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
카페 안.
깔끔한 정장에 검은색 안경테와 고급스런 시계가 잘 어울리는 청년이 청순한 미모와 부드러운 머릿결. 그리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육감적인 몸매의 여성과 자리해 있었다.
“오랜만이야. 지혜야.”
청년의 말에 지혜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오랜만이에요. 호건선배! 정말 멋있어 졌어요.”
지혜의 말마따라 고급스런 정장과 고급스러운 롤렉스시계 몽블랑 안경테와 주름하나 없는 가죽가방까지. 호건의 모습은 깔끔하고 샤프한 사회인 남성의 표본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혜도 점점 이뻐지네. 스터디 이후엔 별로 보지 못해서 그런가? 더더욱이 이뻐지고 있어.”
지혜와 호건은 실제 같이 학교를 다닌 적이 없을 정도로 많은 나이차가 났다. 하지만 지혜가 속해있는 스터디그룹에 졸업자인 호건은 선후배간의 만남의 자리에서 몇 번이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요즘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는걸요.”
“아니야. 정말 지금 학교 다니는 남학생들은 행복하겠어. 나도 다시 다니고 싶을 정도인걸.”
아닌 말마따라 짧은 숏팬츠에 짝 달라 붙는 티셔츠. 헐렁한 셔츠로 가리긴 했지만 지혜의 몸매는 그저 공부만 하는 범생이라 불리기에 어패가 있었다. 더불어 비단결같이 흐르는 머릿결과 청순한 외모. 법대생이 아니라면 연예계에서 큰 바람을 일으켰을 것이 분명했다.
“그나저나 선배가 무슨 일이에요? 차를 다 마시자고 하고? 설마 뭐 고백 그런거 아니죠?”
지혜는 요즘 들어 완전히 괴로움을 떨쳐 내고 있었다. 매일 같이 만나는 시우와의 시간이 안도감을 주고 상처를 회복시켜 주고 있었다. 긴 방학시간동안 공부와 데이트만을 반복하면서 지혜는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서서히 잊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본래 그게 목적이 아니었는데. 하는 김에 고백도 해야겠어.”
“호호호. 사양할게요. 선배 요즘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거든요!”
“정말? 대체 누구야? 이 법무법인 옥수에 다니는 김호건이 눈에 차지 않을 정도의 남자라니!”
“옥수가 정말 대단하죠. 근데 그 사람은 뭐랄까? 좀 다른 세계의 사람 같은?”
“요고요고 나쁜남자한테 빠져서 정신 못 차리는 건 아니지?”
“에이. 선배 날 뭘로 보고!”
“그럼 힌트만이라도 줘봐 미래의 연적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인데.”
“음······ 연. 하! 헤헤헤!”
얼굴을 붉히며 몸을 베베꼬는 모습에 김호건의 입가에 왠지 모를 싸늘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래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하긴 뭐 별일도 아니지. 좋아 보여서 정말 다행이다.”
“네? 그나저나 선배 정말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이렇게 보자고 한건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런거 아니에요?”
지혜는 이상함을 느꼈지만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음 맞아.”
호건은 고급서류가방에서 두툼한 서류봉투를 꺼내어 그 안의 내용물을 지혜에게 내밀었다.
“이, 이건···.”
지혜는 종이를 보는 순간 심장이 철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온 몸의 피가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시우는 손에 쥔 작은 반지를 보았다.
어떻게 처리한 것인지. 완연한 흑색의 보석 안엔 떠오를 것 같은 기이한 문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흑석을 감싸고 있는 백색의 테두리는 아름답게 빛을 내비추고 있었다.
시우는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지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건너 하루 지혜와 매번 만났다.
지혜는 여리면서 강한 마음을 가졌다. 멍하면서도 똑 부러지는 성격을 가졌고, 순수한 아름다움과 섹시한 피지컬을 뽐냈지만, 자신의 외모에 어울릴 허영심은 가지지 않았다.
시우는 그런 그녀의 순수함과 자신을 생각해 주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그녀에게 끌리고 있었다. 이미 한 번에 인생을 살았던 그에게 사랑이란 한 낯 감정의 요동에 불과했지만, 그는 다시금 젊음을 되찾고, 정신이 신체에 융화되면서 그 나이 때 소년들이 가질만한 가슴의 간지럼을 가지게 되었다.
“너무 일찍 왔나?”
지혜는 오전에 이 근처에서 약속이 있다며 먼저 와있겠다고 하였다. 시우는 지혜를 찾아 볼까 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주변을 걸었다.
“야, 저기 저기 쟤 훈내가 나지 않니?”
“어디? 정말? 근데 왜 이마에 저런 상처가 있지?”
