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2 회: 라스트 데드(The Last Dead) : 시즌1_시크릿-X -- >
그렇게 아파트 안으로 들어선 우리는 꽤 오랜 시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전에 지혁이랑 꼬마 들이 들어와서 우리를 보고 반가워 했지만 너무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때문에 벽 한구석에 조용히 서있었다.
"일단...."
그 무거운 분위기를 깨트린 건 다름아닌 자유였다.
"모두가 감정 표현을 자제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대화를 해야할 것 같아."
"......."
하지만 성식이는 고개를 아예 바깥으로 돌려버린 상태였고, 예선이 역시 쭈그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을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 모인 사람 들은 예전보다 그 수가 한참 모자랐다.
예상대로 제희랑 현구는 놈 들에게 먼저 당한 것 같았고, 희주는 잘 모르겠지만 안좋은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상황이 파악되니까 내 괴로움은 더해만 갔다.
차라리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싶었지만 그 마저도 용기가 없었다.
그 용서마저도 나를 변명하기 위한 도구로 밖에 생각되질 않았다.
차라리 아까 성식이한테 얻어터졌을때 아무도 말리지 않았어야 했다.
"흥. 아주 가관 들이네."
그때, 베란다 창가에 팔짱끼고 서있던 설화 누나가 입을 열었다.
"도대체 몇명이 죽었는데 다들 죽상이냐?"
누나의 말은 푹 꺼진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셈이었다.
성식이는 홱 고개를 돌려 누나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뭔데 끼어들어?"
"나? 나도 인간인데?"
설화 누나는 아무렇지않게 대답했지만 빈정이 상한건 분명했다.
상대를 더욱 화나게 하는 방법은 감정표현을 자제하면서 가시 박힌 말을 내뱉을 때 이니까.
아니라 다를까 성식이는 성큼 성큼 누나 앞으로 다가갔다.
"참, 어이가 없어서.... 당신도 인간이라고? 웃기고 있네."
성식이는 입꼬리를 올리고 비웃었지만 누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면 네가 어떻게 할건데?"
"지금 당장 네년 머리에 총알을 박을 수도 있어."
"야, 김성식. 너 진짜 그만해라."
이대로는 안되겠는지 자유가 팔을 꽉 붙잡았지만 성식이는 그마저도 뿌리쳤다.
"이거 놔. 저새끼 간다니까 얼씨구나 따라간 주제에."
"뭐? 야 이 새끼야. 입을 삐뚤어졌어도 말을 바로 하랬어. 우린 뭐 좋아서 아지트를 나간 줄 알아? 네가 승철이가 뭘 생각하는지 알기나 해?"
"너네가 안나갔으면 희주가 그렇게 되지도 않았어."
"희주? 네가 언제부터 희주를 챙겼다고 그래, 이 새꺄. 솔직히 네가 예선이 말고 다른 애들 쳐다본적이나 있어?"
점점 둘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지혁이가 얼른 둘 사이를 끼어들었다.
"그만들 좀 해요. 애들이 보고 있잖아요."
"....."
결국 서로 떨어지긴 했지만 앙금만 깊게 남아버렸고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난 여기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승철아..."
"어?"
갑자기 예선이가 일어서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온갖 감정이 뒤섞인 상태였지만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해야했다.
"자유 말대로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의논부터 해야할 것 같아."
"...응."
"그래서 말인데 네가 나 대신 우리 생존자 들을 이끌어줬으면 좋겠어."
"....."
충격.
아까 설화 누나가 찬물을 끼얹은 격이라면 예선이의 말은 불난집에 폭탄을 던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성식이는 얼굴까지 시뻘게지면서 곧 브레스라도 내뿜을 기세로 입을 열었다.
"야! 너 미쳤어?!"
"소리지르지마. 김성식. 여기 우리 들 중에 그 누구도 잘한 사람 한명도 없어."
"야, 신예선. 정신차려.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줄 알기나 해?"
"알아."
"....."
끝까지 무덤덤한 예선이의 대답에 성식이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예선이는 그런 성식이를 무시하고 설화 누나 앞에 다가섰다.
"바이러스를....극복하셨다구요?"
"응."
"어떻게요?"
"몰라. 정신차려보니까 살아있는 놈의 내장을 씹고 있더라."
"....."
누나...
제발 분위기 파악하면서 말하면 안되나요?
"그래요... 그럼 점점 회복하고 있는 중인가요?"
"그건 잘 모르겠고....날 자꾸 자극하는 놈 들이 있다면...."
설화누나는 말을 잠시 멈추고 성식이를 대놓고 쳐다보았다.
"공격 본능이 내 뇌를 지배해서 어떻게 변할지도 모르겠지."
그 말에 성식이가 울컥했지만 예선이가 눈치를 주자 그만 입을 다물었다.
역시 성식이는 예선이한테만 약하군.
"아무튼 내 모습을 자세히봤다면 절대로 안심해서는 안될거야. 요즘 쓸만한 무기 들을 내 몸에 감추고 있거든."
"봤어요. 아까는 무척 놀랐지만 당신을 싫어하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
난 순간 예선이한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마치 내 마음을 읽고 이해해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예전에는 놈 들을 끔찍히 싫어했으면서 갑자기 생각을 바꾼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다행히 예선이는 내 궁금증을 쉽게 풀어주었다.
