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
수 십 만원의 계산서가 나왔지만 철호는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계산했다.
식사 내내 시우에게 미안했던 지혜는 시우와 시간을 보내려 했지만, 정연이 지혜의 계획을 무산 시켰다.
“홍쥐! 넌 오늘 나랑 얘기 좀 해! 연하의 남자를 어떻게 꼬셨는지 샅샅이 불어야 할 것이야!”
“싫어. 나도 시우랑 시간 보내야지.”
“이것이! 너 어린애랑 대체 무슨 시간을 보내려고? 너 감옥 가고 싶어?”
“무슨 소리야. 시우는 성적 자기 결정권이 있는···.”
지혜는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를 내뱉다가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둘이 놀아. 시우랑 나는 남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데려다 줄게.”
철호까지 그렇게 이야기 하자. 정연은 더더욱 적극적으로 지혜를 이끌었고, 지혜는 끌려가면서 내내 시우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가자. 내가 데려다 줄게.”
“괜찮습니다. 아직 시간도 늦지 않았고.”
“아니. 너한테 할 말 있어서 그래. 잠깐 같이 가자.”
철호가 발렛 요원에게 표와 5만 원짜리를 건네자 발렛 요원이 90도로 인사하며 황송하다는 듯 뛰어 갔다.
잠시 뒤 묵직한 배기음과 함께 붉은색의 페라리 488 스파이더가 몸을 들어냈다.
“타.”
철호는 무표정한 시우의 얼굴을 보며 득의양양한 미소와 함께 차에 올랐다.
철호는 차를 몰아 근처의 한 건물 일층에 있는 커피숍으로 향했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철호가 내리자 주차장을 관리하던 발렛 요원이 깍듯하게 인사했다.
“들어와, 내가 취미 삼아 하는 커피숍인데. 커피 맛이 괜찮아.”
“중요한 얘기 아니면 그냥 하시죠. 슬슬 집에 가서 밥도 해야 하는데.”
시우의 말에 철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혜에 관한 얘기니까. 듣고 싶을 거야.”
철호는 시우의 대답을 듣지 않고 커피숍으로 들어가 버렸다.
철호의 카페는 여타 다른 카페처럼 주문하고 음료를 직접 가져가는 시스템이었지만 철호와 시우가 앉은 자리엔 종업원이 직접 음료를 배달해 주었다.
커피가 나오자 철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기 월세가 얼마인지 알아?”
“알아야 하나요?”
“뭐, 고삐리라 아직 그런 거에 관심이 없을 지도 모르겠네.”
철호의 입에서 고삐리란 단어가 나오자 시우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1300만원, 관리비 까지 하면 월 1800만 원 정도 나와. 근데 커피 팔아선 얼마나 버는 줄 아니?”
“······.”
“한 달에 400도 못 찍어.”
“장사수완이 별론가 보네요.”
“하하하. 그렇게 볼 수도 있지. 근데 내가 굳이 카페를 차린 건 내 입맛에 맞는 커피가 없어서야. 난 밖에선 커피도 잘 안 마셔.”
“돈 많은 부모님이 입맛 까다로운 자식새끼 때문에 돈을 많이 허비하시네요.”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지. 근데 이 건물이 내꺼 거든.”
시우는 팔짱을 끼며 계속 얘기해 보라는 듯 기다렸다.
“지혜. 얼마나 좋아하지?”
“그걸 말해야 하나요?”
“나도 홍지혜 좋아해. 사실 너랑 사귀기 전부터 좋아했지.”
시우는 아무 말이 없었다. 철호는 그런 시우의 모습을 보며 입가에 절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말해서 네가 나보다 나은 게 뭐가 있냐? 키도 그리 안 크고. 외모도 별론 거 같고. 부모님은 뭘 하시니?”
“···동네에서 치킨 가게.”
“우리 집안은 대대로 법조인 집안이야. 정연이도 지혜도 들어가고 싶어 하는 로펌이 우리가 운영하는 로펌이지.”
철호의 이야기에 시우는 웃음을 터트렸다.
“부모자랑은 유치원 때 끝나는 걸로 알았는데.”
