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알아. 하지만 아직 그들을 상대하기엔 부족해.”
“······.”
김준상은 자신의 수준과 상계의 수준 차이를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다. 검법 몇 개와 정령을 부린다고 그들을 상대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시우님.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세아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가서 구해야지. 자칭 내 절친이라는 사람인데. 그리고 거기 가면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있을 거야.”
“전 뭘 해야 할까요?”
“사람들이 어디 있는 지 좀 알아봐줘. 난 일단 보타암으로 먼저 가볼 테니까.”
“알겠습니다.”
시우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워프 포탈을 생성해 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가 안보를 책임지는 국가정보원이 위치한 이곳 본부엔 ‘초자연현상연구팀’이라는 정체불명의 팀이 존재했다.
이 정체불명의 팀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얽혀 있었는데, 수준미달의 인물들이 권력자의 빽만을 믿고 국정원에 들어오려 할 때 걸러내는 팀이라는 이야기와 더 이상 국정원에 효용가치가 없지만 내보낼 수 없는 인물들을 가둬놓기 위한 곳이라는 이야기들이 있었고, 어찌 되었든 이 초자연현상연구팀이란 곳은 정식 요원들과 공무원들이 가장 가고 싶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팀장과 팀원 1명이 전부인 단출한 사무실엔 유례없는 사건으로 눈코 뜰 새 없는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럼 저더러 어쩌라고요! 태백정가에선 내부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이야기만 했는데요. 일단 언론부터 막아 주세요. 어떻게 하냐뇨? 그건 팀장님이 알아서 하셔야죠! 그리고 상계에 주술관련 능력을 가진 사람들 모두 모아주세요! 하아! 왜냐뇨! 사람들 기억 조작해야 할 거 아녜요!”
초자연현상연구팀의 유일한 요원인 전혜성은 그렇게 빽하니 소리를 지르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금강문의 14대 전승자인 그녀는 갑작스레 터진 한·일 상계(上界)의 격돌에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었다.
한국 상계(上界)는 정부와 교류 하지 않았다.
다른 외국의 상계(上界)들도 대부분 교류하지 않는 다고 하지만 한국 상계(上界)는 유독 더 심했다.
해방 이후 야토가미와 백면궁을 비롯한 친일 앞잡이 들을 모두 몰아낸 뒤 한동안은 괜찮은 관계를 이어왔지만, 군부독제정권이 들어서면서 상계(上界)의 힘을 병기화 하려는 것을 거절한 뒤, 독제정권은 상계(上界)를 핍박하기 시작했고, 그 일을 계기로 상계(上界)와 정부는 완전한 단교를 선언하였다.
그랬기에 정부에선 상계(上界)와 관련한 변변한 정부 부처 없이 명목상으로만 유지되는 팀이 하나 있을 뿐이었고, 그 명목상 유지되던 요원이 이번엔 그 큰일을 모조리 혼자 떠맡아야만 했다.
“하아, 대체 그 괴물들 싸움에 끼어들어 어쩌라는 거냐고.”
우선 사건 현장으로 출동하라는 상관의 말에 그녀는 한숨부터 내 쉬었다.
금강문의 전승자였던 그녀였지만, 한국과 일본의 무인들의 격돌의 장에 뛰어든다는 것은 폭탄을 들고 불에 뛰어드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한 뒤 일찌감치 공무원 준비를 했다. 금강문의 무공이 상계(上界)내에서 그다지 뛰어난 수준도 아니었고, 매일 도만 닦는다고 집에 돈 벌어다 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무공만 하는 바보는 되지 말아야 겠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요즘 시대의 공무원 시험이란 쉽지 않았던 바. 번번이 낙방하는 것에 좌절하고 있을 때 쯤. 국정원의 한 사내가 자신을 찾아왔다.
대뜸 자신을 상계(上界)의 무인이라 밝힌 그는 ‘공무원이 되고 싶지 않냐?’는 이상한 말로 자신을 꼬드겼고, 더 이상 공부하지 않고 국정원의 공무원이 될 수 있다는 말에 덜컥 승낙해 버렸다.
