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
사방을 둘러본 박병철은 자신이 도망갈 구석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가 있는 공간은 만경진을 시연할 때 들어가 봤던 공간과 그 특징이 똑같았다.
만경진은 설치한 자가 아니면 해제할 수 없고, 한 번 들어간 이는 자신의 의지대로 나올 수 없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어어, 아니지 안 되지.”
시우가 완드를 휘두르자, 병철의 입이 벌어지며 독약 캡슐이 튀어 나왔고, 심장을 찌르려던 단도가 검은 액체에 감싸여 병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넌 그냥 죽으면 안 된다.”
“나한테선 무엇 하나 알아 갈 수 없을 것이다. 시간낭비하지 말고 차라리 죽여라.”
“걱정하지 마라. 넌 암흑회의 손에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건 내가 알아서 가져 갈 테니 그것도 걱정 말고.”
시우의 입에서 처음 듣는 언어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 쥐어진 완드는 허공에 유려한 마법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손과 발이 잡힌 박병철은 그대로 몸이 떠오르며 허공에 눕는 자세가 되었고, 그의 전면엔 검은색의 거대한 마법진이 형성되고 있었다.
시우의 입에서 어원을 알 수 없는 음성이 흘러 나왔다.
이윽고 마법진에서 검은 촉수들이 튀어 나와 병철의 눈과 코 귀 입까지 오공을 파고들었다. 저항하지 못하는 병철은 어느새 눈을 뒤집어 까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 힘을 모았구나. 하지만 너희는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
병철의 뇌 속을 헤집어 대던 시우는 원하는 정보를 얻은 후. 병철에게 특별한 마법을 시전 한 뒤 풀어 주었다.
만경진에서 빠져 나온 병철은 한 동안 멍하니 길거리에서 사람들의 진로를 방해하다 정신을 차렸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한참이나 자신의 손과 발을 보던 병철은 자신이 궁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지하철역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허공에서 지켜보던 시우는 곧장 남은 두 명의 암흑회 인원을 향해 날아갔다.
“언제 온다는 이야기는 없었느냐?”
남궁혜자가 묻자 우빈이 답했다.
“곧 온다고 했습니다.”
우빈은 연무장에 모인 무사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아직 암흑회의 인원이 몇이나 한국에 들어온 지 파악되지 않은 이상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슈우우웅
그때, 빠르게 날아드는 비행체의 소리가 태백정가 상공에 울려 퍼졌다.
무사들의 시선은 절로 하늘로 향했고, 그곳엔 투명화를 풀고 검은 로브를 나풀거리며 하강하는 시우의 모습이 보였다.
쿵!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연무장의 바닥이 깨지며 흙덩이가 일어나고 모래먼지가 날렸다.
태백정가의 정중앙 연무장에 시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우에 대한 일전의 악몽이 있는 태백정가의 무사들은 그런 시우의 등장에 다들 소리 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시우는 보무도 당당히 연무장을 내려와 우빈과 그의 가족들이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암흑회의 정보원들을 처리하느라 좀 늦었습니다.”
시우가 인사를 건네자. 순지가 앞으로 나섰다.
“그래, 암흑회를 혼자 상대했다고 들었는데, 자넨 괜찮은가?”
“도와주신 덕분에 큰일은 없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암흑회는 왜 자네를 노린 건가?”
“그들이 대업을 위해 한국에 보낸 인원을 제가 처리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대업?”
시우는 암흑회 정보원의 머릿속에서 얻은 정보를 전달했다.
“아마 한국에 돌아오려는 것 같습니다.”
“허허!”
상계에서 큰 전쟁이 다시 시작될 거라는 예상에 순지가 수염을 쓸며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다 남궁혜자의 눈치에 헛기침을 하곤 그녀를 시우에게 소개했다.
“아차, 인사하게. 이분은 내 모친이시자 지금 태백정가의 가장 큰 어른이신 남궁혜자이시네.”
노인으로 보이는 순지가 중년의 여성으로 보이는 남궁혜자를 소개하자 시우는 잠시 그녀를 살피곤 인사를 건넸다.
“아깐 미처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최시우라고 합니다.”
“네가 태백정가의 현판을 부쉈다는 그 아해라지?”
남궁혜자의 카랑한 말에 정순지가 놀라는 표정으로 남궁혜자를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꺼림직한 과거의 일을 잘 넘겨보려 했건만, 그 괄괄한 성격이 그냥 넘기지 못하는 것이었다.
