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
소혜는 중간고사에 맞춰 학교에 복귀했다.
병원에서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소혜의 부모는 앞으로 길게 이어질 입시공부를 위해 필요 이상의 휴식을 권했고, 중간고사가 코앞에 닥쳐서야 퇴원 할 수 있었다.
응급실에서 있었던 혼란한 기억은 장시간의 휴식과 병문안 온 우빈의 호들갑으로 차츰 흐릿해졌다.
“반장! 오랜만에 온 학교는 어때? 보기만 해도 어지럽거나 졸음이 몰려오진 않아?”
활기찬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밝게 웃는 우빈이 손을 흔들었고, 그 옆의 시우는 작은 단어장을 보며 짧게 인사했다.
“킁킁, 윽. 우빈아 너 어디 아퍼? 왜 이렇게 파스 냄새가 진동을 해?”
“아, 요즘 좀 특훈을 하느라. 집안에 일이 좀 있거든.”
“집안에 일이 있는 데 특훈을 한다고? 무슨 특훈?”
“뭐, 그런 게 있어. 으하하하.”
멋쩍게 웃는 우빈을 보고 시우는 혀를 찼다.
“그런 수준의 상대로 요란은···.”
“응?”
시우는 말을 돌렸다.
“어, 그런 게 있어. 반장 시험공부는 잘 했어?”
“···어, 덕분에··· 너 노트 필기 장난 아니더라.”
소혜는 병원에 있는 동안 가장 걱정한 것이 바로 중간고사였다. 과외와 학원으로 이미 고등학교 진도는 한 번 다 뺐지만, 중곡고의 쟁쟁한 학생들을 상대로 자신의 성적을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이 얘기를 지나가듯 이야기 하자. 우빈은 ‘뭘 그런 걸 신경 써. 그냥 잠이나 더 자’라고 이야기 했고, 시우는 자신의 노트 필기를 빌려 주겠다고 말했다.
‘얘는 대체 방학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시우의 성적을 알고 있던 소혜는 큰 기대 없이 시우의 노트 필기를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간결하고 깔끔한 글자체 하며 중요한 부분의 정리와 전체 단원의 요약까지. 입시시장에서 제일 잘나가는 일타 강사의 비밀노트를 본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그 범위가 방학이 끝난 후부터 시작되었지만, 소혜가 중간고사를 준비하기엔 부족함이 없는 노트 필기였다.
‘어쩌면 이번 중간고사 때 엄청난 일이 벌어질지도.’
소혜의 눈엔 시우는 점점 빛이 나는 존재가 되어 가고 있었다.
흉측해 보일 수 있는 이마의 흉터도 왠지 남자다워 보이고, 묵직한 행동과 여유로운 어투는 그동안 어린애 같은 남자만 보았던 소혜에게 진짜 ‘남자’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런 잡념이 머릿속에 들어오자 소혜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우빈이 그 잘생긴 얼굴을 들이밀며 묻자 소혜가 부담스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괘, 괜찮아. 그냥···.”
소혜는 거기까지 말을 하다 멈췄다.
고개를 돌리던 소혜의 눈에 소혜와 우빈 시우 쪽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조세형과 도재민 일당.
소혜는 몰랐겠지만 퍼클 일당은 시우와의 합의 이후로 잠잠히 지내는 듯 하면서 이렇게 무언의 압박을 주고 있었다.
그들의 날카로운 눈빛에 소혜는 고개를 금방 돌려 버렸고, 우빈과 시우는 그녀의 반응에 그녀가 봤던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
“고개 돌리지마. 그냥 무시해.”
“······.”
“뭔데 그래···.”
우빈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퍼클이 죽일 듯이 우빈을 노려보았다.
평범한 학생이라면 퍼클의 위압적인 태도와 눈빛에 금방 기가 죽었겠지만, 우빈이 보기엔 그들이 너무 불쌍해 보였다.
시우의 본 모습을 안다면 과연 저들 중에 오줌을 지리지 않을 자가 있을까? 자신 또한 무지했던 과거 겁 대가리 없이 시우에게 덤벼들었던 것을 후회하고 후회했는데.
“빨리 가자. 시험 시작이야.”
소혜가 계속 퍼클 무리를 바라보고 있는 우빈을 채근해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학교 뒤편 보일러 실 입구는 퍼클들의 아지트였다.
보일러실을 오는 것이 아니면 굳이 지나갈 일이 없는 이곳에서 퍼클 일당은 음모를 꾸미거나 스트레스를 풀었다.
