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자네가 해야 할 일을 하게나
다음 날 아침.
휴무를 맞이한 김예진은 언제나처럼 새벽 일찍 일어나 평소처럼 한강으로 나갔다.
‘오늘 컨디션은 나쁘지 않네.’
적당히 차오르는 숨과 흐르는 땀 그리고 달리면서 달궈진 열기.
덕분에, 아직은 차가운 새벽바람이었지만, 그것이 시원하게 느껴져 온다.
그렇게 러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김예진.
샤워하고, 머리를 말린 뒤에 화장대 앞에 앉았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평소 출퇴근했을 때 하는 화장보다 살짝 포인트를 더 주고,
이어서 드레스룸에 들어가더니, 전신거울 앞에 서서 이 옷, 저 옷을 가져다 대며 뒤적였다.
그렇게 20여 분가량을 고민하다가 알람소리가 울리자,
두가지 옷 중에서 마지막 선택을 마친 그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곧바로 구두를 신고는 주차장으로 내려가 운전대를 잡았다.
목적지는 허준의 집 앞.
출근 시간 전이라 차가 막히지 않아 생각보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한 김예진.
멈춰선 차안에서 어제 저녁 일이 떠오른다.
“김 선생님. 혹시, 내일 시간 있으세요?”
“시간이요?”
“네. 내일 휴무 맞으시죠?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가주셨으면 하는 곳이 있어서요. 아시다시피, 제가 장롱면허라서.”
‘원장님이 갑자기 드라이브하자고 하실 줄이야.’
여태 근무하면서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지만,
생각해보니 이해가 되는 상황이기도 했다.
최근에 찾아오는 환자들이 늘어나면서 업무가 많아진 탓인지,
지난번에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벽을 보고 서서 있지 않았던가.
번아웃 증후군.
그로기, 같은 상태일지도 몰랐다.
여기에 더해서,
‘김정우 선생님의 일로 스트레스를 더 크게 받으신 거겠지.'
아마, 시원한 바람을 쐬며 머리를 식히고 싶은 것일 터.
이는 비단 허준 원장뿐만이 아닐 것이다.
혜민서의 식구들 모두, 특히 유도진 원장님은 더욱 그러할 테고.
아무래도 선생님들과는 막역한 사이셨으니까.
그때,
허준이 김예진의 차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김 선생님. 빨리 오셨네요?”
“네. 차가 아직 막히지 않아서.”
“아침부터 죄송해요. 쉬는 날인데.”
“아니에요. 원장님.”
"커피 안드셨죠? 그럴 줄 알고, 제가 가져왔습니다.”
허준이 운전석에 앉아 있는 김예진에게 커피를 건넸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평소와 다른 분위기.
‘뭔가 차랑 잘 어울리네.’
“선생님. 오늘 평소랑 되게 달라 보이네요?”
“네? 아, 아니에요~ 평소랑 똑같은걸요.”
“그래요? 그런데, 구두는 왜...? 운전하기 불편하지 않나 그거...”
허준의 물음에,
김예진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그보다, 어디로 가자고 하셨죠? 강원도라고 말씀해주시고 상세 주소는 오늘 알려주신다면서요.”
“그게.. 사실, 정확한 주소를 제가 모르거든요."
운전을 할 줄 모르는 허준이 김예진을 부른 이유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택시를 타도 정확한 주소를 몰랐으니까.
"일단 이리로 가주시죠.”
이어서 허준이 이종호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답했다.
강원도와 어디 군, 면 정도까지는 확실하게 이름을 알려주었는데,
상세한 주소까지는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걱정은 없었다.
밤새 이야기를 되새기며 몇 군데를 찾아놓은 허준이었다.
김예진이 허준이 처음 불러준 주소를 입력하니,
외딴 장소가 나왔다.
“여기로요? 여기에 뭐가 있는데요?”
“그건 가면서 설명해 드릴게요.”
“알겠어요. 그럼, 안전벨트 매시고 바로, 출발할게요.”
그렇게 으르렁거리는 엔진소리와 함께 달리기 시작한 자동차는 순식간에 골목에서 벗어나 어느새 한강을 바라보며 달리기 시작했다.
* * *
“요즘 오후에는 어때요?”
“많이 좋아졌어요. 요새는 오히려 낮잠을 안 자고, 힘이 넘쳐서 노느라 바쁘더라고요. 덕분에, 밤에 몰아 자고요.”
