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7 회: 라스트 데드(The Last Dead) - 외전1 (악몽의 시작) -- >
"다 들 나한테 얼굴 돌려."
군인 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차안으로 총구를 들이 밀었다.
예선이와 승철이는 군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눈 정상, 피부 정상, 다 정상이군. 좋아. 내려요."
"....."
예선이와 승철이가 차에서 내리자 대위가 약간 경계가 풀린 얼굴로 총구를 내렸다.
하지만 짜증이 뒤섞인 표정은 여전했다.
"비상계엄령이 떨어졌는데 여기서 뭐합니까?"
"저희 지금 전대에서 집으로 가려는 건데요."
예선이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맞받아쳤지만 대위는 더 어이없다는 얼굴이었다.
"지금 전대에서 왔다고 했습니까?"
"예."
"설마 현장에서 그걸 봤습니까?"
"예. 아주 죽여줬죠. 목이 없는 사람이 택시를 운전하고 아이스크림 가게를 들이박았는데, 뒤에 앉던 손님은 뭐가 그렇게 배가 고팠는지 그 사람 머리를 먹고 있더라구요. 아마 그 손님은 아이스크림을 먹는게 죽도록 싫었나 보죠."
예선이는 흥분한 얼굴로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지만 승철이는 안절부절 못했다.
군인 출신인 그가 31사단 친구 들의 상태를 봤을 때는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라 다를까 대위가 굳어진 표정으로 다시 총을 들었다.
"당장 트럭에 올라 타."
군용트럭 승차감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특히 짐칸 의자에 앉아 방지턱을 넘을 때면 그것은 차라리 고통이었다.
"우이씨! 천천히 좀 몰지."
예선이는 씩씩거리면서 발을 쿵쿵거렸다.
그 바람에 총을 매고 맞은편에 앉은 병사 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저기 좀 얌전히 있으면 안될까요? 우리 별로 좋은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이승철이 눈치를 살피면서 살짝 주의를 줬지만, 예선이의 심기는 이미 뒤틀릴대로 뒤틀렸다.
아니라 다를까 맞은편에 앉은 병사 들을 한껏 째려보기까지 했다.
"저기요, 군인 아저씨."
"....."
트럭에 타 있던 모든 사람 들이 약간 놀란 얼굴로 예선이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조용하고 수줍음이 많을것 같은 겉모습과 달리 당돌한 목소리에 많이 들 놀란 눈치들이었다.
"이봐요. 사람이 부르면 대답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뭡니까?"
"우리 어디로 데려가는에요?"
그 질문에 모두가 병사 두명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워낙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자신 들이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검사하러 가는 겁니다."
"검사라뇨? 우리가 왜요?"
"그야..."
"내가 대답할게."
예선이가 꼬치꼬치 캐묻자 참다못한 병장이 대답하려하는 일병을 제지시켰다.
"지금 전남부터 광주까지 쑥대밭이 된 거 모릅니까? 호남 전 지역이 3일만에 전염병으로 몸살을 앓고 있어요. 이제 광주도 시작인 겁니다."
"전염병이라뇨? 그리고 3일이라니...."
"아니, 정말 하나도 몰라요?"
병장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묻자 예선이는 이승철을 쳐다보았다.
"정부가 전국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언론을 최대한 통제하고 있지만 인터넷을 통해 소문이 퍼져 나가면서 나도 어제 겨우 알았어요."
그제서야 예선이는 뭔가 감을 잡은 얼굴이었다.
"어쩐지 그제 광주에 왔을 때 고속도로에서 검문을 하고 있더라더니...."
"지금쯤 광주, 장성, 담양, 순창으로 통하는 모든 길을 차단해 버렸을거에요."
"그, 그럼 우리 지금 갇힌거에요?"
"......."
예선이가 말도 안된다는 표정으로 되물었지만 모두가 침통한 얼굴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럴 수가 말도 안돼. 전염병이라니...."
"저기, 아가씨?"
