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83 회: 라스트 데드(The Last Dead) - 시즌3 (ZER-0) -- >
"크아!"
설화는 독한 위스키를 병째 들이키며 쓴 입김을 내뱉었다.
그녀는 초와 함께 부엌에 앉아 몇 시간째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언니, 그만 좀 마셔!"
보다 못한 초가 손을 뻗어 위스키를 뺏으려고 했지만 설화가 탁 뿌리쳤다.
"야! 너네 아카데미 놈들은 뭐가 그렇게 잘났냐?"
"언니. 그렇게 조급하게 생각하지말고 차근차근 해보자."
"차근 차근?"
초가 차분하게 설득했지만 설화는 오히려 그녀를 비웃었다.
"지금 내 속이 어떤줄 알아? 새까맣게 타 들어가고 있어. 연합군 놈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이 마당에 내가 어떻게 넋을 놓고 있겠어?"
"그래도 그게 언니가 굳이 나설 일도 아니었잖아."
"아니!"
설화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안 나서면 누가 이걸 하겠어? 내가 생존자 들을 위해 뭔가를 하지 않으면 죽어서 어떻게 승철이 얼굴을 보겠냐고!"
"....."
이승철 이야기에 초의 얼굴이 흐려졌지만 이미 취한 설화는 그것마저 안중이 없었다.
"절대로 여기서 멈추면 안돼.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언니. 그런 소리 하지마. 그럼 스탠은 누가 돌봐줘...."
"스탠? 내가 스탠 엄마였나?"
설화가 쓰게 웃으며 위스키를 들이키자 초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언니가 신생아때부터 키웠으니까 스탠은 언니 아들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야."
"고맙다. 그렇게 생각해줘서."
말은 그렇게 해도 설화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네가 브라운 박사 연구를 이어 받겠다고 했을때 난 솔직히 네가 참 원망스러웠다."
"왜?"
"승철이 유지(遺志)를 이어 받는건 나 혼자면 족한데... 너까지 끼어들었으니까. 그래서 네가 스탠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잖아. 이렇게 가슴 아픈것까지 숨겨 가면서 말이야..."
"....."
그건 사실이었다.
스탠은 이승철과 신예선, 즉 초의 친아들이었다.
하지만 초는 이름까지 바꿔가며 아카데미 초대 소장이 되었고, 아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가슴이 찢어지는 생 이별을 강행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승철의 희생이 그냥 희생이 아니라는것을 증명하기 위해 설화와 초는 앞만보고 달렸었
다.
"언니. 그게 우리 운명이잖아. 우리가 후세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물려주지 못했으니까 지금이라도 노력해야 한다고...."
"쳇! 그 놈의 대의 명분."
설화는 차갑게 냉소를 내뿜었다.
"아름다운 지구를 후세에게 남겨 인류의 숭고한 뜻을 이어간다.... 염병하고 자빠졌네. 지 같은 놈 들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놨으면서 말만 번지르하게 하면 뭐 누가 좋아할 줄 알아?"
"....."
초는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실 자신도 무엇을 위해 아카데미를 세우고 약물을 개발한건지 혼란스러웠다.
아카데미생 들은 그저 USN과 연합군의 일원이 되기 위해 눈에 불을 켤 뿐, 더 이상 생존자 들을 위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결국 숭고한 의지는 사라지고 돈과 명예를 ㅤㅉㅗㅈ는 인간의 본능을 쉽게 저버리지 못한 것이다.
"그래. 인간에게 더 이상 희망을 가져서는 안돼. 아스카디아 놈들이 지구를 침략한 것도 어쩌면 잘 된 일일지도 몰라. 인간은 쓰게 당하고 엎어져 봐야 비로서 소중함을 느끼는 어리석은 것들이니까."
"맞아."
초가 고개를 끄덕이자 설화가 살짝 놀라며 쳐다보았다.
"나도 다 때려치고 여행이나 다닐까봐. 요즘 USN과 연합군 놈들이 어처구니 없는 부탁을 해대니까 미쳐버리겠다고."
"무슨 부탁?"
"지금 아카데미생 들 실력으로는 더 이상 힘들대. 더 뛰어난 아카데미생 들을 만들어 달래."
'만들어 달라'는 초의 말에 설화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아니, 무슨 사람이 공장에서 찍어대는 기계야? 하여튼 밥맛 떨어지는 놈들이라니까!"
"언니."
"왜?"
"나도 언니 일에 끼어주면 안돼?"
"....."
당연히 안되는 소리인대도 초가 그런 부탁을 하는 자체가 어이가 없었는지 설화는 입만 벌리고 있었다.
"알아. 나도 말도 안 된다는 소리 라는 거. 하지만 아카데미에 있는게 너무 힘들어. 내가 하는 일도 너무 실망스럽고..... 실은 이 저택에 있는 아이 들은 내가 만든거나 다름없어."
"그건 또 뭔 소리야?"
설화는 술이 확 깨는것 같았다.
초는 그만큼 충격적인 소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연합군이 하도 닥달해서 신체 능력을 더 끌어올리는 약물을 개발했었거든. 그런데 이게 부작용이 심할 수도 있어서 고아원에서 특수한 아이 들을 선별해서 실험을 했었어."
"그런데?"
"그 중 몇명은 약물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고 끝까지 살아남는 애들이 이 아이들이야."
"....."
설화는 기가 막히고 너무 화가나서 다시 위스키를 벌컥거렸다.
하지만 초는 양심고백을 하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곳에 있는 아이 들은 연합군이 원하는 능력을 쓸 수 있는 아이 들이야. 그런데 막상 연합군 놈들에게 넘겨주기 싫더라고. 왠지 노예처럼 부려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잘했어.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니까."
"그런데 저 애들은 연합군에 가길 원한다? 왜지? 왜일까?"
"......"
대의명분은 사라지고 돈, 명예를 ㅤㅉㅗㅈ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본능 때문이니까.
라고 설화는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독한 위스키를 마시고 나서 내뿜는 입김으로 그 차가운 말을 대신했다.
-바스락!
갑자기 인기척이 들리자 설화와 초는 약속이라도 한듯 조용해졌다.
"거기 누구야?"
"....."
대답이 없자 설화가 주먹을 꽉 쥐었다.
"쥐새끼같이 숨어있지 말고 나와. 뭉게 버리기 전에."
"쳇!"
누군가 부엌으로 쓰윽 들어왔다.
"너는...."
초가 놀란 표정으로 방금 부엌에 들어온 사람을 손으로 가리켰다.
설화 역시 뜻 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너 아까 사무엘 방에서..."
"맞아요. 소피아에요."
소피아는 차갑게 대꾸하며 초 옆에 앉았다.
"그런데 왜 우리 이야기 엿듣고 있었냐? 아까 내가 말할 때는 콧방귀도 안 뀌더만."
설화가 냉정하게 물었다.
확실히 표정에서 아까 그 서운함이 묻어있었다.
하지만 소피아는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입을 열었다.
"할 말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