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선생님 같은 분이 계셔서 다행입니다
다음 날.
혜민서 선생들이 모인 자리.
“어젯밤에 허준 원장에게서 받은 자료들입니다. 한번 확인해보시죠.”
늘 그렇듯이, 꼼꼼하게 기록되어있는 환자들의 상태와 한의학적인 소견.
그리고 그에 대한 처방과 그로 인한 상태 변화까지.
“허... 정말, 대단하군.”
가장 처음으로 반응한 사람은 김태식 원장이었다.
그 뒤를 이어서,
“그러게요.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에, 어렴풋이 환자분들의 상태가 호전된 것 같다고는 생각했는데... 이 정도일 줄 몰랐어요.”
“동감입니다. 거기 계신 환자분들은 대부분 난치병이나 희귀병 또는 방법이 남지 않은 환자들인데, 지금까지 이렇게 좋은 결과를 보이다니.”
“왜 그런 이상한 짓을 하나 했더니, 역시, 허준 원장님이네요.”
혜민서의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를 바라봤다.
박용준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공범이 되어서 노동을 하다 왔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거... 다른 한의사나 의사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고요한의 물음에,
혜민서의 선생들이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현대의학은 과학적인 검증을 거쳐야 했지만, 센터에는 오로지 순수하게 허준의 진료기록에 의존된 자료들이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한의학회에서도 쉽게 힘을 실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쌓인 데이터가 워낙 적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하기는? 자네들도 다 알면서...”
김태식의 중얼거림과 함께 서로가 머뭇거리는 상황.
그때, 유도진이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오늘 토론 끝내고, 올라갈 겁니다.”
“자네...?”
“선생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혜민서의 선생들을 둘러보며 유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김정우 선생님이었다면 분명 이렇게 하셨을 것이다.
멈춰있던 한의학의 발전, 앞으로 나아가는 일.
비록, 병으로 인해서 지금, 이 자리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 유지는 유도진에게 이어지고 있었다.
한때는 실리를 추구하던 유도진의 바뀐 모습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깨우기에 충분했다.
“그러게요.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나 봐요.”
“맞아. 우리가 언제 그런 거 신경이나 썼나? 안 그래요. 김 팀장님?”
한쪽에 앉아있던 김예진이 달아오른 선생들을 보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도진 선생님이 저렇게 말해주실 줄이야.’
그동안 참 많이 변하셨네.
그렇게 불타오르는 열정과 함께 마무리된 그 날 밤.
혜민서에는 새로운 사례와 진료기록들이 올라왔고,
그것을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다름 아닌 케이한방병원 김준일이었다.
“허, 이 친구들 좀 보게?”
말문이 막혔다.
이허준 이란 친구가 홀로 센터에서 숙식하며 환자들을 돌보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 친구야 워낙 환자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대단한데다, 애초에 자본주의를 벗어나 자신의 신념을 향해 나아가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혜민서에 속해있는 사람들도 제정신이 아닌 것이 아닌가.
‘이 귀한 내용을 그냥 공개한다고?’
물론, 진료 과정이나 계획, 특별한 처방은 아니었다.
그저 한의사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내용.
원래 비법이란 생각보다 간단한 경우가 많지 않던가.
답을 알고 보면 흔한 그것이 상황에 맞춰 사용하면 곧 비법이 되는 법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이것들 자체가 한의사에게 있어서는 노하우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이렇게 공개할 줄이야.
거기에 더해서 이렇게 막무가내로 공개했다는 것은,
곧, 한의사들 뿐만 아니라, 의사들 사이에서도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당연할 터.
“내가 20년만 젊었어도 함께 했을 건데.”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는 김준일.
하지만, 그런 김준일의 얼굴에는 왠지 모르게 통쾌함이 깃들어 있었다.
“보나 마나 한바탕 시끄러워 지겠구먼.”
이렇게 공개된 진료기록과 사례들은 한의사들뿐만이 아니라,
빠르게 의사들에게까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쌤. 그 커뮤니티에 올라온 한의사 기록 봤어요?”
“봤죠. 이거 제정신 아닌 사람 같던데?”
