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
“다시! 태백압살(太白壓殺)에 이은 태백지천(太白之穿)의 움직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단방에 상대를 제압하듯 거침없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더냐!”
남궁혜자의 호통에도 소빈과 우빈은 거친 숨을 몰아쉬느라 정신이 없었다.
“상대는 암흑회다! 너희들이 지난 세월 배워온 것이 호신(護身)에 지나지 않는 다해도 그들의 검날이 너희를 쉬이 상대해주리라 믿는 것이냐! 다시 자세를 잡아라!”
남궁혜자의 말에 소빈은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 볼 세도 없이 자세를 잡았지만, 우빈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일어날 줄 몰랐다.
“자, 잠시 만요. 그, 금방 일어나겠습니다.”
우빈은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일어날 줄 몰랐다.
소빈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괜찮은 척 서 있을 뿐 미미하게 힘이 풀린 다리와 검을 쥔 손이 떨리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휴, 내가 너무 몰아치는 것인가.’
그때, 소빈과 우빈을 구원해줄 목소리가 들렸다.
“크, 큰일 났습니다.”
가주인 정형진이 태백신보를 펼치며 연무장 위로 뛰어 올랐다.
“무슨 일이냐?”
“보, 보타암이. 당한 거 같습니다.”
“뭐야!”
[900년 전통의 사찰 보타암이 오늘 새벽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현재 사상자는 파악 중이나 불길이 인근 산으로 번져 제대로 된 진화를 할 수 없는···.]
쾅!
거기까지 듣던 남궁혜자가 TV를 향해 장을 날려 버렸고, 죄 없는 TV는 스파크 소리를 내며 벽에서 떨어져 부서져 버렸다.
“이 빌어먹을 땡중···.”
욕지기를 내뱉으면서도 남궁혜자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100년 전에도 상계(上界)의 세 세력은 비등한 실력을 가졌다.
오랜 세월 이어온 경쟁구도는 상대의 무공과 실력에 대해 파악할 수 있게 해 주었고, 그것이 세 세력의 발전을 이끄는 동력이었다.
해방 이 후 70년의 세월 동안 정가와 보타암 또한 다르지 않았다.
배신의 쓴 맛을 봤던 두 세력은 그 어느 때보다 내실을 키우는 데 집중하였고, 지난 세월 이루지 못했던 강대함을 이루었다.
그랬기에 보타암도 태백정가도 자신만만했던 것이다.
“연락할 시간도 없었던 것이냐?”
“아마 마지막 연락 이후에 기습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 새벽에 연락을 받지 않아 사람을 보낸 후에 지금 확인한 겁니다.”
“후··· 모두 당한 것이라고 보느냐?”
“그건··· 아니라고 믿고 싶습니다. 혜강 스님도 계시고···.”
“민간에게 알려진 것 같은데. 정부에선 연락이 있었느냐?”
“그것 때문에 국정원에서 계속 연락이 왔지만 지금은 무시 하고 있습니다.”
“그래 일단 일이 해결 된 뒤에 처리하기로 하자. 일단 그들이 어디에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온다면 저희 정가로 올 거라 생각됩니다만 일전에 암흑회의 인물들이 펼쳤던 그 진을 생각하면 어떤 대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일단 사람들을 모아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는 준비를 해 놓는 것이 어떨까요?”
“그래. 정가에 머무는 사람들과 우릴 돕기로 했던 이들에게 모두 연락을 하도록 해라. 아참. 시우 그 아이에게도.”
남궁혜자가 잊지 않으려는 듯 이야기 하자 한쪽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현미가 나섰다.
“그 아이는 데려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손 하나가 아쉬운 마당에 현미의 이야기를 듣는 남궁혜자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졌다.
“아직 어린 아이고, 저희 정가의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 아이를 이런 위험한 전투에 데려갔다 큰일이라도 당한다면 그 아이의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지 않습니까. 더구나 상계(上界)의 존재에 대해서도 모르시는 분들에게 과연 어떤 이야기로 설명 할 수 있을지.”
“흠···.”
구구절절 맞는 말을 하는 현미였지만, 남궁혜자는 과연 시우가 암흑회와의 싸움에서 속절없이 당할 정도로 실력이 없는 사람인가에 대해선 생각해 보았다. 정가의 현판을 박살내고 태백검진을 파쇄 했다. 암흑회의 암살자 열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한 그의 실력을 과연 걱정해야 할 정도일까 생각해 본 것이다.
“더구나··· 그 아이.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그 음습한 어둠하며, 잔인한 손속까지. 그 아일 상대했던 정가의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보기에도 끔직한 마법들을 쓴다는데···. 그 때문에 저희까지 오해 받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정가에 온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냐?”
“네. 물론,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겠지요. 하지만 보타암이 무너진 상황에서 한국 상계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세력인 우리가 그런 자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것을 알면 앞에서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뒤에서 분명 저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도 남을 겁니다.”
“······.”
남궁혜자는 현미의 말에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이번 전투는 그저 암흑회를 몰아내고 보타암을 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상계는 재편되고 일본의 야토가미를 대적할 세력은 우리 밖에 없다고 믿게 될 건데. 흠 잡히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통탄할만한 일이었지만 차후에 야토가미까지 견제해야할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니었다.
“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남궁혜자는 판단을 정순지에게 돌렸다.
“현미의 말대로 아직 어린 아이에게 부담을 주는 것은 옳은 행동이 아닙니다. 현미의 의견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알겠다. 정가의 무인과 상계(上界)의 무인들 중 정예만을 모아 구호대를 꾸려라. 나머지는 정가를 지킨다.”
“알겠습니다.”
