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3 회: 라스트 데드(The Last Dead) - 외전2 (그녀의 기억) -- >
"요즘 USN과 연합군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어요."
"그 들에게서 뭔가 실망을 하신것 같군요."
"예. 100% 실망을 했거든요."
"흐음... 그렇군요."
비슬리씨가 고개를 끄덕이자 설화는 그동안 쌓아왔던 불만을 터뜨렸다.
"솔직히 우리 생존자 들이 예전처럼 체계가 세워지기를 바랬나요? 그저 세계를 다시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싸웠을 뿐이었어요. 솔직히 우리가 싸움의 본질을 잃어버린게 아닌가 싶네요. 아직도 S.B.I.C는 그 정체를 숨기고 있고, 51구역에 있을지 모르는 외계인 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정치 한다는 인간 들은 자기들 철밥통만 지키려고 할 뿐이잖아요."
"......"
비슬리씨 표정이 썩 굳어지자 설화는 그때서야 말 실수를 한것을 깨달았다.
비슬리씨는 설화가 말하는 그 정치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10여년간 의회 하원 의원이었다.
"죄송해요.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아닙니다. 요즘 우리 정책이 실망스러운 부분이 많은건 사실이죠. 인정합니다."
비슬리씨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장군님. 장군님이 싸우는 이유는 본인도 잘 아시질 않습니까?"
"그래요. 그래서 문제이지요. 어떡해야 생존자 들의 터전을 더 넓혀갈 수 있을지..... 그보다 더 나아가서 이 세계를 감염시킨 바이러스를 없애고 감염자 들을 다시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을지.... 온통 머릿속에 이러한 생각 들 뿐이죠."
"그럼 정치 때문에 못 싸울 이유는 굳이 없겠군요."
비슬리씨의 덤덤한 대답에 설화는 두 손을 들었다.
"정말 비슬리씨를 이길 수 없네요."
"하하. 아닙니다. 저도 사실 제가 정치를 하면서도 정치가 신물이 납니다. 오죽했으면 다 때려치우고 웰링턴 (영국의 작은 시골 마을)에 내려가 조용히 살고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비슬리씨도 뭔가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나요?"
"예. 저는 장군님보다 더 추악한 꼴을 봐야 하니까요. 생존자 들을 위한 작은 정책도 몇몇 상원 의원 들 때문에 언성을 높여야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아무래도 정치를 하게 되면 공익보다 자신의 이익이 먼저다 보니 말이죠."
"제가 옆에 있었다면 뒷통수를 날렸을건데요."
설화가 허공에 주먹을 날리자 비슬리씨가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 제가 언젠가 유명한 작가의 회고록을 본적이 있는데, 그 나라 대통령은 국민의 혈세로 만든 공항과 주요 공기업을 모두 팔아 이익을 보려고 했다더군요."
"어떤 나라 대통령이 그랬던가요?"
설화가 궁금하 표정으로 묻자 비슬리씨는 턱을 괴었다.
"으음.... 정확히 기억은 나질않지만.... 아주 추악한 인물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 심지어 이런일도 있었죠."
"어떤 일이요?"
"전직 대통령이 퇴임 후에도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정치인에게 제일 치명적인것을 건들여서 결국 죽음에 몰아넣었다고 하더군요. 저도 그 부분을 읽고 정말 그 시대에 있을수 있는 일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그 자리에 있다 보면 그렇게 되는가....하고 말입니다."
"정말 치가 떨리네요."
설화가 고개를 절래절래 젓자 비슬리씨는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레몬 홍차군요. 그것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라임향까지 곁들여서 말입니다."
"아무리 정신없어도 10년지기 친구의 취향 정도는 알아야 하니까요."
"허허허."
설화와 비슬리씨는 어두운 이야기를 거두고 서로 편안하게 웃었다.
"장군님. 아니, 설화씨."
"어머? 저를 그렇게 부르시는건 처음인데요? 항상 저를 부르실 때 부대장님. 사단장님. 이렇게만 들었던것 같은데."
설화가 깜짝 놀라자 비슬리씨는 빙긋 웃었다.
"늘 저는 설화씨와 편하게 지내고 싶습니다. 아, 물론 이웃이자 친구로서 말입니다. 제 와이프 두 눈은 섬광이 일어날 정도로 시퍼렇거든요."
"크큭. 농담이 느셨네요."
"후후. 사회 생활을 하는 사람은 유머가 필수이지요. 아무튼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그런가요?"
설화는 씁쓸한 미소로 답했다.
지금 심리 상태로서는 아무리 비슬리씨라도 자신을 설득하기 힘들것 같았다.
"당신은 당신 자리에서 생존자 들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저도 사실 당신과 같은 고민으로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자신의 줏대를 꿋꿋이 세우고 살아가기란 정말 어려운 세상이니까요."
"그럼 비슬리씨는 어떻게 그것을 이겨내셨나요? 방법이 있나요?"
비슬리씨는 차를 다시 음미한 후, 조용히 입을 떼었다.
"방법은 없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제 자신을 받아들일 뿐이었습니다."
"예?"
설화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딱 잘라 말하는 비슬리씨의 얼굴을 응시했다.
"대의라던지, 무엇을 또는 누군가를 위해라던지..... 그 아무것도 자신의 신념을 빗대지 말라는 뜻입니다. 항상 자신의 신념은 그 무엇보다 제일 위에 있어야 합니다. 신념없이 대의를 논하는것 자체가 대중 들을 기만하는 겁니다."
"어렵네요... 그 신념이라는 게."
설화는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신념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신념은 자기 자신한테 솔직해야 보이는 겁니다."
"그럼 비슬리씨의 신념은 뭔가요?"
비슬리씨는 매우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오래 살지 말자입니다."
"예?"
"말 그대로 목숨에 연연하지 말자는 겁니다."
"그런 결심은 저같은 군인에게 어울릴것 같은데요?"
설화가 희미한 미소를 짓자 비슬리씨는 빙긋 웃었다.
"흔히 말해 정치 생명이라고 하죠? 정치는 모든 인간사의 축소판과 다름없습니다. 인간의 욕망, 갈망, 음모, 반전 등...... 모든 일이 일어나는 곳이죠. 그래서 저는 정치 생명을 포기했습니다. 그 대신 제 나름대로의 정의를 얻으려고 하죠. 그런 인간 들이 썩어 넘치니 저라도 어떻게든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누가 그걸 알아주지 않는다면요?"
"그게 바로 제 신념입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은 개떡같은 정의를 홀로 지키는 거요."
"....."
설화는 한동안 비슬리씨를 쳐다보다가 이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부끄러워지네요. 비슬리씨도 어떻게든 그곳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데, 저는 전쟁터에 있으면서 약해 빠진 생각이나 해대고...."
"그렇다면 장군님의 신념은 무엇입니까?"
비슬리씨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자 설화는 눈빛을 새롭게 했다.
"이승철.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그 남자의 의지를 이어 받는거에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한다는 그런 꿈같은 이야기가 아닌, 인간이 인간으로서 이해하고 구원하는 일 말이에요."
============================ 작품 후기 ============================
내일부터 라스트데드 시즌3 ZER-0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