“다 죽어가는 사람들 모아놓고 대체 뭘 하자는 건지. 쯧쯧.”
“안 그래도 우리 협회에서 한의사협회에다 항의 한다던데요?”
“그래요?”
그때, 커피를 마시던 누군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혜민서에서 온 환자들이 기적적으로 호전된 경우가 많긴 했는데...”
덕분에, 한의사협회 사무실.
“네. 아닙니다. 저희가 확인한 내용은 아니고요. 네.”
"한의사협회 사무실입니다. 예. 아니에요~"
* * *
혜민서에 올라온 자료들로 인해서 인터넷에서는 갑론을박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런 거 없을 때도 자주 부딪혔던 의사 vs 한의사들의 싸움이었다.
이 특별한 내용에, 귀신같이 냄새를 맡고 취재에 들어간 방송국이 있었으니,
“다음으로는 요즘 의학계와 한의학계에서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는 이슈에 관해서 전해드리겠습니다. 혜민서란 단체에서 올린 내용인데요. 이 자료들을 보면, 굉장히 신기한 부분이 많더군요. 그래서 한의학박사 김준일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김준일 선생님.”
“안녕하세요. 케이한방병원의 김준일이라고 합니다.”
“네. 환영합니다. 선생님께서도 혜민서라는 곳을 잘 아시는지요?”
김준일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다년간의 출연으로 단련된 웃음이었다.
“물론이죠. 과거 혜민서는 조선 시대 때 만들어진 곳으로, 지금의 혜민서란 단체가 그 역할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볼 수 있겠네요. 물론, 시대가 바뀐 만큼, 방식은 달라졌지만요.”
“그렇군요. 저도 이번에 이름을 들어서 알았습니다. 봉사단체로, 굉장히 유명한 곳이더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게다가 우리 한의학계에서는 여러 사례와 치료법 등을 무료로 공개해주는 고마운 곳이기도 하지요.”
“그럼, 여기서 제가 한 가지 묻고 싶은데요, 그 무료로 공개된 자료들의 신뢰성은 어떻게 보십니까? 아시다시피, 이번에 공개된 자료에 대해서 말들이 많아서요.”
김준일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혜민서에 올라온 자료들은 전부 믿을 수 있습니다. 실제 사례들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자료들이거든요. 솔직히, 저는 그 친구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은 돈 받고도 잘 안 알려주는 것들이니까요.”
···
이런 상황 덕분에, 당연히 한방병원과 혜민서도 시끌벅적해졌다.
혜민서의 대표인 김예진에게 수없이 많은 연락이 왔으며, 사이트에도 응원한다는 댓글이나 참여하고 싶다는 내용의 연락들이 쏟아져 왔기 때문이다.
‘정말, 대단해.’
원래, 허준이 대단한 것 정도는 알았지만,
지금은 이전과 차원이 달랐다.
- 응원합니다. 선생님들.
-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 적은 돈이지만, 좋은 곳에 써주세요.
- 와 허준이라더니, 진짜 허준인가 보네요.
···
댓글들을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분이 좋아진다.
‘이거 허준 원장님도 보고 계실까?’
이런 거 잘 안 챙기는 분이셔서 모르실 텐데.
왠지, 이 기분을 나누고 싶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출근한 김예진.
평소처럼 병원장실로 향했는데,
“어, 김 팀장. 잘 왔어.”
“좋은 아침입니다. 병원장님.”
최인호가 김예진에게서 풍기는 분위기에 부드럽게 물었다.
“자네 오늘, 기분이 좋은가 보네?”
“당연하죠. TV 보셨죠? 허준 원장님이 올린 자료 때문에, 게시판에 난리가 났거든요.”
“아~ 나도 아침에 봤어. 축하하네. 덕분에, 우리 병원의 매출도 올라가겠구먼. 허준 그 친구에게 고맙다고 전화라도 해야겠어. 참, 그 서류들은 놓고 가게.”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려는 최인호.
그런데, 김예진이 그대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저... 병원장님. 오늘 하루 쉬어도 될까요?”
“왜? 자네 어디 아픈가?”
“아니요. 센터에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 알겠네.”
그렇게 병원장실을 나서는 김예진.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최인호가 중얼거렸다.