“네. 제가 그랬고, 그럴 자격이 있었습니다.”
시우는 한술 더 떴다.
“호오! 듣던 대로 아주 겁이 없는 아이구나.”
“힘을 가진 자가 그 힘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려 했고,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기습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부술 자격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부술 자격이 있었다?”
시우의 말에 남궁혜자의 기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순지나 형진과는 차원이 다른 고농도의 살기를 띈 기운이 사방으로 흩어져 나가자 상대적으로 심력이 약한 무사들과 우빈 등이 움찔거리며 뒤로 몇 발작이나 물러났다.
시우는 잠시 움찔하다 금방 신색을 회복하고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집안의 제일 큰 어르신도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힘을 과시하시는 분이신겁니까?”
시우의 이야기에 남궁혜자는 더욱 강한 기운을 사방으로 뿌려댔다. 곳곳에서 숨을 쉬지 못하고 구역질을 하는 이들이 나왔고, 정순한 기를 가진 순지와 형진등도 그 압력에 점차 힘들어질 정도였다.
그렇게 딱딱한 얼굴로 기를 뿌려대던 남궁혜자가 돌연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정말 대단한 아이구나. 보았느냐? 내 기운을 정면으로 받고도 끝까지 버텨 내는 걸. 이런 아이를 힘으로 굴복시키려 했으니 창피를 당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남궁혜자의 웃음소리와 함께 그녀의 기운이 일순간 사라졌고, 곳곳에서 작은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미안하구나. 내 솔직히 가문을 박살냈다는 너의 이야기에 분노보다 호기심이 먼저 앞섰다. 나도 부족하지만 일개 무인인지라 호슴지심이 일어나는 것을 쉽사리 막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
“오늘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깊게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좋구나. 품성도 아주 사내답고. 내가 없을 때 있었던 일이지만, 정가가 한 행동에 대해선 사과하고 싶구나. 미안하다.”
그렇게 얘기하며 남궁혜자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행동에 정가의 사람들과 우빈의 가족들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시우는 남궁혜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이미 보여주신 행동만으로 충분합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은 깨끗하게 잊겠습니다.”
“고맙구나. 이제 묵은 일도 다 풀었으니 편하게 이야기 해보자꾸나. 들어 오거라.”
태백전
현 가주인 정형진의 거처이자 업무를 보는 곳이었고. 가문의 대소사가 모두 결정되는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었다.
건물은 정가의 상중앙에 위치해 있었고 위세를 알려 주듯 거대한 현판과 으리으리한 장식들이 화려하게 꾸며진 곳이었다.
태백전 내부는 여러 갈래의 복도와 사무실이 존재 했고 정 중앙엔 연회나 회의를 위한 커다란 연회장이 존재했다.
시우가 안내 받은 건 집무실이 아닌 연회장이었다.
자리에 앉자 차가 나오기도 전에 남궁혜자가 입을 열었다.
“아까 보여준 그 비행술은 대체 무엇이냐?”
“마법입니다.”
“마법? 혹시 네 정체가 마법사인 것이냐? 유럽에 있다는 그런?”
“유럽에 마법사가 있습니까?”
“그래, 자세히는 모르지만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서방문화권엔 마법사들이 있다. 영국국립마법학회가 가장 큰 마법사 집단이라 들었는데. 넌 거기 출신이 아닌 것이냐?”
“그냥··· 우연히 기연을 얻었습니다. 마법은 그 기연을 통해 익히게 되었고, 사실 상계(上界)의 존재도 우빈이를 통해 알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정녕 네가 우빈이와 동갑인 아이가 맞느냐? 내가 보기에 넌 꼭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 같은데.”
남궁혜자는 시우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에 기시감을 느꼈다. 반박귀진(返璞歸眞)의 경지에 올라 오히려 평범해 보이는 이에게 풍기는 그런 기운.
남궁혜자의 말에 시우는 속으로 움찔 했지만 겉으로 전혀 티를 내지 않은 채 오히려 살짝 웃어 보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남궁혜자의 이야기가 길어 질 것 같자. 정순지가 끼어들었다.
“어머니, 이제 다른 이야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이제 안면을 텄으니 차차 알아 가면 되겠지.”
정순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국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정보는 어떻게 얻은 것인가?”
“마법으로 알아냈습니다. 방법은 모르시는 편이 나을 것 같네요.”