운전석 가까이에 앉아있던 안경 쓴 30대 여성이 충격에 빠진 예선이를 조심히 불렀다.
"아가씨 아까 전대에서 봤는데.... 의사 지망생이랬죠?"
"예. 그런데요?"
"저기 괜찮으시다면 우리 아이 좀 봐주세요."
"어디가 아파요?"
"예. 열이 불덩이에요."
예선이는 덜컹거리는 트럭에서 겨우 겨우 중심을 잡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이제 갓 5살쯤 되보이는 남자 아이였는데, 정말 비오듯 땀을 흘리면서 열을 내고 있었다.
"앗 뜨거!"
무의식적으로 아이의 이마에 손을 올린 예선이가 깜짝놀랬다.
"왜, 왜 그래요?"
"엄마. 아이 이마에 손을 대보세요."
"어머! 도진아, 너 왜 그래?"
엄마 역시 아이 이마에 손을 올리다가 깜짝놀랬다.
"39도, 아니 40도는 충분히 되보여요. 당장 병원으로 가야 해요."
-끼이익!
갑자기 트럭이 급정지를 하자 모두가 중심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아야... 도대체 뭐야?"
사람 들이 웅성웅성거리면서 정신을 차리는 와중에 갑자기 총알이 장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아까 그 병사 들이 5살 아이와 엄마에게 총을 겨누고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 그 아이한테서 떨어져."
하지만 가만히 있을 사람 들이 아니었다.
이승철이 얼른 엄마와 아이 앞에 서서 두 팔을 벌렸다.
"뭐하는 짓이야? 시민한테 총을 겨누다니 너 미쳤어?"
"당신 뭐야? 저리 안 비켜?"
"빨리 그 총 치워."
이승철의 목소리가 험악해지자 병장이 움찔했다.
하지만 총구는 내리지 않았다.
"아니 민주화 운동 일어난지 몇 년이 지났다고 또 죄없는 시민에게 총질이여?!"
어떤 아저씨가 보다 못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승철 옆에 떡하니 섰다.
"비키십시오."
"못 비키겄다. 어쩔래?"
"비키지 않으면 사살합니다."
병장은 꽤나 강단있게 경고했지만, 이 아저씨는 그 두둑한 배에 배짱만 있는지 오히려 피식 웃었다.
"아따, 고자식 거 성깔있네잉. 야 이 새꺄. 너만 승질있냐? 너만 승질 있어?"
"당장 비켜."
병장의 표정이 여간 심싱치가 않았다.
하지만 아저씨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뭐여? 비키라고? 아따 근디 이 어린 놈의 새끼가 어디 어른한테 반말질이여? 네 고향이 어디여, 새꺄?"
"비키라고 했다. 계엄령 때 개죽음 당해도 국가에서 보상 안해주니까 비켜."
"아니 씨발, 이 새끼가 근데.,.."
정말로 아저씨가 열받았는지 병장의 총을 붙잡고 힘으로 밀어붙였다.
"오냐. 내가 죽나, 네가 죽나 한번 해보자잉!"
트럭 짐칸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버렸고, 아이 엄마는 얼른 아들을 안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야! 죽여!"
병장이 악에 받쳐서 소리질렀지만 일병은 덜덜 떨면서 어찌할바를 몰랐다.
"저렇게 어린 아이를 죽이겠다고? 너네가 사람이냐? 앙!"
아저씨뿐만 아니라 승철이와 몇몇 사람 들이 병장에게 달려들어 총을 뺏으려고 했다.
-탕탕!
"꺄아악!"
실랑이를 벌이는 와중에 총성이 울려퍼졌고 모두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병장이 끝까지 총을 뺏기지 않으려다가 그만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이럴 수가...."
아까 도망친 엄마의 등에서 붉은 피가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총알은 엄마의 등을 관통하여 아이의 등을 뚫고 나와버렸다.
"....."
모두가 큰 충격에 빠졌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여자 들이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예선이 역시 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