“잘됐네요.”
“다 선생님들 덕분이죠. 감사합니다. 선생님.”
진료실 안에 있는 두 모자.
정수호와 수호의 어머님이었다.
그리고 허준에게서 인계를 받은 한의사는 다름 아닌 밥 선생.
처방을 내린 그대로 진료를 이어나가니, 어느새 또래의 씩씩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역시, 원장님이셔. 그런 처방을 내리셨을 줄이야.’
물론, 이 치료법과 진료에 관한 내용은 혜민서 식구들 모두에게 공유해줬지만,
그런데도 허준이 밥에게 인계한 이유는 하나였다.
다름 아닌, 매선법.
침 끝에 녹는 실을 묶어 처방하는 시술로, 보통은 얼굴의 주름을 개선하는 등의 미용 치료로 사용되는 시술법이었으나,
허준은 그것을 중증근무력증 환자인 수호에게 처방했기 때문이다.
이 인체에 해가 없는 실이 근육 안으로 들어가 신경을 계속해서 자극해 주었으니, 덕분에, 한결 회복속도가 빨라지게 만든 것이었다.
밥이 앞에 앉아 있는 수호에게 윙크하며 말했다.
“수호야. 앞으로 밥 잘 먹고, 운동 열심히 하고, 쑥쑥 크자.”
“네. 선생님!”
“어머님. 상태 안 좋아지면 바로 오시면 되고요. 1년에 한 번 정도만 보약으로 관리해주면 문제없을 겁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선생님들. 참, 허준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아, 원장님은 오늘 휴무입니다. 제가 대신 전해 드리도록 할게요.”
그리고 혜민한방병원 입원실.
점심시간이 시작되자마자, 유도진이 식당 대신에 입원실로 향했다.
그렇게 김정우의 방.
“선생님...”
“자네 왔는가?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나? 자네와 어울리지 않는군.”
김정우가 유도진의 표정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내시기에는 좀 괜찮으십니까?”
“아주 좋아. 수술 전후 치료 환자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하더니, 그럴 만하네. 분위기도 좋고, 근무하는 사람들도 좋아 보이니 다들 만족하는 게지. 그보다, 자 자네도 진맥 한번 해보게.”
“제가 말입니까?”
“그럼, 유도진 자네랑 나 말고 또 누가 있는가?”
유도진이 조심스럽게 맥을 잡았다.
그리고 최대한 집중하여 지금의 맥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췌장암 환자의 맥.’
김정우가 그런 유도진을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피가 섞인 자식은 아니나, 이렇듯 가슴으로 키운 자식이 아니던가.
그때,
김정우가 우욱- 하며 구역질을 하니,
“선생님!”
유도진이 놀라 김정우를 붙잡았다.
“괜찮아. 요즘 들어서 가끔 이러더군. 별일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게.”
그 말에, 평소 냉소적이고 무표정하여 시니컬한 유도진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그리고 그것을 본 김정우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껍질을 깨고 나오기 시작하는구나.’
간혹, 그런 천재들이 있지 않은가.
머리도 비상하고, 감각도 비상한데. 공감성이 결여되어 있는 차가운 사람들.
수학자라던가, 과학자, 등 다른 직업군이라면 그래도 괜찮을지 모른다.
하지만, 한의사나 의사는 아니었다.
환자에게 몰입하는 것도 문제지만,
환자를 느끼지 못하는 것도 문제였으니까 말이다.
그런 유도진의 눈빛에서 지금, 처음으로 따듯함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다행이야. 이게, 다 허준 그 친구와 어울려 다닌 탓이겠지. 그 친구가 묘하게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으니.’
유도진이 자신의 스승인 김정우를 바라봤다.
어떻게든 살리고 싶다는 감정이 동요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다.
처음 선생님의 소식을 접한 뒤부터,
밤을 새워가며 온갖 방법들을 찾아봤지만.
‘이미 늦었다.’
라는 한 가지 결론만이 남아 있었다.
만약, 조금만 더 빨리 알았었더라면.
혹은 내가 조금만 더 신경을 썼었더라면.
하는 후회가 몰려온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이 묘한 상황에서,
김정우가 유도진의 어깨를 다독였다.