학생들은 이곳을 너구리굴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퍼클 일당이 선생의 눈을 피해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가리지 않고 담배를 피던 곳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
선생들은 이곳이 퍼클 일당의 탈선의 장소라는 것을 잘 알았지만, 퍼클 부모의 유난과 항의 ‘애가 스트레스 받으면 가끔 필수도 있지!’ 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듣지 않기 위해 일부로 이곳의 단속을 피했다.
중간고사 첫날이 지난 오늘은 평소보다 더 많은 연기가 메케하게 너구리굴을 채우고 있었다.
“시바! 최시우 이 개새끼 때문에 진짜!”
시험 점수의 압박으로 조세형은 벌써 세대나 되는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옆의 도재민과 그 외의 일당의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
5천 만 원이나 되는 돈을 합의금으로 날린 부모들은 그 스트레스를 문제의 원흉들에게 시험점수를 압박하며 풀었다.
아무리 탈선을 하고 불량하다고 하지만 다들 난다 긴다 하는 집안의 자식들이었다. 정말 못사는 아이들처럼 가출을 한다거나 부모에게 반항 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들의 부모들은 단호하게 카드를 끊었고, 그것이 조세형을 비롯한 일당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하아! 이번에 90점 아래로 나오면 진짜 가만 안둔다고 했는데.”
“난 전교 석차 떨어지면 골프채야.”
“시바 최시우 이 개새끼!”
살얼음판을 걷는 듯 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시험공부에 더 집중 할 수 없었던 그들은 18년 인생 최대의 고비를 경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떻게 갚아주지? 진짜 다시 한 번 밟을 까?”
“하아! 말 같지 않은 소리 하지 마. 그 개새끼가 또 무슨 짓을 꾸밀 줄 알고.”
“씹새끼가 진짜 좆같은 걸로 사람 엿을 먹여! 하아.”
허공을 향해 담배 연기를 쭉 내뿜던 도재민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시바. 존나 좋은 생각났어!”
“뭐?”
“그 새끼. 동생 있잖아.”
“그년 뭐?”
“그 년은 그 새끼처럼 일부러 못 처 맞잖아. 그리고 우리가 그년 건드렸다는 거 알면 시우 이 새끼가 눈깔이 뒤집어 져서 쫓아오지 않겠어?”
“······시바 그럴듯해.”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학교 밖에서 조지는 거야. CCTV 피해서.”
“괜찮은데.”
도재민의 아이디어에 조세형이 칭찬을 멈추지 않자 다른 일당들도 좋은 생각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시험기간 때 조지자. 여자애들 시험 끝나면 노래방 가고 놀러가고 그러잖아.”
“좋아. 최시우 이 개새끼.”
퍼클 일당들은 잔혹한 복수를 꿈꾸며 담배 연기를 마구 피웠다.
시험 기간 동안 소혜는 일부러 시우와 거리를 두었다.
첫날 본 수학 시험에서 시우의 시험지와 자신의 시험지를 비교하다 두 개의 문제의 답이 서로 달랐는데. 그날 저녁 학원에 가서 시험지 문제 풀이를 한 결과 시우의 답이 맞았었다.
그 날 이후로 소혜는 멘탈을 다 잡기 위해 일부러 시우와 거리를 두었고, 우빈은 서운해 하며 소혜에게 다가가려다 시우에게 뒤통수를 맞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반대로 시우와 자꾸 거리를 좁히는 이들이 있었다.
조세형과 도재민 일당들.
그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계속해서 시우의 자리 주변에서 욕설을 내뱉거나 거친 행동을 보이고 시우를 향해 비웃음을 날리곤 했다.
시비를 거는 것처럼 보였지만, 직접적인 터치는 없었다.
‘그래. 이 정도면 니들 인내심에 오래 참았지.’
시우는 슬슬 조세형 일당을 제대로 손봐줄 때가 왔다는 생각에 몸을 풀며 기다렸고,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우빈은 조세형 일당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하지만 조세형 일당은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지 않을 정도로만 행동했고, 그런 그들의 행동에 시우도 별반 반응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간고사 끝나는 날. 일이 터졌다.
띵동
시험 끝난 기념으로 떡볶이를 먹으러 가는 우빈의 말에 소혜와 함께 걷던 시우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왔다.
-안녕하십니까. 미화관의 김준상이라고 합니다. 민서 아가씨를 미행하는 학생들이 있는 데 어떻게 할까요?
메시지를 받은 시우는 곧장 답장을 보냈다.
-어떤 놈들인데요?
-시우님과 같은 교복을 입었고, 학생들 가운데 도재민과 조세형이란 이름을 가진 학생들이 있습니다.
문자를 받은 시우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왜 이 병신들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자꾸 건드릴까?’
“뭐해 시우야? 얼른 가자.”
