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6 회: 라스트 데드(The Last Dead) 시즌 2 : 소용돌이 -- >
마치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이승철, 진자유, 그리고 차수철은 굳어졌다.
하지만 서로 약속이나 한것처럼 아무렇지 않은척 했다.
"박천구는 미친 사람처럼 황박사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어떤 부탁을 하더군요."
"부탁이요?"
"예. 하지만 저희는 그가 무슨 부탁을 했는지 듣지 못했습니다. 그는 황박사랑 독대를 했고, 그의 딸 역시 우리가 물어봐도 무슨 사연인지 입만 굳게 다물더군요."
"......"
이승철은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박대위는 뭔가 감추고 있어 보이기는 했다.
특히 마지막에 헤어질 때 그 묘한 표정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황박사는 그의 부탁을 거절한 모양이었습니다. 박천구가 그에게 온갖 협박과 회유를 하는 모습이 노골적으로 보였으니까요. 그때부터 황박사님이 괴로워하셨습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셨을까요?"
이승철이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장영석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도 그게 궁금합니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황박사님도 굳게 입을 다물기만 하셨어요. 심지어 어르신께서 다그쳐도 황박사님은 고개를 저을뿐이었습니다."
"흐음...."
"아무래도 제 생각은 황박사님과 박천구 사이에 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승철은 아무런 대답없이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지금은 속단할 수 없지만 왠지 박천구에 대해 알면 알수록 불길한 느낌이 짙어졌다.
"그 날 이후로 황박사님과 박천구와 말싸움이 잦아졌습니다. 그때문에 우리 속초 사람 들도 하나둘씩 편을 갈라 싸우기 시작했구요."
"아니, 둘만의 문제인데 왜 속초 사람 들이 싸우나요?"
자유가 이해불가한 표정으로 묻자 장영석이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황박사님을 지지하는 사람 들과 그를 시기하는 사람 들간의 싸움이었습니다."
"예? 어떤 사람 들이 황박사님을 시기한다는 거에요?"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속초 시민 들이 황박사님을 영웅대접 하는걸 별로 안좋아 하는 사람 들이 있었습니다.
장영석의 말에 이승철은 대충 상황이 파악이 되었다.
인간은 누구나 영웅심리가 있고 특히 어느 집단이나 남이 잘되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는 사람은 절대로 없다.
"혹시 시의원 들 아닙니까?"
이승철이 조심스럽게 묻자 장영석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께서는 황박사를 시기하고 모함했던 사람 들과 분란을 일으켰던 박천구를 ㅤㅉㅗㅈ아냈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황박사님은 아무런 말없이 속초시를 떠났거든요."
"그랬군요..."
"뭐, 어쨌든 이야기는 여기까지하고 그만 일어나시죠. 앞으로 여러분 들이 지낼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이승철 일행과 장영석은 횟집에서 나와 바닷가를 거닐었다.
이따금 들리는 사람 들의 말소리와 일정하게 밀려오는 동해의 힘찬 파도소리가 잘 어울러졌다.
이승철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마음의 평화에 취해 하염없이 바다를 쳐다보았다.
"좋냐?"
자유가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묻자 이승철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무 좋다. 예선이나 설화 누나랑 같이 봤으면 참 좋았을텐데."
"그러게. 지금쯤 걔네 들 뭐하고 있을까?"
"김원중씨랑 같이 바이러스를 연구하고 있겠지. 우리를 기다리면서 말이야."
"훗! 우리가 아니라 너만 기다리는 거겠지."
"웃기고 있네."
이승철과 자유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차수철은 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걸으며 간간히 보이는 속초시 생존자 들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 자린고비란 말이 딱 떠오르는 군.
"......"
- 이승철을 제거하기 전까지 모두 그림의 떡이라는 소리야.
"나도 알아!"
차수철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지금이라고 당장 이승철의 등 뒤에 칼을 쑤시고 싶었지만, 너무 조바심을 내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되새기느라 무척이나 애를 써야했다.
- 일단 조금 더 지켜보자구. 분명 언젠가 빈틈이 생길 거야.
"쳇."
차수철은 매우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별 수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왠지 아담해 보이는 저층 아파트 입구 앞에 섰다.
