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
‘궁에 알려야 한다!’
흑포 사내의 뇌리 속엔 갑작스레 나타난 시우의 존재에 대한 경종이 울렸다.
어린 나이로 보임에도 보여주는 강력한 파괴력과 실전에 특화된 전투실력.
분명 미지의 존재로 보일 것이 분명함에도 귀능갑을 장착한 혈면인을 상대로 차근하게 싸우는 것까지.
아직 약관도 되어 보이지 않는 이가 저 정도의 실력이고 그를 키운 세력이 존재한다면 이건 예사 큰 일이 아니었다.
‘본 궁의 대업에 차질이 생길지도.’
시우의 존재를 궁에 알려야 된다는 생각이 닿자 더 이상 시우와의 일전이 무의미 해졌다.
그와 싸워서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입장에선 정체불명의 존재인 시우를 완벽히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제일 좋은 방법은 잘 후퇴하는 것.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흑포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제법 실력이 있구나.”
“일본에서 오래 살았다고 들었는데 ‘제법’이란 단어가 무슨 뜻인지 잊었나봐?”
“여유 부리는 건 좋다만, 이럴 시간이 있을까?”
흑포 사내의 말에 시우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본 궁의 대업을 방해한 대가가 겨우 네놈의 목뿐이겠느냐?”
흑포 사내의 이야기를 듣던 시우의 눈빛이 점점 차갑게 가라앉았다.
“무슨 뜻이지?”
“지금쯤 본궁의 무사들이 네놈의 가족들에게 그 죄값을 받아 내고 있을 거란 말이지.”
흑포 사내의 말에 시우의 로브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그게 사실이면, 네놈들은 큰 실수를 한 거다.”
시우가 가볍게 완드를 휘두르자 네 개의 [윈드 커터]가 부상당해 쓰러져 있던 백면인들의 목을 잘라냈다.
“크어억!”
“컥!”
그와 동시에 시우의 발밑에 펼쳐진 다크 사이트는 시우의 분노에 감응하듯 격렬하게 꿀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국엔 다크 사이트의 정 중앙엔 커다란 눈동자와 기괴한 입이 발현되었다.
“먹어 치워라.”
시우의 말에 다크 사이트는 순식간에 몸을 길쭉하게 늘어뜨려 암흑회의 시체들을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아그작, 아그작, 아그작.
백면인을 시작으로 미라가 되어버린 혈면인들까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한 방울의 핏자국도 남지 않았다.
“상계(上界)의 세력 다툼 따윈 나완 상관없었지만, 방금 네 말 때문에 상관있어 졌다.”
시우를 중심으로 펼쳐진 다크 사이트의 크기가 더욱 커졌다.
그저 커다란 그림자에 불과했던 다크 사이트는 이제 살아 있는 것처럼 공간을 잠식하고 검은 안개를 뿜어내어 사위를 어둡게 만들었다.
강원도 외곽의 한 정신병원.
최근 불어난 환자들로 인해 새롭게 고용된 큰 몸체의 남자 간호사가 숨을 헐떡이며 진료실에 들어섰다.
“서, 선생님. 또 환자들의 발작이 시작됐습니다.”
“실어증 환자들이요?”
“네. 어서!”
간호사와 함께 특별 병동으로 들어선 의사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본래 창고로 쓰던 이곳은 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들의 집단 입원으로 특별병동으로 개조된 상태였다.
특별병동이란 말도 사실 아까울 정도로 가축우리에 비슷한 이곳엔 대략 오십여명의 사람들이 말도 못하고 이지를 상실한 체 먹고, 자고, 괴로워 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안정제 투입 했습니까?”
“네. 방금 전부터 발작이 더 심해졌습니다.”
이 기이한 병에 걸린 환자들은 평소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지만, 가끔식 기괴할 정도로 심하게 발작을 일으켰다. 마치 무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것을 강탈 당하는 사람처럼 하늘을 향해 손을 벌리고 끌려가지 않게 침대 난간을 부여잡았다.
“일단 발작하면서 혀를 깨물지 않게 조치해 주세요. 같은 패턴이라면 이 발작도 그리 오래가진 않을 겁니다.”
의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간호사가 다른 간호사들에게 호출을 돌렸다.
“대체 뭘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거지?”
공마인으로부터 대량의 흑마나를 끌어당기기 시작한 시우의 기운은 만경진을 터트릴 듯 했다. 그 기운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흑포 사내는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압박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혹시나 뭔가 잘못 건드린 건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불쑥 일어났지만, 흑포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다.’
이대로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흑포 사내가 먼저 움직였다.
수번의 휘두름으로 검기의 다발이 시우에게 쏘아져 갔다.
시우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한 손으로 얼굴을 막고 완드를 휘둘러 수개의 배리어를 생성 시켜 검기를 흘려보냈다.
퍼퍼퍼퍼펑!
연속적으로 배리어가 부서져 나갔지만, 쏘아져 오는 검기의 다발은 모두 막을 수 없었다.
몇 개의 검기 다발이 로브를 뚫고 시우의 몸에 상처를 만들기 시작했다.