시우의 웃음에 철호가 정색하며 말했다.
“웃어? 웃음이 나와?”
“계속 얘기해 봐요. 무슨 소릴 하나 한번 들어 보죠.”
철호는 무거운 분위기를 이어갔다.
“여자는 자기 수준에 맞는 남자를 만나야 돼. 너처럼 보잘 것 없고 사랑 하나만 물고 늘어지는 양아치랑 만나는 순간 지혜도 똑같은 수준이 되 버리는 거지.”
“···.”
“너보다 더 능력 있는 내가 지혜를 책임지는 게 맞아. 이건 지혜와 너를 위해 하는 소리야. 솔직하게 말해서 앞길 창창한 지혜한테 지금 너는 방해될 거란 생각은 안 드니? 너 내 년 부턴 고3이라며?”
“근데?”
시우의 말이 짧아지자 철호는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토를 달지 않았다. 시우의 마지막 발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수험 공부에만 집중하기도 벅찰 텐데. 지혜를 케어 할 수 있겠어?”
철호는 식어가는 커피를 한잔 마시며 말했다.
“그만 헤어져라. 그게 너와 지혜 모두를 위한 옳은 행동이야.”
철호의 이야기에 시우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내 얘기는 끝. 이제 그만 가봐. 가서 공부 해야지.”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섰다.
철호는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마셨다.
일부러 시우를 무시하고, 그를 자신의 건물에 위치한 카페로 데려와 재력을 보여준 건 유치한 짓이었다. 하지만 유치한 짓이기에 효과는 더 크다.
오늘 일을 기점으로 두 사람이 헤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시우는 매일 지혜와 자신의 사이를 신경 쓸 수밖에 없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남자.
평생 죽어라 노력해도 쌓을 수 없는 탑을 가진 남자가 자신의 여자를 노리고 있는데. 신경 쓰이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을까.
그렇게 지혜와 시우는 서로 지쳐갈 것이다. 그리고 매일 볼 수밖에 없는 자신은 그 사이를 파고들기만 하면 되었다.
“후후. 지혜가 좋아하는 음식이 뭐였더라?”
그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차량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영문 모를 굉음에 당황해 하는 사이 쾅하는 충격음과 함께 유리창이 박살나는 소리가 울렸다.
철호는 불안한 마음에 카페 주차장 쪽을 바라보고 아연실색 하였다.
시우가 커다란 슬레지해머로 페라리 488을 마구 부수고 있었다.
“저, 저, 저런 미친 새끼!”
철호가 급하게 카페 밖을 뛰쳐나갔다.
주차 요원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시우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사, 사장님!”
“이런 미친! 뭐하고 있어! 저 새끼 당장 막아!”
“네, 넵!”
주차 요원 둘이 시우에게 달라붙어 그를 말리려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시우의 가벼운 몸짓으로 두 사람이 몇 걸음이나 뒤로 밀려나며 자빠졌다.
그리고 시우는 계속해서 페라리 488를 떼려 부쉈다. 더구나 회생이 불가능 하게끔 하려는 것이 목적인지 차량문, 범퍼, 트렁크 등등 가리지 않고 골고루 망치지를 하고 있었다.
“야이 미친 새끼야! 너 미쳤어! 이게 얼마짜린 줄이나 알아?!”
철호의 외침에 시우가 움직임을 멈추고 철호를 바라봤다.
“왜 당신 수준에서도 꽤 비싼 찬가 보지?”
“이 개새끼가! 니네 일가족이 평생 벌어도 못사는 차야 알아?”
“크흐흐, 사람의 수준 운운하던 놈이 차 하나에 벌벌 떠는 꼬락서니라니.”
“이런 정신병자 새끼.”
“갑질 하는 놈. 진상 떠는 놈. 잘난 척 하는 놈들 공통점이 뭔지 알아? 너처럼 사실은 쥐뿔도 없다는 거야. 돈 많다고 잘난 척을 해대고 결국 이런 차 하나에 벌벌 떠는 쫌생원 밖에 안 되거든.”
시우가 슬레지 해머로 유리창을 때렸다.
“······미친놈.”
