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5 회: 라스트 데드(The Last Dead) : 시즌1_시크릿-X -- >
"원하는 게 뭐야."
예선이가 차갑게 묻자 김성식은 능글 맞은 표정을 지었다.
"오~ 예선이..... 너 그런 표정 지으니까 꽤 귀엽다."
"닥쳐."
"오호, 욕도 할 줄 아네?"
김성식은 꽤나 거들먹거렸지만 표정에서 뭔가 초조해하는 모습이 보였다.
자유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너 혼자 이러는 거 아니지?"
"그게 무슨 말이야?"
확실히 김성식은 표정을 관리하는 게 서툴렀다.
예선이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너 도대체 누구랑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 그리고 승철이 어디있어?"
"그 자식이 어디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너랑 같이 있었잖아!"
예선이가 소리를 지르자 김성식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 새끼가 내 다리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사라졌는데 뭐 어쩌라고?!"
"웃기지마. 네 다리를 쏜 건 승철이가 아니잖아. 카메라로 다 봤어."
자유가 소리쳤지만 김성식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 너희는 반 병신된 나보다 멀쩡한 승철이가 더 걱정된다 이거지?"
"야, 김성식!"
"하긴 너네가 언제부터 내 걱정을 했겠냐? 아지트에서 그 죽을 힘을 다해 너희를 지켰어도 내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다 그 자식만 감싸고 돌았는데."
"......."
김성식의 분노에 찬 목소리에 모두가 넋을 잃어버렸다.
그의 말대로 모두가 김성식에게 무심했던 건 사실이었다.
"네 말이 맞아..."
예선이가 대답하자 모두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건 오해야."
"오해?"
김성식은 눈썹을 치켜떴다.
"웃기지마. 오해는 무슨....잘 들어. 그 날 예선이 너랑 나, 그리고 자유 저 새끼랑 셋이서 뭉쳐서 같이 살고 같이 죽자고 한 거 기억나냐?"
"....."
자유와 예선이는 아무런 대답없이 김성식을 쳐다보았다.
"기억 안나냐? 이 새끼 들아!"
"당연히 그걸 기억 못할리가 없잖아."
"빨리 빨리 대답해. 안 그러면 이 오타쿠새끼 대갈통 날려버리는 건 시간 문제이니까. 아무튼 그 날 우리 셋이서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그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겼어. 그런데 이승철 그 새끼를 가까스로 살리고 나서 너네는 한순간에 변해버렸어, 알아?!"
"그래 기억나. 하지만 우린 변한게 아니라 승철이한테 기대를 많이 한거야. 승철이 아니었으면 우린 무기를 구할 수조차 없었고 전투를 배울 수도 없었어, 그건 네가 더 잘 알거아냐?"
"그럼 그 전에 내가 너희를 위해 희생했던 건 다 헛 일이었나 보네?"
김성식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성을 컨트롤하는 게 점점 힘들어졌다.
생각같아서는 지혁이 머리를 날리고나서 모두 죽이고 싶었다.
"왜 네가 했던 일 들이 다 헛일이야? 우린 너한테 충분히 고마워하고 있다고!"
"됐어. 인간 들은 꼭 그러더라. 위급할 때는 치켜세우다가 좀 살만하다 싶으면 소홀해지는 거 말이야.... 난 최소한 그러지 않았어. 솔직히 승철이 그 새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지만 우리, 아니 예선이 너한테 만큼은 인정받고 싶었다고."
"성식아...."
"그런데 너는 승철이 그 새끼만 쳐다보고, 의지하고, 또...!"
"....."
"좋아했잖아."
"......"
예선이도, 자유도 아무런 말 없이 김성식만 응시했다.
"에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설화가 갑자기 헛기침을 하더니 슬그머니 앞으로 나왔다.
"으음. 지금 심각한 이야기 하느라 다들 수고가 많으신데 말이야.... 난 저 자식이 뭐 때문에 저러는지 좀 듣고 싶은데? 서로 기운 빠지는 이야기는 좀 접어두자고. 여긴 감염자 들 소굴 안이야."
"목적? 지금 당신 입에서 그딴 소리가 나와?"
김성식은 설화를 노려보았다.
"그럼 이딴 소리가 안나오면 뭐, 예선이나 자유한테 사과 들으려고 왔냐?"
"닥치고 당신은 좀 빠져있어. 대가리에 총알 박히기 싫으면."
김성식이 눈으로 총을 가리키며 험악하게 말했지만 설화는 물러설 기미가 안보였다.
"너 아까 내가 어떻게 되는지 안봤냐? 이 몸 그렇게 쉽게 뒤질 몸 아니다. 너 그 총 잘못 놀렸다가 정말 온 몸에 칼집내고 뒤질수도 있어."
설화가 슬슬 살기를 내뿜자 김성식도 움찔했다.
"너가 원하는 게 뭐야, 그것만 말해."
"조, 좋아. 당신 나하고 같이 어디에 좀 가야겠어."
"뭐?"
"안돼요, 언니."
김성식의 요구에 예선이와 자유가 펄쩍 뛰었지만 설화는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 애 들 풀어줄거야."