"언니를 보니까 알 것 같아요. 이 바이러스가 인간을 진화시키는 것을요. 하지만 그게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알아야 해요."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된거지?"
"저는...."
예선이는 말을 멈추고 우리를 쓰윽 둘러보았다.
"더 이상 제곁에 있는 사람 들이 죽지않았으면 좋겠어요. 단지 그것 뿐이에요."
"......."
모두가 숨을 죽이고 예선이만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부담스러운 눈길에도 초연한 모습이었다.
"이제 더이상 울고 있을수만은 없죠. 사실 승철이가 아지트를 벗어난 후로 많은 생각을 했어요. 더 이상 우리가 도망가서는 안된다구요. 물론 그때는
놈 들이 점점 약해지니까 나설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달라요. 놈 들은 변하고 있어요. 소중한 사람 들을 잃어버리고 울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죠."
"으음...."
설화 누나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뭔가 결정을 했는지 몸을 반드시 일으켜 세웠다.
"내가 저 놈을 잘 아는데 머리 좀 굴릴줄 알더라. 배짱도 좀 있고."
누구? 지금 나를 말하는 건가?
"그래, 임마. 너야 너."
자유가 나를 가리키자 이제 모든 사람 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얘, 말대로 네가 우리 대장을 하는 게 나아. 그리고 노아인가 노예인가 그 놈들 너무 믿지마. 별로 도움도 안되니까 우리 독자적으로 움직이자고."
"난 찬성."
자유가 손을 들자 설화 누나, 예선이가 번갈아 손을 들었다.
"음...저는..."
지혁이는 성식이 표정을 한번 살피고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성식이형도 괜찮지만.....승철이 형이 경험이 풍부하니까 믿어볼만 하다고 생각해요."
"나도 승철이형!"
"나도 승철이 오빠!"
애들마저 나를 지목하자 성식이 표정은 온갖 감정 들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그걸 보는 나는 미치기 일보직전이고....
"난 몰라. 다 들 알아서 해."
성식이는 미련없이 발을 쿵쿵 굴리며 집 밖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하지만 예선이는 고개를 저은 후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빈정이 많이 상했을 거야. 인정하기 싫겠지만 너 떠난 후에 성식이가 내 일을 대신 하다시피 했거든."
"응...괜찮아."
"어쨌든 난 머리 좀 식힌 후에 아까 그 정장입은 남자를 해부할거야."
"뭐?!"
자유가 놀라서 소리쳤지만 예선이는 검지손가락으로 자기 입술을 가리킨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남자 보통 놈이 아니었어. 마치 다른 부류랄까....아무튼 해부하고 유전자랑 조직세포 검사를 다시 해야해."
"하지만 이곳에는 그런 것을 해볼 검사 장비가 거의 없을 거야."
"괜찮아. 예전에 대학 실습때 봐둔 곳이있어. 일단 그곳으로 가야해. 난 가는동안 해부를 할 거고."
"오~꼬마. 너 옛날에 뭐 좀 됐었냐?"
설화 누나가 묻자 예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까지는 아니지만 의사 지망생이었요. 해부랑 세포 검사는 어느 정도 할 줄 알아요."
"흐음....그래? 그럼 나도 어느 정도 사람을 토막내봤으니까 도와주지."
"고마워요. 아무튼 모두 오늘 점심이 되기 전에 떠날 준비하세요. 다들 잠을 못잤지만 우리에게 지금으로서는 그건 사치에요. 승철아. 이제 네가 애들을
지휘해서 내가 알려준 장소로 떠날 준비를 해줘."
"그래...."
참으로 얼떨결이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부담스러웠지만 나를 쳐다보는 사람 들의 눈빛은 간절했다.
나에게는 이미 결정권이 없었던 것이다.
"일단..."
내가 입을 열자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다.
"차를 세대로 움직일거야. 여기 냉동차가 있으니까 그 차에는 예선이와 설화누나가 해부를 하고 자유가 운전할거고....."
말을 잠시 멈춘 나는 지혁이와 꼬마 들을 쳐다보았다.
"나머지 두대는 트럭을 가져갈 거야. 한대는 식량과 생필품을 싣고 지혁이가 운전하면서 애들을 돌볼거고, 나머지 한대는 나와 성식이가 무기를 싣고
출발할 거야."
"너 괜찮겠어?"
자유는 성식이가 아직도 마음에 걸렸는지 걱정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내가 피한다고해서 일이 해결되는 건 없을 것이다.
부딪히고 깨져봐야 무언가 답이 나오니까.
"감정의 골이 깊은 걸 방치하면 나중에 정말 더 큰일이 생길 수 있어. 게다가 나한테 생각이 있으니까 걱정하지마."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모두 이럴 시간없어요. 다 들 떠날 준비를 하자구요. 지혁이는 꼬맹이 들하고 음식과 생필품을 챙겨."
"네, 형."
"자유는 숙녀분들을 모시고 냉동차에 그 놈을 싣을 준비하고."
"오케이."
"나는 성식이하고 다시 이야기해볼게. 아무튼 1시간 뒤에 아파트 입구에 다들 차를 준비시켜서 대기해놔."
말이 끝나자 모두가 부산하게 움직였고, 나는 무기 창고가 있는 아파트동으로 향했다.
물론 성식이는 이번 일에서 제외했다.
무기야 총과 수류탄이 전부인데다가 성식이 심리상태가 불안정해서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일이었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