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75 회: 라스트 데드(The Last Dead) - 시즌3 (ZER-0) -- >
한편 하원 의원직에서 물러난 비슬리씨는 서재에 틀여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그의 아내가 새 차를 구입하면서 밖으로 나가길 유도 했으나, 그럴수록 비슬리씨는 더욱 움츠러들 뿐이였다.
그렇게 아내마저 남편을 포기한 시간이 벌써 2주일이었다.
그동안 비슬리씨 머릿속에는 온통 '어째서?'라는 의문만 맴돌았다.
'어째서 상원과 원로회가 강압적으로 하원과 시민대표의 의견을 묵살하는 거지?'
그러나 답은 뚜렷하게 나오지 않았다.
동양인 들 말대로 '생각이 많을수록 머리만 흐려질 뿐'이었다.
"상원의원 들을 만나봐야겠어!"
결국 비슬리씨는 그렇게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당장 화장실로 뛰어가서 수염도 밀고 깨끗하게 머리도 뒤로 넘겼다.
온갖 격식을 차리는걸 좋아하는 상원 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비슬리씨는 차를 몰고 런던 의사당으로 향했다.
우중충한 런던의 날씨는 안 그래도 심란한 비슬리씨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었으나, 비교적 활기가 넘치는 거리의 사람 들로 위안을 삼았다.
이 사람 들은 과연 연합군이 핵폭탄을 썼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온갖 통신 매체를 검열하면서 자신 들의 눈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이 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해!'
비슬리씨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이 세계는 유토피아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크게 뒤집히고 나서 다시 재정립된 세상은 분명했다.
다시 새롭게 시작된 세상에서 생존자 들은 정치, 경제, 문화등 예전의 방식을 탈피해야만 새로운 역사를 쓸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생존자 들이 가장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게 바로 정치였다.
유럽의 정치는 대부분 선진 정치였으나 암묵적인 비리가 분명 존재했었고, 동북 아시아권 정치는 비리가 판을 치면서 보여 주기식 정책만 펼쳤었다.
그런 썩어빠진 정치 논리 때문에 시크릿-X 바이러스를 숨기기 급급했고 결국 인류가 희생당한 것이다.
즉, 과거의 정치는 국민 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한 사회적 장치일 뿐이었다.
새롭게 정비된 세상은 변화를 넘어선 혁명 수준의 개혁을 원했고, 더 이상 과거의 정치를 따라가서는 희망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냈던게 시민대표와 원로회였다.
정치제도를 모두가 참여하는 '스위스식' 국민참여 정치로 바꾼셈이다.
다만 상, 하원 제도는 과거의 '양원제'를 본따기로 했다.
그들이 정한 시스템은 간단했다.
우선 시민 대표는 명망이 높거나 학식이 뛰어난 자, 또는 그들의 대리인을 자격으로 발탁이 될 수가 있었다.
물론 상, 하원이나 원로회보다 발언권이 다소 약할 수 있으나, 일주일에 한번씩 열리는 시민단체회의를 통해 제도적 장치를 추가하거나 수정을 하도록 건의할 수가 있었다.
이 들은 한달에 3번씩 열리는 하원 의회에서 안건을 제출하고 예산안 산정을 하원과 협의한다.
그럼 하원은 상원 의회에 참석해 시민대표와 함께 산정한 안건을 최종 산출한다.
어떻게보면 위로 올라갈수록 권력의 힘이 '역 피라미드'방식으로 가는것 같지만, 원로회, 상원, 하원이 마음대로 행정이나 제도를 고치거나생성할 수 있는 제도는 아니었다.
결국 시민 대표에 의해 생존자 들의 법이 결정되는 것이다.
물론 원로회와 상원의 최종 결정을 통해 시민 대표가 제안한 안건이 통과나 반려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제도의 시행과 재정의 시작이 시민 대표에서 출발하는점은 분명 과거의 정치와 180도 다른것이었다.
즉, 정치의 주체가 대통령이나 최고통수권자가 아닌 시민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시민 들이 결정할 수 없는 한가지가 있었다.
바로 '군(軍)'에 관한 모든 사항이었다.
'군'에 대한 모든 사항은 USN과 연합군, 그리고 육, 해군이 책임지고 있었다.
단, 전쟁을 일으키거나 영토 확장, 핵사용은 상, 하원과 원로회, 시민 대표와 협의를 해야 움직일 수 있는 사항이었다.
아무래도 생존자 들에게 '군'은 질서유지와 영토(생존권) 확장이 걸린 문제이다보니, 군에 대해 잘 모르는 민간인 들이 섣불리 이래라 저래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지금같은 상황에서 인류에게 '영토 확장'과 '감염자로부터 방위'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라, USN과 연합군의 힘이 자연스레 커질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20년간 한번도 재기되지 않았던 핵사용 문제가 느닷없이 안건으로 나온것이다.
게다가 핵사용 문제가 하원과 시민 대표 의견을 깡그리 무시하고 발칸반도 3국가에 핵사용을 허용한 것이다.
더욱이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알바니아 지역에 벌써 핵이 떨어졌다는 말도 나돌고 있었다.
그건 충분히 신빙성이 있는 소문이었다.
자신과 친밀했던 설화 중장이 바로 알바니아 전선에 나가있었다.
그런데 얼마지나지 않아 파리로 소환을 당하고 느닷없이 옷을 벗었다.
그녀는 '나이가 있고 전선을 확장하지 못했던 책임'이 있었다고 말했지만, 그건 누가 듣더라도 둘러댄다는 모양새였다.
특히 설화의 심성을 잘 아는 비슬리씨가 그것을 못 알아차릴 일도 없었다.
'귀신같은 언론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니.... 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야.'
비슬씨는 런던 의사당 건물 도로변에 차를 주차했다.
런던 의사당 공용 주차장은 인적이 드문곳에 위치하고 있어 사람들 눈에 쉽게 띄는 곳이 아니었다.
만일 하나의 상황을 대비한 셈이었다.
어찌되었건 비슬리씨는 비장한 표정으로 보안 게이트에 다가갔다.
경비원 들은 그를 한눈에 알아봤지만, 이미 하원직에서 물러난터라 약간의 경계의 눈빛을 풀지 않았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비슬리씨?"
"자네는 적응을 잘 하는 타입이군, 도일."
"예?"
우람한 체구에 험악한 인상을 쓰고 있는 남자는 런던 의사당 경비 책임자 도일이었다.
그는 팔각모 속의 찡그린 미간을 드러내며 되물었다.
"내가 하원직을 그만뒀다고 벌써 외부인 취급을 하는 건가?"
"그렇다고 비슬리씨가 런던 의사당을 함부러 들락날락 할 만큼 자격이 있는것도 아니죠."
도일이 딱딱한 표정으로 비슬리씨를 내려다 보았다.
비슬리씨는 등 뒤로 약간의 식은땀을 흘렸지만 내색하지 않고 입꼬리를 올렸다.
"자네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하원직을 스스로 그만두면 일주일간 심사 기간이 있네."
"저는 들은바 없습니다."
도일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약간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그럼 자네를 출입 보안법 미숙지 사유로 견책해야겠구만."
"비슬리씨. 저는 이미 상부로부터 당신을 출입 금지 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당신은 런던 의사당 정문도 출입할 수 없습니다."
"누가 그런 말도 안되는 명령을 내리는 거야?!"
"내가 지시했네. 비슬리."
누군가 등 뒤에서 알려주자, 비슬리씨가 홱 돌아보았다.
"제임스 의원....."
비슬리씨는 한 눈에 그를 알아보고 쓰디쓴 표정으로 말 끝을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