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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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빈의 말을 듣던 우빈은 현실이 아닐 거라 고개를 몇 번이나 저어 봤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도리어 이야기가 계속 될수록 소빈의 얼굴은 점점 차가워지고 있는 듯 했다.
“우빈이는 일어났느냐?”
밖에서 정형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답했다.
“네. 지금 막 일어났습니다.”
“당장 데려 와라!”
“네.”
소빈은 순지가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잠시 가만히 있다가 우빈에게 말했다.
“일어나. 지금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
“벌써? 지금 바로 복수하러 가는 거야?”
소빈은 고개를 돌렸고, 소빈의 눈동자를 본 우빈은 움찔 놀랐다. 그녀의 눈빛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지만 그것이 결코 좋은 결과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조금 힘들 거야. 아니. 많이 힘들겠지. 하지만 절대 정신 놓으면 안돼.”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누나 제대로 얘기를 해줘.”
“가자. 기다리신다.”
약화전 건물을 나선 우빈의 눈은 휘둥그레져 사방을 절로 둘러보았다.
위세 높은 태백전은 건물 한 켠이 부서졌고,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연무장은 땅거죽이 파여 갈색의 모습을 드러냈다.
태백삼십육검을 비롯한 정가의 정예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꼿꼿하게 서 있었지만, 팔과 다리 머리에 할 것 없이 모두 붕대를 감은 상황이었다.
마치 전쟁에 패한 군대의 모습과 같은 처참한 모습이었다.
“죄인은 무릎을 꿇어라!”
태백전 앞에 선 순지와 팔에 붕대를 감은 현진이 차가운 눈으로 우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죄인’이란 단어가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라 생각지 못한 우빈은 혹시나 시우가 이곳에 잡혀 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작은 기대감을 가지기 까지 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연무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 중심엔 자신과 소빈 밖에 없었다.
-무릎 꿇어.
소빈의 전음성이 우빈에게 들려왔다.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죄인은 그 암흑회의 그 새끼라고! 비겁하게 사술을 이용해 날 이렇게 만든 거라니까!”
“죄인은 무릎을 꿇어라!!”
순지의 쩌렁한 목소리가 연무장을 다시 메우자 우빈의 등줄기에도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하, 할아버지.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죄인이라뇨! 단죄를 받아야 할 건 바로 그 암흑회의···.”
“네 이놈!!!”
순지의 일갈에 구경을 하던 직원들의 다리가 휘청 거렸다. 그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뻗혀 자신도 모르게 기가 흘러 넘쳤던 것.
몸 상태가 좋지 못했던 우빈 또한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순지의 노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깨달은 소빈은 우빈의 혈을 짚어 단전을 봉인하였고, 자신 또한 무릎을 꿇고 자리에 앉았다.
부지불식간에 단전이 봉인된 우빈은 몸에서 힘이 쭉 빠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소빈을 바라보았다.
“이대제자 정소빈. 정가에서 모든 일을 마무리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습으로 정가의 명예에 먹칠을 하였다 죄를 인정하는 가!”
소빈은 잠시 답 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네. 인정합니다.”
“좋다. 이대제자 정소빈에게 면벽 석 달을 명한다.”
“······선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이대 제자 정우빈!”
우빈은 아직까지도 지금의 일에 대해 정확한 진위 파악이 되지 않고 있었다.
“이대 제자. 정우빈. 제가 왜 징벌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네 이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느냐!”
정순지가 노기를 발하기 전 현진이 먼저 나서 우빈을 탓했다.
“전 필사적으로 정가를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런 제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합니까. 할아버님!”
“네가 민간인을 상대로 사사로이 무공을 쓴 게 한 두 번이 아니지 않느냐!”
“알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잘못했다 생각하고, 그로 인한 벌을 받으시라면 벌을 받겠습니다. 하지만 그자는 아니었습니다. 할아버님도 똑똑히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정순지의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네 이놈! 아직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느냐!”
“전 정가의 사람이고 정가를 위해 언제든 목을 내 놓을 자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땅에 떨어진 정가의 명예를 세우기 위해 이처럼 억울하게 벌을 받아야 한다면 차라리 이 자리에서 자진하겠습니다.”
우빈은 주변에 선 무사에게서 검을 빼앗아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이런 멍청한 놈!!”
순지의 일갈에 정소빈이 수도를 올려 우빈의 손에서 칼을 떨궈 내었다.
“억울합니다. 그리고 분합니다. 또한 이 모든 일이 제가 무능하여 생겼다는 생각에 잠시도 버틸 수가 없습니다. 할아버님!”
“······허허.”
닭똥 같은 눈물을 똑똑 흘리는 우빈을 보며 순지가 하늘을 보며 수염을 쓸어 내렸다.