“허준, 이 친구. 환자만 홀리는 게 아니었구만.”
* * *
한편,
희귀난치병 센터에서는 경사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퇴원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정말입니까?”
“네. 정말로,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선생님...”
베체트병으로 인해 이곳에서 생활하던 황성국이 울먹인다.
고마움과 기쁨의 눈물일 것이다.
“정말 감사드려요.”
“감사는요. 여기까지 오셔서 열심히 사신 덕분이죠.”
“아닙니다. 선생님이 아니셨다면...”
“앞으로도 퇴원하셔서 관리 꾸준히 해주시면 될 겁니다. 아시다시피 베체트는 완치가 아니라 관리를 해야 하는 병이니까요.”
“물론이죠. 여기서 정말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센터의 첫 번째 퇴원환자네요. 우리 앞으로 다시는 보지 맙시다.”
허준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황성국이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렇게 이 소식은 순식간에 센터 안으로 퍼져나갔고,
“아이고~ 잘됐네. 잘됐어.”
“그럼요. 이게 다 어르신들 덕분입니다.”
“황 씨가 가면 이제 힘쓰는 일은 누가 하나?”
누군가 아쉽다는 듯이 말했고,
그 말에 다들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어르신들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가고, 우리 생각나면 놀러 오라고~”
이렇듯 센터의 첫 퇴원환자에게 모두가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그만큼 가족과 같이 생활해왔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허준의 진료실.
‘이 맥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환자 김용순 씨의 삶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선생님.”
“네..?”
허준이 김용순을 바라봤다.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괜찮습니다.”
김용순이 허준을 먼저 돌봤다.
허준의 눈빛에서 감정이 묻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이전까지 병원에서 일했을 때야, 환자와 붙어서 생활하지는 않았기에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했던 그였지만,
지금은 함께 밥을 해서 먹고, 농사도 지으며, 생활을 해나간다.
눈을 뜨고서부터 감기까지 행해지는 모든 일이 진료였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환자들도 느끼고 있었다.
그랬기에 김용순은 허준을 먼저 돌봤다.
“선생님이 말하지 않아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곳에 와서 행복한 날들을 보냈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내가 모르는 세상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난 행복합니다. 이젠 무섭지 않습니다.”
그렇게 며칠 뒤 새벽.
“선생님!”
누군가의 부름에, 허준이 눈을 떴다.
“선생님. 빨리 나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다급한 그의 말에서,
허준은 느낄 수 있었다.
김용순 환자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허준이 환자가 있는 방으로 향하니,
그곳에는 그 어느 때보다 편한 얼굴로 누워있는 김용순 환자가 있었다.
“선생님..”
그리고 그옆에는 그녀의 아들 임한용이 함께 있었다.
“네..”
허준이 호흡을 확인하고는,
“김용순 환자. X 월 XX일 02시 13분부로 사망하셨습니다.”
사망 선고를 내렸다.
그러자, 임한용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어머니... 그동안 미안했습니다. 이 못난 아들이 더, 잘해드리고 했었어야 했는데...”
펑펑 우는 그의 뒤에서,
“김용순 씨가 아들 하나는 잘 키웠다더니만.”
“용순 씨, 좋은 곳에 먼저 가서 기다리세요. 곧 따라갈 테니.”
“우리의 마음속에 함께 있을 겁니다.”
“어쩜 저렇게 편안하게 가셨을꼬...”
환자들이 모두 모여 각자의 방식으로 그녀를 기렸다.
씁쓸해하는 표정의 허준에게, 김정우가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는 할 만큼 했어. 알잖나? 하늘이 정한 것을 사람이 바꿀 수는 없는 법. 자네는 최선을 다했네.”
“선생님...”
“그러니, 그런 표정 짓지 말게.”
그렇게 아침이 되자,
김용순 환자의 임한용이 장례식장으로 떠날 준비를 마치고는 허준을 찾았다.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어머니께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런 말씀 마세요. 어머니가 웃고 계신 모습을 여기 와서 몇 년 만에 봤는지 모르겠어요. 가실 때에도 분명히 편안하게 가셨을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같은 분이 계셔서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