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54 회: 라스트 데드(The Last Dead) - 시즌3 (ZER-0) -- >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저들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이미 건넜어요."
"......"
다우 회장이 씁쓸하게 중얼거리자 모두가 긴 침묵에 빠졌다.
"정말 신이 우릴 버린게 아닐까요?"
브리튼 교수가 메마른 목소리를 내뱉자 모두가 그를 쳐다보았다.
"힘 빠지는 소리 하지마. 브리튼. 당신까지 왜 이래?"
예선이 면박을 주었지만, 브리튼 교수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난 50여년 가까이 인류에게 희망이 있었나요? 전쟁과 시크릿-X로부터 엄청난 희생을 당해야만 했죠. 아니, 어쩌면 애시당초 이 지구에 인간이 있다는 자체가 큰 재앙일지도 몰라요."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일은 맞지만, 지구가 인간을 버린건 아니야."
"아뇨."
브리튼 교수가 단호하게 맞받아치자, 예선은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가 이토록 절망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브리튼은 '긍정론자'에 가까운 인물이기 때문에 예선이 더욱 깊이 신뢰했다.
하지만 오늘 모습은 정말로 뜻 밖이었다.
"인간은 끊임없이 비밀만을 만들어내는 종족이었어요. 이유는 간단해요. 무언가를 파괴하기 위해 말이죠. 자연이든, 문명이든, 그 뭐든지 간에 인간의 욕심을 위해 무언가를 파괴하는게 우리 인간의 본성이에요."
"그만해, 브리튼. 지금 상황에서 도움이 되는 말이 아냐."
예선은 엄중하게 경고했지만 브리튼은 입술을 다물지 않았다.
"아뇨. 전 계속 해야겠어요."
"하지마!"
예선이 드디어 폭발하자 다우 회장이 슬쩍 앞으로 나섰다.
"입을 막는다고 해서 생각이 똑같을순 없습니다. 일단 교수님 말을 들어보시지요."
"지금 상황에서 도움이 되지 않을뿐입니다."
"밑바닥을 사정없이 드러내야 해결책을 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헛된 희망은 모조리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할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예선이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으로 되물었지만 다우 회장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미래를 생각해 보자는 뜻입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말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지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네요. 전 여기서 탁상공론 하느니, 나가서 저 감염된 인어 들이나 해부할래요."
"위험합니다."
"아뇨."
이번에는 예선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여기서 백날 탁상공론을 펼치느니, 뭔가 도움이 될만한 일 들을 해야죠. 설화 언니라면 당장 그랬을거에요. 그리고 브리튼."
"예....."
브리튼이 떨리는 눈빛으로 예선을 쳐다보았다.
"당신 앞으로 내 눈앞에 나타나지마. 그 빌어먹을 생각 고쳐먹지 전까지는."
"......"
예선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자, 브리튼 교수는 창가에 등을 기대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속상하신가요?"
다우 회장이 긴 연기를 내뿜는 브리튼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제 감정도 알 수가 없어요. 그냥 인간으로 태어난게 너무나 싫을 뿐입니다."
"그게 바로 패닉 상태입니다. 물론 당신 말이 틀린건 하나도 없어요. 지금 상황에서 희망이 있다고 떠든다면 오히려 현실감이 없는 인간이겠죠."
"당신도 이제 인류가 끝이라고 생각하나요?"
브리튼이 묻자 다우 회장은 창문을 붉게 물들이는 화염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끝은 없습니다. 모든 인류가 사라지기 전에는요."
"인류는 사라질겁니다."
"아뇨.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설화님 일행이 한국에서 스위스로 왔을때만 하더라도 전세계 인구수는 불과 200만에 불과했지만, 유럽 확장 전투에서 생존자 들의 터전을 마련하고 지킨 결과 인류는 1000만의 숫자를 기록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불과 몇년만에 유럽은 다시 생지옥으로 변해버렸죠. 그리고 마지막 희망이라고 믿던 이 맨허튼마저 위기이구요."
브리튼은 다시 담배를 꺼내 물고 말을 이었다.
"인간은 한번 절망을 겪고 일어서도, 더 큰 시련이 닥치면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물론 어디선가 또다른 생존자 들이 자신들만의 집단을 이루고 살지는 모르겠지만, 5만의 생존자 들이 있는 대도시는 맨허튼이 전부죠. 회장님 말씀대로 인류가 끝까지 살아남을지 모르지만, 문명은 여기서 끝입니다."
"저 역시 그부분에 있어서는 동의합니다. 맨허튼은 제네럴 컴퍼니 본사가 있는곳이기도 하지만, 51구역을 어떻게든 무너뜨려서 인류 멸망의 불씨를 없애려는 전초기지의 개념이 크기 때문이죠. 이곳이 무너지면 지구의 역사는 180도 바뀌게 될 겁니다. 마치 공룡이 멸종하고 인간이 번성하듯 말이죠."
"그럼 이야기는 끝난게 아닙니까?"
"아니죠."
다우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이 맨허튼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51구역은 어떻게든 파괴시킬 겁니다. 이건 최악의 상황이 확실하지만, 저는 이 상황까지 예측했습니다. 저들이 강해지고 있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거든요."
"정보통이 확실하신 모양이군요."
"예. 저희가 보유하고 있는 첩보 위성을 최대한 활용해서 S.B.I.C의 본거지를 찾는데 주력했죠."
"본거지는 찾으셨나요?"
"예. 끊질기게 노력한 결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어디입니까? 그 본진이?"
브리튼 교수가 이상하리만큼 눈을 희번덕거리며 물었지만, 하필 그 순간 잠시 전기가 끊긴 바람에 모두가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한가지 약속하십시오. 저도 모든것을 밝힐테니 희망을 가지겠다고 말입니다."
"......"
브리튼 교수는 한참 생각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저도 희망을 가져보겠습니다."
"좋습니다."
다우 회장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