소혜가 핸드폰을 바라보는 시우를 재촉했다.
“잠깐만 메시지 하나만 보내고.”
-밟아 주실래요? 어디 부러뜨리진 말아 주세요.
답장은 금방 왔다.
-알겠습니다. 민서 아가씨는 모르게 하겠습니다.
조세형과 도재민은 지금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 처해있었다.
길 가던 호리호리한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놈이 담배를 가지고 시비를 털었다. ‘키가 안 큰다.’ ‘피부가 썩는다. 정도의 이야기에 ‘뭐래?’ 라며 비웃던 그들은 ‘그러니까 고추가 안서는 거다.’ ‘여자 친구 없는 꼬라지 보니 계속 펴도 되겠네.’라는 말에 결국 최시우의 동생을 쫓던 걸 멈추고 대학생을 끌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8대 1의 매타작을 시작하려는 찰나.
“얘들 맞지?”
“네. 맞습니다. 조세형, 도재민.”
그들 뒤로 단단하게 팽팽하게 부푼 근육을 자랑하는 거구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퍼클 일당은 사내들의 위압감과 더불어 자신들의 이름을 확인하는 사내들의 행동에 긴장감을 감출 수 없었다.
“왜, 왜 그러세요?”
그때,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호리호리한 청년이 말했다.
“그걸 몰라? 일단 맞자.”
평생 싸움이라곤 기선 제압한 찌질이나 다구리 밖에 하지 않았던 조세형 일당은 사내들의 매타작에 정신을 못 차렸다.
처음엔 싸움은 선빵이라는 절대적 진리를 실천하기 위해 욕지기를 내뱉으며 콧잔등을 때려 부수려 덤볐지만, 가볍게 자신의 주먹을 잡아내는 사내의 행동에 절망감을 느낄 뿐이었다.
‘좆됐다.’
아버지의 골프채 이외에 그렇게 맞아볼 일이 없었던 이들은 팅팅 부운 얼굴로 먼저 무릎 꿇고 두 손을 싹싹 빌기만 할 뿐이었다.
“잘못했어요. 제발 살려 주세요.”
“뭘 잘못해?”
“담배 펴서 죄송해요.”
“누가 담배 핀 거 같다 그래?”
“그럼 왜?”
“그걸 모르면 맞아야지!”
사내들의 발길질이 다시 시작 되었고, 퍼클 일당은 바닥에 자빠져 끝없는 고통을 감내 해야 했다.
“여긴 거 같은데?”
그때, 그들을 구원해줄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지나가는 누군가나 창문 밖으로 자신들을 보던 이들이 신고를 해준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조세형이 사내들을 제치고 자신들을 구원해줄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뛰어 나갔다.
“사, 살려 주세요. 저, 저 사람들이 저희를 폭행했엌 컥!”
자신들을 구원 해 줄 거라 생각했던 이는 되려 조세형의 목을 조르며 그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곤 자신들을 구타하던 이들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눴다.
“아이고, 고생하십니다. 시우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미화관에서 나오신 분이시라고요?”
“반갑습니다. 김준상입니다.”
“네. 저는 정가의 박철민이라고 합니다. 시우님께서 봐주라고 하셨다면서요? 왜 이런 쓰레기를 그냥 놔두시는 걸까요?”
“글쎄요. 워낙에 속을 알 수 없는 분이니까요.”
김준상이란 사람이 웃으며 말하자 박철민은 숨이 막혀 점점 얼굴이 파랗게 질려가는 조세형을 바닥에 내던졌다.
“뭐 가볍게 몸이나 풀려고 했는데. 더 하면 죽겠네요.”
“네. 저희도 그만 마무리 지으려던 참입니다.”
그렇게 두 무리의 사내들은 조세형 일당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저들끼리 이야기를 하며 골목을 빠져 나갔다.
난생 처음 어른의 폭력이란 걸 당한 조세형 일당의 걸음걸이는 패잔병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언제나 함께 있으면 무서울 것 없던 그들은 지금 서로의 존재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길거리를 걷던 도재민이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바! 최시우 그 새끼 정체가 대체 뭐야!”
인적이 드문 어두운 골목길이었기에 개 짖는 소리 말곤 들리는 게 없었다. 평소라면 같이 욕해주고 동조해주던 퍼클 일당들도 지금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때, 골목길 반대편에서 도재민의 물음에 답변하는 이가 있었다.
“니들이 더 잘 알잖아? 찐따, 호구, 등신, 좁밥. 그게 나 아니야?”
드문드문 켜져 있는 가로등 조명 사이로 최시우가 나타났다.
조세형과 일당들은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시발 좆같은 새끼야!”
< 36 > 끝
ⓒ 진(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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