“나에게 너무 신경 쓰지 말게.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거야. 자네도 머릿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세상 모든 환자를 고칠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수술 대신에, 한의학적인 치료를 받으시겠다고 결정하신 겁니까?”
“허, 자네 날 벌써 죽은 사람 취급 하는구먼?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데. 그러면 섭섭하네.”
“아,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뭐, 자네가 하고자 하는 말은 알겠는데, 알다시피 내 몸은 내가 더 잘 아네. 이미 늦었어. 나라고 죽음이 안 두려운 줄 아는가? 하나, 이미 지나간 일.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네."
김정우가 어찌할 줄 모르는 유도진을 바라보며 따듯하게 말했다.
“그러니, 자네는 자네가 해야 할 일을 하게나. 가서 쉬게. 내일도 자네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있을 테니.”
* * *
달리는 차 안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대신에,
오늘 가야 하는 곳에 관한 설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환자로 찾아온 사람 중에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어서 확인하러 가는 거라고요?”
“네. 근데 정확한 주소를 알려주지는 않았거든요. 제가 대충 추려보니, 세 군데 정도로 추려지더라고요."
“그거.. 정말, 믿을 수 있는 이야기 맞아요?”
김예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말 그대로 기운이 좋다는 곳을 찾겠다는 뜻인데, 그것을 어찌 알수 있겠는가.
“아,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믿어도 되는 거죠?"
"그럼요. 제가 언제 허튼 말 하는거 보셨어요?"
김예진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여태까지 옆에서 지켜본 바에 의하면
'거짓말은 치지 않는 사람이니까.'
이쯤 되니, 기 치료를 한다는 그 환자의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오히려 이 휴무 날에 허준과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만족한 그녀였다.
차는 막힘없이 달리기 시작했고,
김예진은 최근 병원에서 도는 소문이라던가, 분위기, 또는 혜민서와 관련된 일들을 허준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김 선생님도 총무팀과 혜민서를 이끌어가면서 스트레스가 많으셨나 보네.’
병원 이야기를 하면서 저렇게 신이 난 얼굴이라니.
그러다 마침내, 이야깃거리가 전부 끝나자,
차 안에는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창밖에는 차조차 거의 보이지 않는 한적한 숲길.
김예진이 이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창문을 열었는데, 상쾌한 바람이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와~ 확실히 공기가 다르네요.”
이는 비단, 김예진뿐만이 아니었다.
“그러게요.”
‘확실히 공기부터가 다르네.’
최근 미세먼지라던가 초미세먼지 등등의 지표상으로 보면 분명히 이곳에도 영향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런데도, 서울 도시의 공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내비게이션 보니, 거의 다 온 것 같은데요?”
“네. 앞으로 한 4분 정도만 더 가면 된다고 하네요.”
그렇게 4분 뒤,
도착한 목적지.
“여기에요?”
“네. 일단은 그런 것 같네요.”
차에서 내린 허준.
분명히 공기가 좋은데, 왠지 모르게 이곳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종호 씨의 말대로라면,
‘기운이 좋은 장소에 가면 상쾌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머리는 맑아지며 몸이 활성화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었지.’
공기가 좋은 것은 확실하지만, 그런 느낌까지 드는 곳은 결코 아니었으니까.
때문에, 허준이 김예진을 불렀다.
“여기가 아닌 것 같아요.”
“그래요?”
“네. 두 번째 장소로 가보죠.”
그렇게 도착한 두 번째 장소.
허준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알 수 있었다.
누군가 집을 지으려다가 말았는지 덩그러니 밀려있는 모양새.
그곳으로 걸음을 옮기니,
‘이런 느낌이구나.’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는 느낌일 수도 있었다.
다만, 평소에는 이것을 환자의 몸 안에서 느끼기 마련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이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손끝에서 느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번에는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아요."
“정말요? 어쩐지, 몸이 가뿐한 것 같더라니~”
‘선생님은 워낙 기운이 넘쳐서 별로 느끼지 못하실 텐데...’
어쨌거나 기분이 좋은 허준이었다.
왠지 이곳이라면 김정우 선생님을 치료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다음 날.
한방병원으로 출근하자마자 병원장실을 찾은 허준.
“좋은 아침입니다. 병원장님.”
“자네 왔나?”
“어제 제가 알려드린 장소. 알아보셨죠? 어떻게 됐어요?”
“그게... 생각보다 일이 좀 복잡해 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