“그래도 어쩐지 상처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시우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주변을 걷던 여대생들과 소녀들은 자신들끼리 수군거리며 시우를 평가하였다. 물론 시우에게 그런건 티끌만큼도 관심 없는 대상이었지만,
“야. 쟤 시우가 아니야?”
“누구?”
“시우! 최시우있잖아. 조세형한테 맨날 두들겨 맞던.”
“아, 그 샌드백? 걔 맞아? 완전 다른 분위기 인거 같은데?”
거리를 걷던 두 소녀가 시선이 쏠리는 시우의 모습을 살피다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떳다. 과연 중곡고 최악의 왕따이자 걸어 다니는 샌드백인 시우의 모습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구부정했던 허리와 왜소한 체격 축 처졌었던 입매와 항시 불안하게 떨렸던 눈동자는 온데간데없고, 강한 기운을 사방으로 풀풀 풍기며 날카로운 눈매와 그것을 타고 내리는 콧날이 시우를 더욱 강하게 보이게 했다.
두 소녀는 장난감이라도 만난 것처럼 시우에게 달려갔다.
“야! 최시우!”
“너 최시우 맞지?! 대박!”
갑작스레 눈앞에 나타난 두 소녀의 등장에 시우가 눈을 꿈틀 거렸다.
“누구?”
시우는 알 수 없는 두 소녀의 정체에 대해 짤막하게 물었다.
“나야 나 소연이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잖아.”
“나도 기억 안나? 나 도연이! 난 심지어 너랑 같은 반이라고!”
“······.”
“대....박! 진짜 기억 안나나 보네. 야! 너 서운하다! 벌써 우리 다 잊어 버린 거야?”
“아무리 그래도 이름은 외우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근데 너 이마의 상처는 뭐야? 어쩌다 다친 거야?”
“······.”
시우는 갑자기 나타나 재잘거리며 떠드는 소연과 도연이와의 대화에서 서서히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두 소녀의 대화에선 시우에 대한 배려가 전혀 베어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만만히 보고 있다는 증거였다. 단 답으로 대충 대답을 하던 시우의 시야가 한순간 고정되었다.
“뭐야? 그럼 운동하다 그렇게 다친 거야? 대체 무슨 운동을 하기에? 왜? 너 괴롭히는 애들 때려 줄려고?”
“꺄하하. 야. 시우아 운동 하루 이틀 한다고 뭐 좀 달라지겠니? 차라리 전학을 가는 게 낫지 않아? 그나저나 이렇게 밖에서 보니까 확연히 다르다. 되게 멋있어. 호호.”
“그나저나 여기서 뭐해? 별 약속 없으면 오늘 우리랑 같이 놀래? 우리 쇼핑하고 이따 노래방 갈 거거든.”
소연이 시우의 팔을 잡고 흔들면서 앙탈을 부렸다. 과거 시우이었다면 그녀들의 이런 가식적인 호의라도 너무 좋아하면서 받았을 터였지만, 그는 이제 완전히 변해있었다.
“나 바쁘다. 니들끼리 가라.”
그렇게 일별하고, 시우는 성큼성큼 한 카페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뭐야? 쟤. 지금 우리 바람 맞친 거야?”
“참나. 운동 좀 하고 외모 좀 바뀌었다고 사람이 달라지나? 소연아 우리끼리 가자.”
“쳇. 학기만 시작되어 바라.”
국내 최대 법무법인 옥수는 정*재계를 통틀어 굴직굴직한 기업들을 대변해주고 있다.
청와대부터 시작하여 각 정부부처들의 재판 70% 이상을 담당하고 있으며 재계 10위권 안에 드는 기업 6군데의 담당로펌으로 실질적인 대한민국 최고이자 최대의 로펌이었다.
현 사법연수원 졸업인원중 상위 10%에 드는 이들이 현직을 거치지 않고 지원하는 곳이었고, 로스쿨 졸업자들이 가장 다니고 싶어 하는 로펌이었다.
그 로펌 안에서도 가장 퍼스트 클래스로 취급되는 변호사들이 프라이빗 클래스를 담당하는 자들이었다. 정*재계를 통틀어 손 하나로 대한민국을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을 담당하는 변호사들. 김호건 변호사는 자신이 그 클래스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언제나 자랑스러워했다.
프라이빗 클래스에 존재하는 자들은 평범한 이들과는 다른 자들이다.
이것이 김호건 변호사의 머릿속에 박힌 커다란 개념 중 하나였다.
그들은 저 거리를 오가는 단순노동밖에 할 수 없는 잉여인간들을 수십만 모아놓아도 바꿀 수 없는 이들이고, 나라의 자랑이며, 국가를 이끌어가는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은 수십만, 아니 수백만을 대표하는 만큼 그 취미나 취향도 독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끔은 그런 취향과 취미를 사회에서 인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이 눈 앞의 아가씨.
