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0 회: 라스트 데드(The Last Dead) - 외전1 (악몽의 시작) -- >
모든 연구원 들이 철수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날 무렵.....
차수철은 힘겹게 눈을 떴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계속 울려퍼졌지만 특별히 어딘가가 아픈건 아니었다.
다만 몸이 좀 이상했다.
몸 안의 세포 들이 마치 따로 노는 듯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이봐요....."
쉰소리가 입 밖으로 빠져나갔지만 차수철은 필사적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차수철의 두 팔을 억세게 감싸던 끈도 느슨해졌고, 유리창 너머로 자신을 지켜보던 사람 들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어두운 침묵만이 공간을 가득채울 뿐이다.
"도대체...."
차수철은 연구실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문득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같은 느낌에 멈춰섰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왠지 낮선 눈길이 자신을 쳐다보았다.
"거울...?"
차수철의 두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많이 변해있었다.
수척해진 얼굴과 핏기가 가신 얼굴색, 무엇보다 붉게 충혈되있는 두 눈이 그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뭐야? 도대체 내가 왜 이런거야?"
- 너에게 바이러스를 감염시킨 거야.
"누구야?"
차수철은 흠칫 놀라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본인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 그렇게 찾을 필요 없어. 난 그동안 잠들었던 또 다른 너니까.
"개 헛소리 작작하고... 당장 내 눈 앞에 튀어나와."
차수철은 이를 갈았지만 보이는 건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 미안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니까. 난 네 안에 잠들어 있던 또 다른 너야.
"씨발... 뭣같은 소리 하네."
- 이봐. 우리 딸, 혜빈이를 생각한다면 이러지말자구.
목소리는 음산하면서도 진지했다.
차수철은 그 목소리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혜빈이? 혜빈이를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 당연히 알고 있지. 너와 난 혜빈이를 오래도록 쭉 지켜봐왔으니까. 그 애가 태어났을 때 2.7kg이었던 것과 3일 지나서 황달도 왔잖아. 넌 그때 너무 겁이나서 화장실에서 홀로 울었지.
"......"
또 다른 자신은 무서울 정도로 정확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네가 내 안에 잠들어있던 나라면.... 어떻게 지금 깨어난 거지?
- 이제 내 존재를 서서히 인정해가는 군. 별거 없어. 어떠한 동기때문에 내가 깨어난 거니까.
"동기?
- 그래. 널 감염시켰던 그 바이러스가 날 깨운 거야.
"....."
- 날 의심하지마. 날 믿어. 난 널 지켜줄 거야.
차수철은 서서히 주저 앉아 머리를 움켜쥐었다.
미쳤다.
미친 거다.
미쳤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제발... 이게 악몽이라면 날 깨워줘!"
차수철은 울부짖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 정신차려! 이건 현실이야. 나와 이 상황을 어서 받아들여.
"아니야. 이건 거짓말이야!
- 쳇! 어쩔 수 없군. 너의 본성을 깨워줄 때가 됐어. 좀 이르긴 하지만....
"본성...?"
차수철은 몸부림을 멈추고 마치 뭔가에 홀린듯 되내었다.
- 그래. 잘 들어. 우리의 본성은 살(殺)이야. 무언가 잔인하게 파괴되었을 때 희열을 느끼지.
"....."
- 너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거야. 힘없는 사람 들을 죽였을 때 느꼈던 그 느낌. 마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아드레랄린 말이야.
"....."
이상하게도 차수철의 온 몸이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런 말없이 두 팔을 서서히 들어올렸다.
- 그래. 그 느낌이야. 이제 네 육체는 네 본성과 반응하게 될거야.
"크아아...."
차수철의 두 팔에서 이상한 게 뚫고 나왔다.
검붉은 피에 묻은 그것은 시퍼렇게 날이 선 강철검이었다.
"이건...."
차수철은 피눈물을 흘리며 두 팔을 뚫고 나온 그것을 응시했다.
- 선물이야. 우리를 위한 선물. 혜빈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떠올려 봐. 이 세상이 그 애를 죽였어.
"맞아. 이 세상이 내 딸을 죽였어. 세상은 철저하게 파괴되어야 해."
차수철은 분노에 찬 얼굴로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덤덤한 발걸음으로 연구실을 빠져나와 좁고 어두운 복도를 천천히 걸어나왔다.
출입문 밖은 온통 풀과 나무 들이 무성했고 앙상하게 뼈만 남은 시체 들이 듬성듬성 널부러져 있었다.
"태양이.... 뜨겁군."
차수철은 문 앞에 널부러져있는 시체 앞에 쭈그려 앉아 선글라스를 벗겨냈다.
양복을 입고 허리춤에 권총을 찬 것을 추려보아 경호원 같았다.
차수철은 양복을 탁탁 털어서 입고 선글라스를 끼더니 창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 멋지군.
또 다른 자신이 진심으로 감탄하자 차수철은 씨익 웃었다.
- 크아악!
그런데 바로 그때.
시체 사이에서 뭔가가 벌떡 일어나더니 차수철을 보고 괴성을 질러댔다.
- 좀비야. 바이러스에 감염된....
좀비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고 명찰을 차고 있었다.
차수철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다가가 오른팔을 뚫고 나온 강철검을 좀비의 목에 들이댔다.
"Jack Tomason..... UWBC?"
- 크아악!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게 거슬렸는지 좀비는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시끄럽군."
- 서걱!
차수철이 망설임없이 오른팔을 움직이자 좀비의 목은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크크큭....크하하!"
- 어때? 기분이 좋은가?
"아주 좋아! 너무 좋아서 미칠 지경이야!"
차수철은 너무 기분이 좋아 미친듯이 웃어대다가, 자신의 팔을 솟구쳐 나온 강철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아주 좋은 선물이야."
- 그렇지? 그건 우리에게 임무를 준 거야. 혜빈이를 그렇게 만든 세상을 파괴하라고 말이야.
"맞아. 다 죽여 없앨 거야. 단 한 놈도 빠짐없이 모조리...."
차수철은 이를 갈면서 복수를 다짐했다.
- 그런데 어디로 갈건가?
"당연히...."
차수철의 희미한 기억에서 어떤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내 이름은 황주선..... 고향은 강원도..... ]
"그를 찾아갈거야. 나에게 이런 특별한 선물을 준 자에게 말이야. 감사의 인사라도 드려야지."
차수철은 섬뜩한 미소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비릿한 피비린내가 진동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