회의를 하던 사람들이 모두 나가려 할 때. 현미가 우빈에게 말했다.
“혹여 정가 내부의 일을 외부인에게 알려주는 짓을 하지 말거라.”
“네?”
고모인 현미가 자신에게 이야기 했지만 우빈은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일이 있는 동안은 그 정체 모를 아이와 연락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네.”
우빈이 아는 시우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지만, 서슬 퍼런 고모의 경고에 우빈은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시우가 공간을 열고 나타나자 한세아를 비롯한 미화관의 사람들 눈이 커졌다.
“시우님. 이런 능력도 있으셨습니까?”
“놀랄 거 없어. 마법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겐 별거 아닌 일이니까.”
“참으로 보면 볼수록 놀랍습니다.”
“그보단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
“다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세아가 가리킨 곳에는 별장 잔디밭 전체에 그려진 거대한 마법진 위에서 특이한 모양의 수정구에 하나씩 손을 두고 괴로워하는 사내들이 있었다.
각자의 수정구 위에는 불과 물 등, 각 오행에 해당하는 정령이 소환되어 자신들의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멀었어.”
“그래도 다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관주는 어느 정도나 되었지?”
시우의 물음에 세아는 얕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부터 시작된 전류가 눈에 보일만큼 선명하게 그려지기 시작했고, 그 전류들이 모여 고양이 형상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고양이 형상의 정령은 세아의 주위를 둥둥 떠다니며 애교를 부렸고 세아는 그럴 때마다 아이처럼 정령과 장난을 쳤다.
그 모습을 보고 시우가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관주의 실력향상은 생각보다 너무 빠르네.”
“시우님께서 이곳을 개방하신 후부터 소녀. 언제나 이곳에서 수련했습니다.”
시우와 세아가 서 잇는 곳은 세아가 준비해준 시우의 별장 이였다.
본래 별장으로 쓰던 곳을 시우가 개조하여 마법연구와 수련을 할 수 있을 만한 곳으로 바꾸었다.
시우는 이곳을 이(異) 세계에 있을 때처럼 높고 웅장한 크기의 상아탑을 만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별장의 지하를 파고 들어갔고 별장의 커다란 잔디밭엔 거대한 마법진을 새겨 연구소에서 쓸 마나들을 공급했다.
그리고 이 마법진을 미화관 사람들에게 개방했다.
마법진은 통상 자연적인 상태의 20배에 달하는 농축된 마나를 끌어 당겼기 때문에 마법진 위에서의 마나와 관련된 수련은 더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세아는 이 사실을 알고, 시우가 지내는 별장 주위의 모든 땅과 몇 없는 민가 건물들을 사들여 미화관의 대원들을 수련시키기 위한 장소로 바꿔나가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너무 빨라. 진짜 내가 얘기한 그 무식한 방법을 쓴 건 아니겠지?”
정령의 기운과 똑같은 것을 느끼는 것. 나무나 물의 기운이라면 문제없겠지만 불이나 전기 등의 기운에선 활용할 수 없는 수련 방법을 했냐는 시우의 말에 세아는 대답 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진짜 대단하군.”
“제가 약하다면 아무도 보호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관주는 그 정도가 심해.”
시우의 칭찬에 세아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시우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뭐지?”
“이렇게 정령의 힘만으로 미화관이 상계(上界)의 한 자리를 차지 할 수 있을 까요?”
“힘들지. 정령계가 없는 곳에서의 정령이란 애완동물 수준의 지각밖에 없으니까. 진짜 제대로 무공을 익힌 자들을 만난다면 오행의 특성을 가진 정령도 아무 소용없을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단순히 정령만 부리는 것이 아니라. 정령도 부리는 사람이 돼야지.”
“어떻게 말입니까?”
시우는 대답 대신 예의 그 주머니에서 뭔 갈 꺼내는 포즈로 이번에도 꽤 두툼한 책을 꺼내었다.
“천요검법? 이건··· 백면궁의 검법 아닌가요? 이걸 어떻게···.”
놀라는 세아의 표정에도 시우는 대답 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태백 정가 내부엔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다.
보타암이 완전히 소실되고, 아직 생존자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은 시점에서 암흑회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은 그들이 그동안 술안주로 씹어 올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더구나 풍문으로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암흑회가 새로운 힘을 얻었고, 그 힘에 자신이 없었다면 한국 땅을 밟지 않았을 거란 이야기까지 나돌자.
정의를 위해서 암흑회와 맞서고자 했던 이들의 다짐들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갔는지 소재 파악도 되지 않은 것이냐?”
“그게 최소한 그들이 가진 핸드폰이라도 추적이 되면 좋으련만···.”
정형진이 끝말을 잇지 못했다.
현대인의 필수품인 핸드폰을 상계(上界)인이라고 가지지 못할 리 없다.
정형진은 보타암의 일이 터지자마자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의 모든 핸드폰을 추적했지만, 그들의 마지막 위치는 보타암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암흑회의 소행이리라 생각하는 것은 형진만의 비약이 아니었다.
상계의 많은 주문과 주술 등이 대부분 현대의 물건들을 무력화 하고 사람들을 속이는 데 많이 쓰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거운 분위기만 계속 흘러가고 있는 그때. 남궁혜자의 핸드폰이 울렸다.
사람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남궁혜자를 바라보았다.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남궁혜자의 핸드폰이 울릴 일은 가족 간의 일 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족들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있는 이때에 남궁혜자의 전화가 울린다는 것은 다른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누구냐?”
핸드폰 넘어의 목소리를 들은 남궁혜자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이 땡중! 왜 이제....! 대체 어디 있느냐!”
< 42 > 끝
ⓒ 진(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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