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71 회: 라스트 데드(The Last Dead) - 시즌3 (ZER-0) -- >
"뭐?! 내일 여행 가자고?!"
스탠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설화가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막았다.
"아오~ 기차 화통 삶아먹었냐?"
"엄마 지금 제정신이야? 아니, 지금 같은 때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
예상대로 스탠은 광분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설화는 속으로 충분히 그럴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막상 이 고지식한 애늙은이의 잔소리가 두려운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스탠은 반드시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했다.
그리고 사실을 감춰야만 했다.
"우리 여행 안 간지 꽤 됐잖아."
"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 엄마가 편한 상태는 아니잖아."
스탠이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설화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나 완전 편해."
"엄마."
"야. 365일 총들고 싸우는 게 얼마나 지겨운 줄 알아?"
"엄마."
"나도 이제 좀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내가 무슨 전쟁 기계도 아니고..... 이제 좀 평범하게 살면서 즐기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남의 눈치 볼 필요 없다니까?"
"이봐요?"
"그냥 간단히 다녀오겠다는 거야. 머리도 식힐겸...."
"엄마! 제발 좀 정신 차려!"
스탠이 정말로 화가난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자 설화가 움찔거렸다.
"그래. 엄마 말대로 남의 눈치를 보고 살 필요는 없어. 어차피 엄마 인생이니까! 하지만 엄마 부하 들이 억울하게 죽었잖아. 아니, 부하이기 전에 전우였다고."
"......"
'전우'란 말에 설화는 마음 한구석이 시른듯 아팠지만 꾹 참고 내색하지 않았다.
"엄마 마음이 정말 편해?"
"....."
"거 봐. 엄마 지금...."
"맞아."
스탠이 그것 보라는듯 대답했지만 설화가 말을 가로 막았다.
"마음 편해. 그리고 군인은 전쟁터에서 죽으면 명예로운 거야."
"....."
말문이 막혀버린 스탠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설화는 아까와 달리 굳은 표정으로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 들에게 해줄 수 있는거라고는 밤마다 잠을 설쳐가며 괴로워 하는것 뿐이야. 그러니까 잠들기 전만 빼고 엄마 좀 편하게 있자."
"......."
생각해보니 엄마가 죽상을 쓰면서 힘없이 돌아 다니는 것도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다만 다른 사람 들의 입으로 엄마가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뿐이었다.
"알았어. 대신 '나 완전 신나요.'라는 표정은 짓지마."
스탠은 하는 수없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마지못해 허락했다.
설화와 스탠의 행선지는 포르투갈 리스본이었다.
런던에서 이지젯(Easyzet : 런던에서 리스본까지 가는 저가 항공기)을 타고 3시간 남짓 이동해야 했다.
다행히 날씨가 화창해서 리스본의 고풍스러운 건물 들이 파란 하늘 아래 펼쳐졌다.
하얀 벽돌 위에 쌓여진 붉은 기와 들이 꼭 태양의 열기 때문에 달궈진 듯 보였지만, 왠지 그 안에 있는 사람 들은 여유가 느껴질 정도로 한적했다.
그러나 리스본 중심에서 약 30km 정도 떨어진 지역은 흉물스러운 철근 들과 잿더미 들이 쌓여있어 씁쓸한 풍경을 자아내었다.
20년 전.
그것은 스위스로부터 시작된 생존자 들의 치열한 전투로 얻어진 결과였다.
그래서 루시우 광장에는 훌륭한 왕과 장군 들의 동상 들 사이로 설화 동상도 서있었다.
포르투갈인 들이 자신의 조국을 찾아준 은인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설화 모자(母子)가 게이트를 빠져 나오자 마자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인사 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엄마가 우리 온다고 말했어?"
"아니, 전혀."
설화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속으로 누가 이런짓을 했는지 짐작을 했다.
'역시 그 쓸데없는 오지랖은 여전하구만.'
설화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걸음을 멈췄다.
"어서오십시오. 장군님."
누군가 설화에게 꽃다발을 내밀면서 환하게 웃었다.
