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 회: 라스트 데드(The Last Dead) : 시즌1_시크릿-X -- >
"....."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너무 어안이 벙벙하고 믿겨지지가 않아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도 몰랐다.
믿기 힘든 진실을 억지로 머릿속에 집어넣는 기분이었다.
"왜? 내가 악질 죄수라서 기겁했냐?"
야속하게도 그녀는 아무렇지않게 툭 내던졌지만 내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그건 아니지만 이건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무슨 음모론을 듣는 것 같다구요."
"맞아. 음모는 분명해. 하지만 사실이야."
"그럼 당신은....요?"
"내가 뭐?"
"당신은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거에요?"
"먹을게 없어서 돌아다니는데 며칠전부터 너네 들이 눈에 띄더라고. 혹시나해서 ㅤㅉㅗㅈ아가봤는데.... 그 마트가 너네
식량창고였더라."
그녀는 별거 아니라는듯 말했지만 사실 내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럼 예전에 죄수였다는 건....."
"....."
그녀는 더이상 대답을 하지 않자 분위기가 점점 삭막해졌다.
얼른 화제라도 돌리지 않는다면 이 숨막히는 분위기가 우리를 죽일것만 같았다.
"아, 아 우리 통성명 안했죠? 저, 저는 이승철이라고 해요.... 나이는 26살이고요. 직업은...."
"중국이름으로 shuo hua. 나이는 34살. 직업은 악질 죄수."
"예?"
"그냥 설화라고 불러라."
그녀와 나 사이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폭풍처럼 흘렀다.
이런 젠장.
질문 선정이 잘못ㅤㄷㅚㅆ나?
"여!"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자유가 성큼 들어왔다.
그 바람에 나와 그녀는 놀란 눈으로 자유를 쳐다보기만 했다.
"응? 둘다 표정 들이 왜그래?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 아니. 그건 아니고...."
"우하함. 줄담배만 피워서 그런지 피곤하네. 그런데 이 여자는 좀 어떠디?"
자유가 그녀를 이리저리 쳐다보며 손으로 얼굴 이곳저곳을 만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설화누나가 정상인 걸 꿈에도 생각안했나 보다.
하긴, 나도 그랬으니...
"저기...."
"야. 그래도 왕년에 한 미모했겠다."
"저기 자유야...."
"그런데 턱이 너무 날카롭다. 눈도 좀 찢어지고. 청순할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까 독기도 있어 보이는데?"
"죽고싶냐?"
"....."
그녀의 턱을 쓰다듬던 자유의 손이 순식간에 멈췄고 표정도 굳어졌다.
일 벌어졌네. 일 벌어졌어.
나는 슬쩍 일어나 그들과 약간 떨어진다음, 방바닥에 굴러다니던 식칼을 몰래 주어들었다.
자유가 좀 얄밉긴해도 저런 창창한 나이에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야! 승철아. 이 워커, 아, 아니. 여자 말도 한다?!"
"......"
자유야.
제발 상황 파악 좀 해라.
그렇게 놀란 눈으로 설화 누나를 자세히 살펴보란 말이다.
"야, 이 거지같이 생긴 새끼는 뭐냐?"
이번엔 설화누나가 험악하게 인상쓰며 나한테 물었지만 미처 대답할 틈이 없었다.
왜냐하면....
"뭐, 뭐 거지같은 새끼?"
"그래. 이 거지같은 새끼야. 니 심난한 대가리를 보니까 하는 말이다."
우리 한 성깔 하시는 설화누님.
하지만 자유 역시 화나면 물불을 안가리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나는 그저 조용히 구석에 쳐박혀 있을 뿐이다.
괜히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힘없는 양민인 내가 무슨수로 저들을 말린단 말인가?
"이, 이 여자가 미쳤나? 초면에 왜 욕을 하고 X랄이야!"
"뭐? 이 새파랗게 어린 놈의 새끼가!"
"자꾸 새끼, 새끼 할래? 내가 니 자식이야?!"
"아니, 그런데 이 새끼가!"
점점 험악해져가는 둘의 싸움에 나는 긴 한숨을 한번 내쉬고 조용히 다가갔다.
"둘 다 진정 좀 해요."
하지만 이미 불덩이가 된 둘은 내 부탁을 가볍게 무시했다.
"이 새끼가 먼저 나를 무시하잖아!"
"내가 언제 그랬어?! 댁이 나한테 먼저 욕했잖아!"
"이런 버르장머리없는 새끼가!"
"아! 자꾸 새끼 새끼할래?"
이 상태에서 그대로 놔두면 주먹다짐까지 할 기세라 나는 둘 사이로 끼어버렸다.
"둘 다 조용히 안하면 밥 안준다."
"......"
역시 사람은 생존을 위해 제일 먼저 먹어야하고 설령 먹고 죽더라도 때깔은 좋아야 한다.
확실히 이런 시국에 먹을거로 위협하니까 효과가 직빵이군.
"아무튼 두 사람 다 한 배를 탔으니까 사이좋게 지내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둘 다 무섭게 '도대체 누가?'라는 눈빛을 날렸지만 깡그리 무시했다.
"일단 이쪽은 제 친구이자 같은 생존자인 진자유에요. 이름이 진짜 자유구요... 나이는 저보다 한 살 더 많지만 생일이 늦어서
그냥 친구하기로 했어요."
"......"
설화누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홱 돌렸다.
그 바람에 자유가 욱하고 입을 열려고 했지만 나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알아차리고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쪽은 설화누나. 중국분이신데 좀 사연이 많아. 물론 바이러스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극복한 게 아니야."
"예?"
설화 누나는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고보니 자유 때문에 열받아서 벌떡 일어섰군.
"일단 둘 다 앉아. 생각해보니까 내 정체에 대해서 네 패거리 들이 혼란스러운 것 같은데.... 내가 다 설명할게."
"괜찮겠어요?"
나는 정말 누나가 걱정이 되었다.
또 다시 바이러스 때문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보다 기억하기 싫은 것들을 억지로 말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설화누나 표정은 한결 차분했고 왠지 작정한 사람처럼 보였다.
"일단."
누나가 입을 열자 자유 역시 그녀를 쳐다보며 집중했다.
"미안하다."
"예? 아, 아 저도요."
왠지 김빠지지만 설화 누나가 악수를 청하자 자유가 얼떨결에 손을 맞잡았다.
자유가 좀 성격이 더럽긴 해도 워낙 멍청한 놈이라 상대가 한템포 죽고 나오면 자기도 똑같이 죽어버린다.
"하지만 너도 사람 얼굴 이리저리 만져가면서 대놓고 호박씨 까는 거 아니다."
"예? 아, 예."
왠지 훈훈한 이 분위기.
아~ 이것이 정녕 밥의 힘이란 말인가?
왠지 우리 어머니의 힘이 대단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아무튼 내가 하는 이야기는 모두 진실이니까 잘 들어야 해."
그리고 약 1시간 동안 계속된 설화 누나의 이야기는 나와 자유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