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2 회: 라스트 데드(The Last Dead) 시즌 2 : 소용돌이 -- >
-끼이이익
허름한 민박집 현관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집 안은 어두컴컴했지만 수북히 쌓인 먼지 들이 오랜만에 부는 바람에 정신없이 휘날렸다.
"켁켁! 아우 숨 막혀!"
"자. 받어."
자유가 기침을 콜록거리면서 괴로워하자 이승철이 그에게 물묻은 손수건을 내밀었다.
"이건 또 언제 준비했냐?"
"아까 차에서 내리기 전에 물묻은 수건을 미리 준비해뒀지."
"아우. 그런데 여기에서 꼭 자야 해?"
"응. 민박집이 마을 입구랑 가까워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바로 차로 달려갈 수 있잖아."
"하지만 여긴 정말 아닌 것 같아."
이승철은 자유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랜턴을 켰다.
다행히 전주인이 바이러스를 피해 피난이라도 갔는지 집은 깨끗하게 비워둔 상태였다.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응. 여기에 총이랑 중요한것 들을 가져오자."
이승철은 팬션 구석구석을 살펴본 후 자유와 함께 짐을 챙겨서 다시 돌아왔다.
"젠장. 바이러스만 아니었다면 정말 놀러온 분위기였을텐데."
"그러니까."
이승철과 자유는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점점 어두워지는 바깥을 보고 얼른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남자 둘이 아직 이른 저녁 시간에 집안에 있다보니 막상 할게 없었다.
"....."
"....."
결국 둘은 휑한 거실에 덩그러니 누워 버렸다.
그러나 잠이 올리가 없었다.
오히려 저 멀리서 들리는 늑대 울음소리 때문에 긴장만 더 될 뿐이었다.
하긴 워낙 인간 들의 씨가 마르다보니 온갖 산짐승 들이 판을 치고 다닌다.
게다가 여기는 보이는 족족 강과 산만 보이는 강원도 한복판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자유는 벌떡 일어섰다.
"왜?"
이승철이 깜짝 놀라 덩달아 일어섰다.
"야, 이 마을 전체를 둘러봐야 하지 않을까?"
"갑자기 왜? 조용하기만 했잖아."
"그냥 좀...."
"왜? 무섭냐?"
이승철이 슬쩍 입꼬리를 올리자 자유가 주먹으로 가슴을 툭쳤다.
"너보단 용감해. 쨔샤."
"그럼 얌전히 여기있자. 감염자 들이 이 마을에 있다고 하더라도 여기까진 오지 않을 거야. 우리가 움직이면 괜히 긁어 부스럼이라니까."
"그런가?"
"응."
결국 이승철과 자유는 다시 자리에 도로 누웠다.
그런데 자유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점점 편해지는걸 느꼈다.
이승철은 말 주변도 별로 없고 놀지도 못하고 그야말로 순진무구한 편이지만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승철은 거짓말을 잘 하지 못한다.
게다가 자신의 감정을 잠시 숨길줄은 알지만 자신의 속마음까지는 숨기지 못한다.
'예선이가 이런점 때문에 승철이를 좋아하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자유는 마음이 너무 편하다 못해 서서히 잠까지 오기 시작했다.
"자유야."
"아, 왜?"
자유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냐?"
"잠이 오려다가 너 때문에 방금 깼다."
"아, 미안."
이거 순진한 걸 이용해서 은근히 약올리는 거 아냐?
자유는 약간 그런 의심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됐으니까 말해. 뭔데?"
"나 잘하고 있는 걸까?"
"너야 항상 잘하잖아. 우리가 무사히 여기까지 온 것도 다 네가 잘해서 그래."
자유는 대수롭지않게 대답했지만 이승철의 표정은 너무 무거웠다.
"너무 많은 사람 들이 죽었어. 어쩌면 성식이 말이 맞을지도 몰라. 내가 그때 아지트에 있었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 들이 희생을 당하지 않았을 거야."
이승철 입에서 성식이란 말이 나오자 자유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너 설마 아직도 자책하고 있는 거냐?"
"그런것 보다.... 요즘 내가 자꾸 아닌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러다가 정말 소중한 걸 잃겠다는 생각도 들고...."
자유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자유 역시 사람 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너무 가까이서 보면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너만 그렇게 힘든거 아니야. 티내지마."
"아, 미안...."
"넌 미안하다는 말 밖에 못하냐?"
자유가 벌컥 화를 내자 이승철이 놀란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야, 왜 갑자기 화를 내?"
"왜 화를 내냐고? 그래. 너 말한번 잘했다. 넌 항상 꼭 그런식이더라. 할건 다 하면서 꼭 나중에 미안하다고 하잖아."
"......"
이승철은 잠시 굳은 얼굴로 자유를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떨궜다.
"맞아.... 난 항상 그런식이야."
어랍쇼?
이게 아닌데?
오히려 당혹스러운건 자유였다.
자유는 이승철을 이겨먹으려고 괜히 소리친게 아니었다.
자꾸 자책감에 휩싸이는 자신의 소중한 친구가 워낙 위축되어 있어서 속이 많이 상할 뿐이었다.
차라리 이승철이 뻔뻔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승철, 이 놈은 항상 본인을 1순위에 두질 않는다.
항상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1순위로 두고 본인은 2순위도 아닌 맨 밑으로 둔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설화에게 일부러 바이러스를 감염시키게 해서 다른 사람들을 지키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자유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승철이 김성식을 따라 육군훈련소에 따라 간것도 괜한 승부욕이 아닌 타인을 지키기 위해 본인이 직접 뛰어든 것 뿐이었다.
만약 이승철이 김성식을 밟아버리려고 했다면 진작에 했을터였다.
그러나 이승철은 김성식은 눈 앞에서 놓치는 것도 모자라, 겨우 붙잡아놓고 풀어주기까지 했다.
처음에 그런 이승철의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왜 그렇게 했는지 조금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이승철은 배타적인 인간이다.
그렇다고 자존심이 없는 우유부단한 것은 아니다.
다만 희생정신이 유별나게 강한것 뿐이다.
어쩌면 군인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이승철이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된것일 수도 있다.
그 반면 자유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하다.
하지만 단체를 위해 희생을 할 줄은 안다.
다만 이승철처럼 타인을 자신보다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그건 자유에게 엄청난 센세이션과 다름없었다.
자유는 이승철을 통해 정말로 인생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한심스러워 방금같이 이승철에게 본심이 불쑥 튀어나온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됐다. 그냥 자라."
"......"
자유는 털썩 누워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승철과 자유는 동시에 벌떡 일어나 곁에 뒀던 총을 조용히 집어 들었다.
"짐승은 아니야."
"응. 사람 발소리야."
이승철과 자유는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