"아니.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어?"
김성식은 기분 나쁘게 웃으면서 지혁이 머리에 총구를 더 들이밀었다.
"이 자식이 인질 좀 되줘야겠어. 물론 승효와 세희도 마찬가지야. 만약 당신이나 지혁이가 쓸데없는 일을 벌인다면 승효와 세희가 먼저 죽게 될거야."
"애들은 풀어줘. 너가 그런 짓을 하기에는 너무 어리잖아."
예선이가 침착하게 달랬지만 김성식은 단호하게 머리를 저었다.
"내가 미쳤어? 내가 승효와 세희를 놓친다면 지혁이를 버릴게 분명한데?"
김성식의 말에 지혁이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자유와 예선이를 쳐다보았다.
"누, 누나.....자유형...."
"지혁아. 널 절대로 안버려. 성식이가 지금 널 자극하려고 그러는 거니까 불안해 하지마."
"아니. 지혁이 너가 더 잘 알거야. 아지트에 있었을 때 쟤네들 툭하면 널 무시하고 오타쿠라고 손가락질 하기 바뻤어."
"그건 철없는 애들이 그런거지, 우리가 한게 아니라는 걸 너가 더 잘 알잖아!"
터무니없는 말에 예선이가 소리질렀지만 김성식은 더욱 입꼬리를 올렸다.
"아~ 네가 안 그랬다고? 난 너희가 한 짓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어. 예선이 너 생존자 들 회의할 때 지혁이 제대로 부른적 있어? 네가 지부장하면서 지혁이 꼼꼼하게 챙긴적 있냐고? 넌 지혁이를 거의 없는 존재처럼 생각했어. 난 네가 한 말도 기억해."
"무슨...."
"지혁이 걔는 건담하고 세이버랑(애니 캐릭터)랑 대화하기 바쁘니까 왠만하면 부르지마. 어차피 또 쓸데없는 애니 이야기나 할게 뻔한데, 뭐. 도움이 전혀 안돼....라고 말이야."
"....."
예선이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멍하게 서 있을뿐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
"흑흑...누나..."
지혁이 역시 비참하게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릴뿐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보다못한 자유가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지혁이가 하도 애니에 빠져 있어서 예선이 역시 화가 나서 한 말이지, 진심은 아니었어."
"진심? 그게 진심이 아니면 뭔데. 너도 똑같아, 이새끼야. 이승철처럼 겉으로는 온갖 착한척 다 하면서 꼭 중요한 고비때마다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새끼가..."
"야, 김성식!"
"그만해."
예선이는 팔을 들어 자유를 가로막았다.
"맞아. 사실 그랬어. 하지만 지혁이가 밉다거나 무시하는 게 아니야. 다만 좀 철없어 보여서 나도 화가나서 한 말이었어."
"됐어. 이제 너희들 변명하는 거 구역질 나. 다 필요 없으니까 당신이나 이쪽으로 와. 만약 허튼 수작 부리면 이 새끼 들 목숨은 없어."
더 이상 김성식에게 어떠한 말도 통하질 않다는 걸 설화는 여실히 깨달았다.
지금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무도 없었다.
"그래. 네가 누나가 그렇게 좋다면 가주마. 하지만 애 들 티끌이라도 건드렸다가는 너 산채로 피뢰침에 꽂아 전기 구이로 만들어 버릴줄 알아."
"흐흐. 그건 가봐야 아는 일이겠지."
김성식의 느글느글한 미소에 설화는 돌아서서 한번 토하는 시늉을 한 후, 예선이와 자유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이 몸은 우리 새끼 들 지키러 가야겠다."
"언니, 안돼요."
"맞아요 누나. 저 자식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고요."
예선이와 자유가 펄쩍 뛰었지만 설화는 고개를 저었다.
"안돼, 저 자식 지금 온통 원망과 분노로 자기 자신을 컨트롤 하지 못하고 있어. 애들이 위험하다고. 어차피 난 너네 아니었으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어."
설화는 자유와 예선이 어깨에 각각 손을 올리고 씨익 웃어보였다.
"난 어떻게든 빛지고는 못사는 스타일이거든. 그러니까 나한테 기회를 한 번 줘봐."
"언니....."
"누나....."
"믿음을 가져봐."
설화는 그 말을 끝으로 미련없이 등을 돌린 후 김성식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가자. 미스터 밴댕이."
"젠장! 날 한번만 놀리면 가만두지 않겠어."
"나도 네가 쟤네들 풀어줄때까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미스터 밴댕이."
"쳇!"
설화가 당당히 앞장서자 김성식은 지혁이와 꼬마 들을 총으로 위협하면서 그 뒤를 따랐다.
"우리 어떡하지?"
멀어져가는 설화의 모습을 보고 예선이가 눈물을 흘리면서 자유에게 물었다.
하지만 자유라고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돌리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 우리 이 비리비리한 감염자 들을 데리고 뭘 할 수 있을까?"
설화가 멀어지자 감염자 들 역시 허리가 축 처진 체 서로에게 의지하며 웅크려 있었다.
마치 전쟁터에서 엄마를 잃은 어린 고아들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