우빈의 경솔한 행동이 정가를 위험에 빠뜨렸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전에도 종종 우빈은 일반인을 상대로 무공을 사용하였고, 그 뒤처리를 하기 위해 정가가 얼마나 많은 댓가를 치러야 했던가. 하지만 그런 우빈을 혼내진 않았었다. 자신도 자신의 자식도 그 나이 쯤엔 몇 번씩이나 그런 사고를 쳤으니까. 다만 이번엔 그 상대가 좋지 않았을 뿐.
설혹 시우의 존재가 암흑회의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우빈의 대응은 칭찬받아 마땅할 따름이었다.
“죄송합니다만 그렇다면, 우빈이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어떨런지요.”
“···무슨 말이냐?”
정형진의 셋째 동생인 현민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일단은 좀 분위기를 차분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버님.”
정현민은 외부 총괄 직책을 맡고 있었다. 정가에 관련된 대외 업무에 대해 모두를 담당하고 있었다.
“소빈과 우빈은 안으로 들라!”
“에취! 아 미안합니다. 그러니까 어디서 오신 분이라고요?”
“미화관의 한세아 아가씨께서 보내서 모시러 왔습니다.”
“그니까 그 미화관이란 곳이 뭐고 한세아는 또 누군데요?”
집에서 먹을 찬거리를 사러 마트에 들려 몇 가지 야채와 고기 한 근을 사서 돌아가던 시우는 돌연 자신의 앞을 턱하니 막는 고급 리무진의 존재가 심히 불쾌하였다.
하지만 시우가 누군가, 대륙을 정벌하면서 단 한 번의 수탈도 허용하지 않았던 자애의 상징 아니었던가.
그렇게 가뜩이나 길이가 긴 리무진을 지나가려는 찰나 조수석에서 내린 정복 차림의 노 신사가 기품 있게 인사하는 것이 아니던가.
“미화관은 우리나라 정·재계 최고 권력자들이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모이는 곳이고, 한세아 아가씨는 그곳의 주인이십니다.”
계속되는 두루뭉술한 대답에 시우의 인내심이 점점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자꾸 질문이 뱅뱅 도는데. 그 사람이 날 찾는 이유가 뭐냐고요.”
“아가씨께서 최시우님께 궁금한 점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에휴, 됐습니다. 집에 가서 밥해야 하니까 나중에 보자 해요.”
“그럴 줄 알고 이미 집에 미화관 최고주방장이 만든 정식 찬을 보내놨습니다.”
“필요 없으니까 그거 도로 가져가요.”
“아가씨께서 만약 거절하시면 그 다음엔 학교로 찾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참 예의가 바른 건지 싸가지가 없는 건지. 지가 뭐라고 누구더러 오라마라야.”
시우는 꼬투리를 잡을 요량으로 정복 신사의 심기를 마구 건드려 보았지만 신사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시우님께도 나쁘지 않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모셔 오시라 하신 거니 함께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노신사가 한 치의 예의에 어긋남 없이 빙그레 웃으며 그렇게 이야기 하자 시우도 헛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쪽을 봐서라도 가봐야 겠네요.”
“감사합니다. 시우님.”
시우가 장바구니를 들며 물었다.
“이건 잘 보관해 주실 거죠?”
“미화관 냉장고에 신선하게 보관하겠습니다.”
“뭐, 가 봅시다.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 중에 처음으로 나쁜 기분은 아니니.”
시우가 리무진에 오르자 리무진은 미끄러지듯 스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뭇 진지해진 분위기.
정가의 사람들은 말이 없었고, 소빈과 우빈은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은 체였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의 연기가 서서히 옅어 질 때쯤. 정현민이 처음으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 젊은 학생, 아니 학생이라 할 수 없을 지도 모르겠군요. 그자의 정체를 우리가 가늠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녀석은 분명 암흑회의 사람이 맞습니다! 작은아버지!”
“네 이놈! 가만히 있지 못하겠느냐!”
정형진이 호통을 치자 소빈이 우빈의 옆구리를 찌르고 모두의 눈초리에 기가 죽은 우빈은 고개를 숙였다.
“우빈의 말대로 저희 또한 암흑회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형님과 아버님도 그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면이 있지 않습니까?”
“음······.”
“···.”
정순지와 정형진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만약 암흑회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겁니다. 또한 그쪽에서도 단지 그 한명만을 보내어 우리의 자존심을 꺾으려 하지 않았을 테지요.”
“그렇다면 정체가 뭐라 생각하느냐?”
“저도 확실하게 특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존재라는 생각은 듭니다.”
“이상한 존재?”
“그가 쓰는 힘은 우리 상계(上界)의 힘과 비슷했습니다.”
“그렇지. 자신을 위저드라 소개하기도 했으니, 아마 유럽의 마법사들이랑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긴 하였지.”