대학 초년생으로 삼진그룹의 후계자에게 흉한 일을 당할 뻔했다가 극적으로 구출 되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였지만, 김호건에겐 큰 감흥이 일지 않았다.
요즘 대학생들이 너도 나도 나서서 몸 팔고 다니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고, 세상의 인식도 점점 개방적이 되어 가는데. 이 아가씨는 윤간을 당한 것도 아니고, 미수에 그친 일로 삼진그룹의 회장님의 심경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동문회에서 몇 번 만나는 동안 꽤나 반반한 외모라 눈에 들어 왔지만, 가정형편이 어렵고 때문에 고등 학교때 과외 한번 받지 않고 대학교에 들어왔다는 것에 김이 새어 버렸다. 지금은 별로 큰 감흥이 없다.
법대를 다니는 덕택에 법체계에 밝아 다른 이들이라면 쉽사리 하지 못할 제재들로 회장님과 그의 아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삼진그룹 자체의 힘이라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무마 시킬 수도 있었지만, 요즘 세상에 대외 이미지라는 것이 그렇던가, 행여라도 이야기가 새어 나간다면 삼진그룹은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다.
프라이빗 클럽 팀장이 맨 처음 이 이야기를 했을 때. 김호건은 직감했다. 자신이 날개를 펼 수 있을 때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피해자는 몇 번이나 동문회를 통해 만남이 있었고,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20살이었다. 가정형편이 어렵다고 이미 알고 있었으니 쉽사리 나설 수 있었다.
분명 이 일을 빌미로 돈이나 좀 뜯어 내보려는 약아빠진 가난한 계집의 머릿속은 보지 않아도 훤했다.
두 손을 꽉 쥔 체 부들부들 떠는 것 하며, 두 눈 가득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글썽거리는 것 하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풋내기의 냄새가 폴폴 풍길 지경이었다.
‘변호사 하기는 힘들겠군.’
“자 그럼 합의 과정을 진행하도록 할?”
이젠 눈물마저 뚝뚝 흘리는 지혜를 보며 김호건은 비웃음을 날렸다.
“선배. 어떻게 이래요.”
“지혜야. 무슨 소리야. 이게 다 널 위해 선데.”
“선배! 그 자들은···. 그 자들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그 말에 지혜는 가슴이 쓰렸다.
“지혜야. 네가 무슨 말 하고 싶어 하는 지 알아. 아는데. 이제 그만 하자. 네가 바라는 것. 회장님이 다 준비 해주셨고, 너도 만족할거야.”
“제가 뭘 바라는 데요! 대체 뭘요!”
목소리가 좀 컸던가? 카페 안에 시선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지혜야. 이러면 너만 힘들어져. 나도 알아. 이번 기회를 통해 돈 좀 만져볼 생각인거잖아? 너희 부모님 요즘 사업도 안 좋다면서. 그래 네 맘 다 이해해. 그러니까. 뭐 억울하네 뭐하네. 그런 말? 할 필요 없어. 이 선배도 잘 아니까.”
“···그런···거. 아니···야.”
“응? 뭐라고?”
“우리 부모님··· 자식 팔아 좋은 옷 입고 좋은 음식 입으실 뿐 아니야. 언제나 정직하게 살아 오셨고, 법 없이도 사실 수 있는 분들이야. 근데. 네가 뭔데··· 우리 부모님을···.”
김호건의 관자놀이가 두툼하게 부풀어 올랐다. 이미 그의 목소리도 딱딱하기 이를 대 없었다.
“야! 지금 선배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어디 거지 같은 게. 하늘같은 선배 앞에서 말이야.”
차갑고 딱딱한 음성. 싸늘한 눈초리 지혜는 세상에 홀로 남겨져 있는 것 같았다.
“임마. 선배가 알아듣게 말했으면 네 알았습니다. 해야지. 어디 같 잖은게 그거 좀 건드렸다고 지랄지랄 난리를 치고 있어. 왜? 니 부모가 어차피 이래 된 거 돈 좀 많이 뜯어 오라하디? 그래서 이렇게 합의 안할 것처럼 질질 끄는 거야?”
“···!!”
지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테이블에 놓인 물 잔을 잡아챘다.
쾅!
‘쾅?’
물 잔을 잡아 챈 거 치곤 소리가 너무 컸다. 그리고 카페의 모든 이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우야!”
커다란 소음의 주인공은 바로 시우이었다. 방금 전 카페 밖에서 지혜의 눈물 가득한 눈동자를 보고 지체하지 않고 손을 썼던 것이다.
시우가 차가운 눈동자로 호건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너 뭐냐?”
< 11 > 끝
ⓒ 진(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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