시우는 더 이상 방어나 회피에 신경 쓰지 않는 다는 듯 오직 공격 일변도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파이어 볼]
[윈드 커터]
[다크 터치]
[쉐도우 워리어]
수 십개의 [파이어 볼]이 흑포 사내에게 쏘아져 나갔다. 흑포 사내는 검기 가득 담긴 검을 휘둘러 파이어 볼을 동강 내었고, 검기에 잘려진 파이어 볼이 흑포 사내를 지나 뒤쪽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퍼퍼퍼펑!
화끈한 열기가 가시기도 전에 나선형으로 회전하며 사방을 옥죄는 [윈드 커터] 열 두 개가 흑포 사내를 찢어발길 듯 했다.
흑포 사내는 사방뿐 아니라 팔방 까지도 검을 휘둘러 윈드 커터를 막았다.
바람으로 만들어진 커터였지만, 검과 부디칠 때마다 찢어지는 쇳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끼기기기기기긱!
뒤이어 마법진에서 쏟아져 나온 검은 손들이 흑포 사내의 몸을 감기 시작했고, 다크 사이트에서 분리된 검은 그림자는 흑포 사내의 주변을 돌며 급소를 노리고 계속해서 공격을 해댔다.
[거인의 손]
마법의 융단 폭격에 정신 못차리고 있는 사이 흑포 사내의 머리 위로 거대한 거인의 주먹이 흑포 사내를 내리 쳤다.
쾅!
백면인을 압착 프레스에 넣은 것 같은 대단한 압력이었지만 의외로 흑포 사내는 멀쩡해 보였다.
“네놈 또한 몸에 장난질을 했구나. 하지만 그뿐이다.”
뒤이어 얼음송곳, 번갯불, 바람칼, 불덩이등의 마법이 계속적으로 흑포 사내를 때리자, 흑포 사내 자신도 몸에 점점 이상이 오는 것을 느꼈다.
‘일단은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상대의 실력이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것을 안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흑포 사내는 만경진 한쪽 공간에 손을 집어넣어 주술 부적을 떼어냈다.
효력을 잃은 부적은 순식간에 재로 변해버리고, 사방을 구성하고 있던 만경진이 벗겨지면서 자동차 경적 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다. 다음엔 반드시 네놈의 목을 베어주마.”
시우에게 검기 다발을 날린 흑포 사내는 곧장 뒤돌아 신형을 날렸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 넘어 최대한 시우의 사정거리 안에서 도망칠 필요가 있었다.
한 참을 가던 흑포 사내는 뒤를 돌아보고 아무도 자신을 쫓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안심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재밌네. 그러니까, 이렇게 내가 펼친 공간 안에서 뱅뱅 돌다 제자리에 온다는 거지?”
“!!!”
시우는 맨 처음 만났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서, 설마 네놈이 만경진을?! 어, 어떻게?”
“내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나로써 끝날 거라 생각하지 마라. 우리 백면궁의 힘은 이게 다가 아니다.”
“그건 걱정하지 말아라.”
“······?”
“너희 백면궁은 오늘 이후로 상계에서 명맥이 끊길 것이다.”
시우의 광오한 말에 흑포 사내의 눈빛이 심하게 요동쳤다.
“내가 그리 결정했다.”
남궁혜자를 비롯한 태백정가의 사람들은 우빈이 말한 곳에 도달했지만, 암흑회와 시우를 찾지 못했다.
“여기가 맞느냐?”
“네. 분명 맞습니다. 근데···.”
남궁혜자와 현미는 상황을 모르고 사방을 둘러 보기만 했다. 그때 현민이 나섰다.
“우빈이 말로는 분명 진 안에 갇혔다고 했습니다. 아마 그 영향으로 찾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 진이란 당금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 해도 기를 운용하는 자라면 당연히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무언가 잘 못 된 듯 하다. 우빈이에게 전화를 해 보거라.”
남궁혜자의 말에 현민이 핸드폰을 꺼내 들 때쯤.
사방으로 기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며, 공기가 심하게 요동쳤다.
태백정가의 사람들은 긴장감에 검을 바로잡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때, 공간을 찢고 시우가 나타났다.
“자네! 무사했는가?”
그나마 일면식 있는 현민이 나서서 이야기 했다.
정가와 좋지 않은 기억이 있는 시우로서는 그 대답이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우빈이에게 들었네. 암흑회를 만났다지?”
“···저를 구하러 오신 겁니까?”
“그렇다네. 근데 암흑회 놈들은 어디 있는 가?”
“제가 처리했습니다.”
“처리해?”
“네. 죄송합니다만 제가 지금 급히 가봐야 할 곳이 있는데.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되겠습니까?”
“그, 그렇게 하게.”
시우는 자신에게 투명마법을 건 뒤 곧장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엄청난 속도에 공기가 찢어 발겨지며 파열음이 일대를 울렸다.
퍼퍼펑!
금세 눈에서 사라진 시우의 모습에 정가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한 지경이었다.
“방금 저 아이가 한 말, 혼자서 암흑회를 상대했다는 것이냐?”
“그, 그런 거 같습니다.”
달리 상황에 대해 알지 못하는 현민 또한 제대로 된 답을 해주지 못했다.
< 31 > 끝
ⓒ 진(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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