실상 국정원 내에서도 자신의 존재는 비밀에 가까운 것이라는 것과 상계의 특별한 일이 없었기에 일과 대부분이 인터넷 서핑을 하는 것이, 다라는 상관의 말은 평범한 사회생활을 꿈꿨던 혜성에겐 좌절감을 안겨 주었지만, 어렵게 된 국정원 공무원의 자리를 박차고 나갈 만큼 혜성은 당찬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지루하지만 월급은 계속 나오는 일상을 반복하던 중 준비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큰 사건이 터져버린 것이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야.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아침 일찍 보타암이 있는 전북으로 내려온 혜성은 통제된 입구를 지나쳐 보타암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불은 껐지만, 화제 원인을 조사해야할 인원들과 민간인들은 모두 철수 시킨 상태였다.
혹시 모를 상계(上界)의 무인들이 증거를 인멸한다고 무고한 살상을 할 수도 있었고, 처음 겪는 상계의 격돌에 어떤 대비치 못한 사건들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보타암을 둘러보기 위해 등산로를 오르던 혜성의 시야에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학생이 나타났다.
“어? 학생. 여기 지금 출입 금지야. 들어오면 안 돼.”
혜성이 이야기 하자 고개를 돌린 학생의 이마엔 꽤 큰 흉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
학생은 혜성을 무감하게 돌아본 후 계속 등산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학생! 여기서 더 올라가면 위험하···.”
자신의 말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혜성이 학생의 어깨를 잡으려 보법을 펼친 순간 학생의 몸이 사라지며 5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나타났다.
학생은 다름 아닌 시우였다. 혜성이 보법을 쓰는 것을 보고 시우가 차갑게 물었다.
“상계의 인간인가?”
“너, 넌 정체가 뭐야?”
“암흑회 소속인가?”
시우의 양 손에서 검은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무인 특유의 기운을 품지 않았기에 평범한 고등학생이라 생각했던 시우에게서 엄청난 위압감이 쏟아져 나오자 실전 경험이 전무한 혜성은 덜컥 겁이 났다.
“무, 무슨 소리야. 나, 난 국정원··· 아, 아니 금강문 소속이야.”
“금강문? 한국 상계 쪽 사람이란 말인가?”
“그, 그렇지.”
혜성이 그렇게 이야기 하자 시우는 불꽃을 꺼트리고 몸을 돌려 보타암을 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멍하니 있던 혜성은 그런 시우를 재빨리 뒤쫓았다.
“저, 저기 잠깐만···.”
“······.”
“혹시 여기 올라가려는 거면, 위험해.”
시우는 잠시 혜성을 보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단순히 올라가려는 게 아녜요. 암흑회 놈들을 쓸어버리려고 가는 겁니다.”
혜성이 적이 아니란 것을 알자 시우의 말투가 바뀌었다.
“쓰, 쓸어버린다고? 너 혼자?”
시우는 대답이 없었다.
“너, 어디 소속이니? 아까 그 손의 불은 뭐고?”
혜성을 무시하던 시우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혜성을 돌아보며 말했다.
“계속 따라 올 거예요?”
“무슨 소리야! 너야말로 이곳에 들어오면 안 돼! 지금 민간인 통제 구역이라고.”
시우는 혜성의 말을 무시하고, 볼펜을 완드로 바꾸어 공간을 향해 휘둘렀다.
멀쩡하던 등산로였던 곳이 공간이 찢어지며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공간 안에는 전소된 보타암의 모습이 보였다.
“웬만하면 돌아가세요. 여기부턴 위험해요.”
“설마 진이 펼쳐져 있던 거였어?”
진의 정체도 알지 못했던 혜성이 놀라는 사이 시우가 보타암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 학생! 거기 들어가면 안돼! 어엇! 들어가 버렸네···.”
혜성도 잠시 고민을 하는 듯 하다 공무원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생각으로 공간 안으로 발을 디뎠다.
< 44 > 끝
ⓒ 진(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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