설화가 고개를 드니 훤칠한 키에 하얗게 샌 머리카락이 매력적인 '엘데르' 총통이었다.
그는 포르투갈 생존자를 대표하면서 조국의 재건에 열의를 불태우는 사람이었다.
"총통 각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리라는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 그 분께서 미리 귀띔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건장한 청년은...."
엘데르 총통이 스탠을 신기한듯 쳐다보자 설화가 빙긋 웃었다.
"제 아들입니다."
"오, 그 말로만 듣던 장군님 아들이었군요. 역시 장군님을 닮아서 그런지 훤칠하니 잘생겼습니다. 제 딸을 소개해주고 싶군요."
엘데르 총통은 사람 좋은 얼굴로 스탠에게 손을 내밀었다.
"난 마누엘 시저 엘데르 히카루드라고하네. 앞서 들었듯이 포르투갈 총통이네만 꼭 형식에만 얽매이는 사람은 아니니 편하게 엘데르씨라고 부르게."
"아, 예.... 엘데르....씨."
스탠은 어정쩡하게 악수를 하자 엘데르 총통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런데 아들하고 같이 오시다니... 지금 발칸반도 전선에 나가 계시는게 아니었습니까?"
"아, 그게...."
설화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가 이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소문을 못 들으셨나 보군요.... 저 장군 짤렸습니다."
"예? 그게 사실입니까?"
엘데르 총통뿐만 아니라 모두가 놀라 설화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설화는 이제 덤덤한 표정이었다.
"예. 아무래도 발칸반도 전선을 늘려가지 못하고 지지부진 시간을 끄니까 상부에서도 무능하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20년 동안 전장에서 잔뼈가 굵으신 분을.... 도저히 납득을 못하겠군요."
엘데르 총통은 정말로 화가 난 표정으로 씩씩거렸지만 설화는 억지로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제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느꼈습니다. 이제 피가 끓는 후배들에게 바톤을 넘겨야죠."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너무 하는 군요."
엘데르 총통은 긴 한숨을 내쉬다가 이내 표정을 고치고 환하게 웃었다.
포르투갈의 영웅을 더 이상 마음 불편하게 둘 수 없었다.
"아무튼 포르투갈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여기 계시는 동안 저희가 편하게 모시겠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조용히 아들과 여행을 즐기고 싶습니다."
"저희 성의를 무시하지 마세요. 거의 10년 만에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엘데르 총통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설화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엘데르 각하의 성의는 항상 분에 넘칠 정도로 고마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아들 놈이 워낙 격에 얽매이는 걸 싫어해서요."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엘데르 총통은 정말로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시다가 이내 표정을 고쳤다.
"그러시다면 다시 런던으로 가시기 전에 저희 집을 꼭 방문에 주십시오. 식사는 꼭 대접하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런던으로 가기 전에 반드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설화가 혼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엘데르 총통은 그제서야 마음이 놓인듯 길을 열어주었다.
"오랜만에 노란 트램(노면 전차 : 리스본은 노란색으로 칠한 노면 전차가 꽤 유명하다.) 도 타고 싶군요. 아직 운행 하지요?"
"그럼요. 노란 트램은 저희 리스본의 상징이 아니겠습니까."
엘데르 총통이 자부심 어린 얼굴로 대답하자 설화는 빙긋 웃었다.
"그럼 저희는 포르투갈 여행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러시지요."
엘데르 총통과 그 일행이 길을 열어주자 설화와 스탠이 머쓱한 표정으로 공항을 빠져나왔다.
"에휴. 겨우 빠져나왔네....."
스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어쩐지 설화는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윽. 저 행동은....'
그 바람에 스탠이 움찔했다.
설화는 평소에 화를 내는 성격이 아니지만, 한번 화가 나면 좀처럼 풀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두고보자. 깡통머리!"
"엥? 뭐라고?"
스탠이 깜짝 놀라며 물었지만 설화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엄마! 같이가!"
리스본이 초행인 스탠이 설화의 등 뒤에 바짝 붙어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