“부모 돈으로 잘난 척이나 하는 놈이 수준 운운하기는. 인간의 가치라는 건 그 사람 본연의 가치로 판단되는 거야. 너처럼 껍데기를 쓰고 있는 놈들은 이렇게 차 하나만 박살내도 금방 그 바닥이 드러나지.”
시우가 철호의 옆으로 다가가며 강력한 피어를 쏟아 냈다.
“차는 새 걸로 사서 보내줄게. 근데 앞으로 지혜 옆에는 얼씬 거리지 마라. 다음번에 박살나는 건 차가 아니라 너고. 네 인생은 새로 못사니까.”
시우가 그렇게 이야기 하며 슬레지 해머를 어깨에 메고 걸어갔고, 철호는 바지를 오줌으로 적시며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시우야!”
집에 다다를 때 쯤. 시우를 부르는 청량한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후다닥 뛰어와 시우에게 풀썩 안겼다.
시우는 샴푸 향기와 풍만한 지혜의 가슴을 느끼며 놀란 듯 물었다.
“여긴 언제 왔어?”
“정연이랑 헤어지자마자 왔어. 보고 싶어서. 헤헤.”
지혜가 시우를 만끽하려는 듯 얼굴을 부비며 계속 파고들었고, 시우는 익숙한 듯 지혜를 꼭 안아 주었다.
“맞아 시험 결과 나왔다며? 몇 등 했어?”
“5등.”
“에~ 잘했네. 근데 진짜 내가 과외 안 해줘도 서울대 올 수 있겠어?”
“전교 5등이면 꽤 잘한 거 아냐?”
“엑! 전교 5등? 진짜?”
지혜는 정말 보면 볼수록 놀라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아참. 그리고 그 철호 선배라는 사람이랑 놀지마.”
“왜?”
“나보고 너랑 안 맞는다고 헤어지라고 하더라.”
“진짜? 선배가?”
“어. 때려 주려다가 참았어.”
“나쁜 선배네.”
“근데 별로 기분 안 나빠하는 거 같다?”
“아냐. 그런 거.”
“잠깐 떨어져봐. 별로 기분 안 나뻐 하는 거 같은데?”
짐짓 심각한 목소리의 시우의 행동에 지혜는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시우에게 더 달라붙었다.
산중 암자 보타암.
전북 최대 규모의 사찰이자. 900년의 긴 역사를 지닌 이곳은 일반 사찰과는 별 차이 없이 관광객들이나 불자들이 기도를 드리러 오기도 했고, 불교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지만, 야간에는 원칙적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 되었다.
바로 상계의 가장 큰 세력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힘을 숨겨야 하는 보타암은 일반인들의 숙식이나 체험 행사 같은 것들은 허락할 순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 일로 해가 진 보타암의 내부에는 승려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이 활기차게 이곳저곳을 오가며 서로 얘기를 나누거나 음식을 나눠먹고 있었다.
대웅전 앞에 선 노승이 그 모습을 보며 하얀 수염을 쓰러 내렸다.
“근심이 많으시지요?”
암흑회의 소식을 듣고 수박문에서 달려와 준 갈상훈의 물음에 혜강은 허허로운 웃음으로 답하였다.
“이리 많은 분들께서 본 암자를 돕겠다. 나섰는데. 뭐가 걱정되겠나.”
“뭐 남의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다들 암흑회에 대한 원한이 깊은 자들이니 자신의 일이라 생각할 겁니다.”
“후. 원한과 복수는 생각 자체가 업인 것을.”
“후후. 그래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그렇게 생겨나는 것이지요.”
혜강은 아주 오래 전의 일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암흑회의 움직임은 어떻다고 하던가?”
“일본 내부에 보낸 정보원들 말로는 그들이 기거하던 귀신산에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하더군요.”
“벌써 일본을 떠났단 말인가?”
“아마도 오는 중이겠지요.”
“각 항구와 공항에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항구와 공항을 비롯해 밀매업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루트까지 모두 감시 하고 있습니다. 소규모의 인원도 아니고, 한국에 들어온다면 금방 대비 할 수 있을 겁니다.”