“그런데, 그는 우리의 힘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정순지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 시우와 했던 대화들을 되뇌여 보았다.
“그래.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구나.”
“아마 그는 상계(上界)의 정체는 모르면서 우리처럼 상계(上界)의 힘을 쓰는 인간인거 같습니다.”
“그게 가능한 것이냐?”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으나, 중국에선 종종 기연을 찾아 특별한 힘을 쓰는 자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를 정가로 들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현민의 말에 형진이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현민아 그건 생각해 볼 일이다. 정가가 제대로 힘을 쓰지 않았다곤 하나 어쨌든 정가는 그자에게 패배했다. 그런 그를 정가의 사람으로 만든 다는 것은 우리의 패배를 시인하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느냐.”
“저도 정가의 패배에 대해선 쓰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저희는 부끄러운 모습까지 보이기도 했고요.”
한편에서 듣고만 있던 소빈이 움찔 거렸다.
“하지만, 실제로 저희 정가가 패배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희 누구도 그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고, 삼십육검도 사력을 다한 전투를 벌이진 않았습니다.”
“그래. 방심한 면이 있다.”
정순지가 머슥한지 기침을 내뱉으며 말했고, 현민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보기에 그 자는 싸움에 능숙해 보였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가 쓰는 술들은 대부분 그 파괴력이 본가의 무공보다 훨씬 미약했지만, 뛰어난 심리전과 전술로 본가의 삼십 육검을 상대했습니다. 더구나 애초에 살수는 전혀 쓰지도 않았고요. 우빈과 같은 나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음을 생각하면 엄청난 일입니다.”
현민이 슬쩍 우빈을 보자, 우빈이 멍하니 대화를 듣고 있다가 다시 죄인의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자신이 바라는 대로 상황이 돌아가지 않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우빈은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계(上界)에서의 정가의 위치를 생각하면 우빈의 정체를 알아보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정가의 사람으로 들일만한 사람이라면 암흑회와의 싸움에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암흑회.
그 짧은 단어의 출현에 순지와 형진이 미간이 잠깐 내 천(川)자를 그렸다.
“······흠.”
호기심이 가는 자고, 궁금증이 생기는 존재다. 적군이 아니라면 가급적 아군을 만들어야 되겠다 생각한다.
지난날의 습격으로 정가가 박살이 나버렸지만, 상대에 대한 정보도 없었고, 의외의 공격방식에 당황한 것이 더 컸을 뿐. 진짜 전투를 벌인다면 상대는 반드시 죽을 것이었다.
하지만 일인이 보인 그 무위가,
정가에서도 기가 죽지 않는 그 배짱이,
기습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그 두뇌가 더더욱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본가는 이미 그와 안 좋은 인연을 맺었다.”
“그래서 우빈이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우빈이 움찔 거렸다.
“어떻게 말이냐?”
“우빈이는 그자와 같은 학교를 다닌 다고 하였습니다.”
현민이 우빈을 바라보자. 우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같은 반입니다.”
“우빈을 통해 그자의 정체를 알고 우리와 함께 갈 수 있는 자라면 다른 곳에서 그를 데려가기 전에 먼저 데려오는 것입니다.”
“그자는 우빈이를 자신의 반경 안으로 들이지 말라 하였다. 그 경고를 무시해도 되겠느냐?”
“그 처절한 싸움 속에서도 사상자나 중상자는 한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도의가 없는 자라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우빈이가 잘만 접근 한다면 친해지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흠···. 하지만 우빈이가 잘 할 수 있겠느냐?”
순지의 말은 우빈이의 성정 때문에 문제가 더욱 커지지 않겠느냐는 의미였다.
“우빈아 잘 할 수 있겠느냐?”
“······.”
우빈은 멈칫하며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를 무시하다 혼쭐이 났고, 그의 힘이 정가에서 탐낼 정도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지금은 그에 대한 호기심 보다는 반발심과 거북함이 더 큰 것이 사실이었다.
우빈이 답이 없자 순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놈이 아직도 반성을 하지 않고 있구나. 아버님 그냥 소빈에게 일을 맡기시고 우빈이는 징벌방에서 일 년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징벌방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우빈이 바로 우렁차게 대답했다.
“네! 잘 할 수 있습니다.”
“그와 싸우거나 시비를 걸어선 안 된다.”
“···네. 알겠습니다.”
“그를 귀찮게 하여 심기를 흐려서도 안 된다.”
“······.”
우빈은 장담할 수 없다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징벌방에 처박히게 될지도 몰랐다.
“대답 하거라 잘 할 수 있겠느냐?”
‘우, 우라질.’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다. 소빈과 우빈의 징벌을 미루겠다. 정가는 최대한 복구에 힘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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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 끝
ⓒ 진(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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