"이곳에 사람은 별로 살고 않지만 지내시기에 불편함을 별로 없을 겁니다. 식량이나 물을 얻으시려면 매일 아침에 시청 앞으로 오셔서 받아가시면 됩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영석은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 고리를 꺼내서 이승철에게 주었다.
"여러분이 지내실 곳은.... 404호입니다. 일단 짐을 푸시고 휴식을 취하십시오. 저녁시간이 되면 제가 여러분을 모시러 오겠습니다."
"아, 저녁은 아까 거기서 먹는 건가요?"
자유가 약간 기대하는 얼굴로 물었지만 장영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랜만에 찾아오는 손님 들인데 소홀히 모셔야 되겠습니까? 어르신께서도 환영회를 여신다고 하셨으니 점심보다 더 나을겁니다."
"아하!"
자유는 하이톤으로 소리치며 매우 좋아했다.
"어쨌든 편히 쉬시고 만약 불편한 일이 생기면 집 안에 있는 전화를 이용하십시오."
"예."
장영석이 돌아가자 이승철 일행은 아파트 입구안으로 들어가 4층까지 걸어올라갔다.
"휴우... 여기인가."
일행은 열쇠로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비좁은 거실 한구석에 있는 부엌이 숨차 보였지만, 방문이 3개인 것을 보면 개인 공간을 배려한 구조인 것 같았다.
"으음. 화장실도 좁네."
자유가 약간 실망하는 얼굴로 화장실 안을 둘러보았다.
욕조가 없는 화장실은 세면대와 대변기가 전부였다.
"이것도 감지 덕지 해야지, 안 그래?"
"그래, 너 잘났다."
이승철과 자유는 서로 투닥거리면서 짐을 내려놓고 거실 한복판에 추욱 늘어졌다.
하지만 그런 휴식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승철이 다시 벌떡 일어서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은 것이다.
"왜 그래?"
자유가 누워있는 상태에서 묻자 이승철은 낭패라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차 가지고 와야 하는데...."
"아, 맞다...."
그제서야 자유도 머리를 쥐어 뜯으며 괴로워 했다.
"일단 차를 가지고 오자. 거기에 총도 있고 그러니까 사람 들 보기 안좋을 거야."
"그러자. 그런데 수철이형은 어떡하지?"
자유의 말에 이승철이 두리번거리면서 차수철을 찾았다.
하지만 차수철은 이미 자신의 방을 정하고 안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뭐, 우리끼리 가도 별 상관은 없겠지."
이승철과 자유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집밖으로 나섰다.
그 사이.
차수철은 방 구석에 홀로 앉아 자신의 오른팔을 훑어보고 있었다.
-스르릉!
오른쪽 팔목에서 기다란 검이 솟아 나오자 차수철의 눈빛이 피로 물들었다.
- 그 놈들은 밖으로 나간것 같군.
"그러던지 말던지."
- 병신. 지금이 기회라는 소리야.
차수철의 움직임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기회라니?"
- 생각해봐. 이 아파트 안에 우리만 있을것 같아?
"....."
그러고보니 이 5층 아파트에 누가 살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좋아. 일단 사냥감이 있는지 없는지 둘러 봐야겠군."
- 진작 그렇게 나오셔야지.
차수철은 집 안에서 나와 복도를 천천히 거닐었다.
그의 후각은 온통 살아있는 신선한 육고기를 찾아해맸다.
감염자가 되고 나서부터 생긴 희안한 후각의 발달이었다.
"4층은 사람 냄새는 안나는군."
차수철은 약간 실망한 얼굴로 5층에 올라갔지만 그곳에도 사람은 없었다.
- 다들 어디간거 아닐까?
"글쎄...."
차수철은 1층과 2층도 해맸지만 그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마지막 희망을 걸고 3층에 올라갔다.
하지만 복도 끝에서 끝까지 거의 걸어봐도 개미 새끼 흔적도 보이질 않았다.
"여기도 조용하군."
차수철은 실망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신경질적으로 복도 끝에 있는 현관문을 걷어찼다.
-끼긱.....
"......"
모든 아파트 현관문은 밖으로 열리지만 워낙 오래된 건물이다 보니 반동으로 튕겨져 나왔다.
1, 2, 3층 모두 확인해봤지만 문이 열려있는 집은 없었다.
- 문이 열려있군.
"....."
차수철은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