“자네 생각에도 한 곳에 모였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수박문은 과거 보타암의 속가 제자가 차린 속가무문이었다. 속가제자라 해도 관계를 지속해서 이어왔고, 보타암이 대외적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모두 처리 해 주었기에 사실상 보타암의 대외 지부나 마찬 가지었다.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그렇다고 보타암을 버려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 70년 전 사찰을 찾으면서 다시는 빼앗기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었지.”
“더구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보타암이 무너진다면 상계(上界)에도 큰 충격입니다. 양대 기둥 중 하나라도 무너진다는 것은 과거의 악몽을 재현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
“지금도 상계(上界)의 크고 작은 세력과 사람들이 보타암에 모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걱정은 마십시오.”
“단순히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네. 또 다시 많은 피를 흘리게 될까봐. 나는 그것이 너무도 걱정 인 게야.”
“아이고! 스님. 이제 그만 하시고 차나 한 잔 내 주십시오. 계속 걱정만 하시면 세치 생기십니다.”
말도 안되는 갈상훈의 말에 혜강이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이 사람. 알았네. 들어가세.”
수송기 내부엔 비행기 엔진음 외엔 적막감이 감돌았다.
궁주인 박거산은 몇 번이나 입을 열고 싶었다.
일본의 군용 수송기가 한국의 영토를 날아도 되는지? 이렇게 날다가 거대한 표적지가 되어 복수를 해보기도 전에 불꽃으로 변해 버리는 것은 아닌지. 입국 절차와 착륙할 비행지는 있는지.
하지만 야토가미의 젊은 애송이에게 자존심을 굽힐 수 없었던 그는 그저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그렇게 1시간이 안 되는 짧은 비행 와중에 젊은 애송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거산에게 말했다.
“내릴 준비 하시오.”
“뭐? 벌써?”
“한국과 일본의 거리가 얼마라고 생각하는 거요?”
“어디 공항으로 내리는 거요?”
“공항이라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요? 한국에서 우리가 자국 영공을 날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 같소?”
“우리가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닌데. 여기서 뛰어 내리기라도 하라는 말이오?”
“그렇소.”
“미친.”
박거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행기 뒤편의 헤치가 내려가며 빠르게 지나가는 구름 등이 보였다.
“우리들은 낙하 훈련을 받은 사람 따윈 없소.”
“낙하 훈련 따윈 필요 없소. 나머지는 우리가 다 책임 질 거니까.”
“미친 소리 작작 하시오. 하늘에서 인간이 아무것도 없이 어떻게 땅으로 내려간단 말이오.”
“우리가 있잖소.”
청년이 손짓하자 한쪽에 앉아 있던 음양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려갈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도 역시 낙하산 따위는 없었다.
“대체 무슨.”
“휴. 말로 하는 것도 지치는 군.”
청년이 군복을 입은 자에게 손짓을 하자 군복을 입은 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곧장 비행기는 상승비행을 하기 시작하면서 백면궁의 무인들이 해치 밖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미처 손잡이를 잡지 못했던 박거산 또한 그대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야이 미친 새끼야!!”
하지만 그때. 그의 눈에 하얀 색의 거대한 천이 눈앞에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구름 위에 펼쳐진 집 채만 한 크기의 하얀 천위로 박거산이 떨어지자 그는 더 이상 추락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박거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음양귀!’
집 채 만큼 커다란 천의 정체는 음양사의 옷을 입고 도깨비의 얼굴을 한 악귀의 일종인 음양귀였다.
비행기에서 떨어져 내린 백면궁의 무인들은 차례차례 거대한 음양귀 위로 떨어졌고, 미처 음양귀에 탑승하지 못하고 떨어지는 무인들은 음양귀의 팔이 길어지며 낚아 채 추락사를 막아 주었다.
이미 어두운 하늘 일대엔 10마리의 음양귀가 백면궁 무인들 모두를 태워 자유 비행을 하며 천천히 한국의 영공을 날고 있었다.
“이제 좀 내 깊은 뜻을 알겠소?”
청년의 말에 궁주인 박거산은 거친 바람소리로 아무 것도 듣지 못한 척 하였다.
< 40 > 끝
ⓒ 진(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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