“자네가 암흑회 인원들의 그··· 시체를 사라지게 했다던데. 그것도 마법의 일종인가?”
시우는 어떻게 이야기 할까 잠시 고민하다.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암흑회를 지워버리기로 한 이상 동지가 될 수 없다면 괜한 오해로 방해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제가 익힌 마법은 파괴적이고 잔혹한 면이 있습니다. 일전에도 보셨겠지만, 주로 인간의 마이너스적 감정을 이용하고 원한다면 얼마든지 고통스럽게 적을 죽일 수 있습니다.”
“암흑회가 자네의 적이 되었단 말인가?”
“그들이 저만을 노렸다면 저 또한 이렇게 까지 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우빈이와 민간인인 소혜를 노렸고, 저희 부모님에게도 그 힘을 쓰려 했습니다. 저는 이번 일에 책임을 물어 암흑회를 지워버리려고 합니다.”
광오한 시우의 말에 정가의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흐음.”
시우가 힘이 강력하고 파괴적인 것은 알지만 그가 혼자 암흑회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지는 않았다.
“너 혼자 암흑회를 상대할 수 있겠느냐?”
“저는 마법을 쓰는 위저드고, 제게 준비할 시간만 있다면 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호호 정말 볼수록 마음에 드는 구나. 너희들은 뭘 그리 고민하느냐? 100년을 이어온 원한의 상대다. 그들의 힘을 당해내지 못할까 걱정하는 것이냐?”
100여 년 전 백면궁의 배신을 직접 겪지 않았던 순지와 형진 등은 남궁혜자의 뼈 속 깊은 원한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조금은 냉정한 시선으로 현 상황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갑작스런 그들의 행보에 머리가 복잡해졌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고민할 필요 없다. 뜻도 맞고, 생각도 같으니 그저 실행하면 될 뿐이다. 너는 적을 둔 곳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가에 들어 오거라. 네 편의를 봐주겠다.”
“괜찮습니다. 저 또한 현재 미화관이란 곳과 함께 일을 하고 있고. 제 능력의 특성상 정가가 오해를 살 수 있는 부분도 있으니 그저 친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정도가 좋을 것 같습니다.”
“흠··· 네 뜻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자주 방문 하거라. 내 너에게 아주 많은 호기심이 생기니.”
“알겠습니다. 그리고 암흑회 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암흑회 이야기에 순지가 나섰다.
“어떤 건가?”
“암흑회를 먼저 칠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들의 정보원을 통해 그들의 본거지는 알아냈습니다.”
암흑회를 지워야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부터 시우는 머릿속으로 암흑회를 지워버릴 수많은 작전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가 선수필승. 상대가 준비를 마치기 전에 선빵을 치는 것이었다.
시우의 말에 호쾌하게 이야기 하던 남궁혜자도 꾹 입을 다물었다. 정순지와 형진도 그저 묵묵하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런 그들의 반응에 시우가 입을 열었다.
“혹시, 상황이 여의치 않으신 거라면 저 혼자라도 암흑회를 상대하고 싶습니다.”
시우의 말에 한쪽에서 팔짱을 끼고 관망하던 정현미가 나섰다.
“아까부터 듣자듣자 하니 거만함이 하늘을 찌르는 구나. 본가의 힘이 너 개인의 힘보다 못하다고 말하는 것이냐?”
정가의 사람들이 잘못했다곤 하나, 현판을 부수고, 남궁혜자가 고개까지 숙였다. 평생을 태백정가의 일원으로서 자부심가득하게 살아온 현미에게 있어 시우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런 시우가 정가를 무시하는 듯한 발언까지 내뱉으니 더 이상 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
시우는 대답하지 않고 현미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들의 입장에선 기분 나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시우는 모든 것을 단순 명쾌하게 정리하고 싶었고, 중간 과정을 뛰어넘은 어법은 오해를 쌓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 하거라.”
“할머니!”
갈등을 잠재운 것은 남궁혜자였다.
“저 아이 또한 그런 뜻으로 한 얘기가 아님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
현미가 이 상황을 참을 수 없다는 듯 결국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현미가 나가는 모습을 보던 남궁혜자가 고개를 돌려 시우를 보며 말했다.
“네가 말 한 이야기를 우리 또한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럼 다른 문제라도 있는 것입니까?”
“일본은··· 야토가미의 땅이다.”
‘야토가미’라는 단어가 나오자 정가의 사람들 모두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 33 > 끝
ⓒ 진(J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