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갔습니다. 휴일이라고
이수진.
총무팀에 속해있으면서, 혜민서의 업무를 일부 도와주는 그녀였기에,
손에 들려있는 책의 내용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건..? 우리 혜민서 자료랑 거의 비슷한 것 같은데?’
물론, 한의학적인 치료사례들이나 용어들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게 세세하게 알지 않아도 충분히 비슷한 점이 많았다.
“수진 씨도 그렇게 생각하죠?”
“네. 너무 비슷하네요.”
같은 의견에,
김예진이 살짝 고민하더니 결론을 내렸다.
'일단은, 병원장님과 상의해 봐야겠어.'
혜민서에 올라온 사례와 자료 중 일부는 혜민한방병원과 협약으로 인해 공유되고 있기도 하고,
이런 일은 경험이 많은 최인호 병원장의 의견을 들어 보는 게 현명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병원장실.
김예진이 오늘 올리기로 한 보고서와 다른 손에는 책을 든 채, 노크했다.
똑, 똑.
“들어오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병원장님.”
“네~ 좋은 아침.”
그런데,
최인호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피곤해 보인다.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나?’
“병원장님.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아, 요즘에 일이 많아서 피곤해서 그런 거니 걱정하지 말게.”
“그럼, 이거라도 드실래요?”
김예진이 주머니에서 작은 약봉지를 꺼냈다.
혜민한방병원의 로고가 새겨져 있는 약이었다.
“그게 뭔가?”
“이거 허준 원장님이 지난번 진료 때, 만들어주신 쌍화탕이예요.”
“그래? 그럼, 하나 빌려주겠나?”
최인호가 허준이 만들었다는 이야기에,
눈을 빛내며 답했다.
덕분에, 최인호의 앞에는 김예진이 가져온 서류와 쌍화탕.
그리고 다른 한 손에 들려있던 책까지 올라와 있었다.
최인호가 김예진을 바라봤다.
이 책이 뭐냐는 의미의 행동이었다.
“일단, 한번 봐주시겠어요?”
그래서 살펴보는 최인호.
한눈에 봐도 한의학 서적이었다.
물론, 전공 서적 같은 류의 서적은 아니고, 그냥 평범하게 책방에서 구할 수 있는 일상생활과 그 증상 예방법 및 치료방법과 결과 등을 종합해 둔 그런 책이었다.
동상과 화상 치료.
간단한 필자소개부터 이어진 목차들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몇 장을 더 넘기면서 내용을 살피니,
너무나 비슷한 점이 많았다.
“이거... 완전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와 사례들을 사용한 것처럼 비슷해 보이는 구만?"
여기서 비슷하다는 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르듯이 몇몇 표현과 순서, 또는 묘사 같은 애매한 부분들을 뜻했다.
하지만, 본질적인 내용은 전부 혜민서에 올린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한마디로 누군가 그것을 보고 책으로 엮었다는 뜻이었다.
“역시, 그렇군요. 저도 봤더니, 워낙 비슷한 것 같아서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병원장 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최인호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답했다.
“일단은 여기 적힌 출판사로 연락 한번 해봐. 이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를 해봐야겠으니.”
“그쪽에서 거부하면 어떻게 할까요?”
“그럼, 뭐. 법적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병원장실을 나서는 김예진이 눈을 빛냈다.
이 책을 본 순간, 열불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재주 부리는 곰은 질색이야.’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애먼 놈이 받아간다는 속담처럼,
군인이었었던 시절 모든 공은 자신의 상사가,
모든 책임은 자신이 졌어야 했던 기억은 잠들어 있던 분노를 깨우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혜민서는 자신뿐만이 아니라, 많은 선생님의 노력이 맺은 결실이지 않던가.
병원장실에서 나가는 김예진을 바라보며 최인호가 헛웃음을 지었다.
‘김 팀장이 화가 났나 봐?’
거의 매일같이 얼굴을 보는 사이였기에,
로봇처럼 일만 하는 줄 알았던 그녀도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표현이 좀 적을 뿐이지.’
그런 생각과 함께,
건네받은 쌍화탕을 따듯하게 덥혀 한 모금 마셨다.
그나저나 지금,
이게 문제가 아닌데.
그때,
지이잉- 거리며 스마트폰이 울었다.
유도진이었다.
기다렸던 전화다.
살짝 올라오는 긴장감에 크게 심호흡을 한 뒤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뭐? 정말인가? 그래. 자세한 이야기는 이리로 와서 듣도록 하지.”
그렇게 전화를 끊은 최인호.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뭐, 자세한 일은 유도진 선생이 오면 알 수 있겠지.
어쨌거나,
일이 이렇게 잘 풀리다니.
최인호가 들고 있던 쌍화탕을 단번에 들이켰다.
오늘따라 쌍화탕이
‘아주 달구만.’
그런 최인호의 얼굴에는,
한층 생기가 돌고 있었다.
* * *
“원장님. 지금, 어디 가시는 겁니까?”
강대준의 저택을 나선 유도진의 물음이었다.
그 물음에,
“저 오늘 휴일인데요..?”
허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답했다.
“아, 죄송합니다.”
“죄송은요 무슨, 어쨌든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네요. 오해도 풀렸고.”
“덕분에 잘 해결된 것 같습니다.”
“에이~ 우리 사이에 뭘, 정 그러면 나중에 맛있는 고기나 사주시죠. 소고기로.”
대뜸 소고기를 찾는 허준의 대답에, 유도진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불과 1시간쯤 전만 해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환자의 눈을 뜨게 만든 장본인인데,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굉장히 평범해 보였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머릿속은 더욱 복잡했다.
아침에 본 모습에서 느낀 경이로움, 그리고 그사이에 섞인 질투와 승부욕.
마지막으로 지금 느껴지는 전우애와 같은 우정까지.
허준이 유도진의 어깨를 툭 치고는,
“이만 가볼게요.”
“아, 네. 휴일 잘 보내십시오."
“선생님도 고생해주세요~ 참, 환자들 회진 때, 신경 좀 써주시고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렇게 병원으로 향한 유도진.
가는 내내 복잡한 마음은 여전히 정리가 되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아니, 머릿속으로는 어렴풋이 짐작이 갔지만,
차마 엄두가 나지 않는 그런 일이었다.
게다가 어제 말한 것처럼 진짜 누워있는 환자에게 침과 뜸을 처방할 줄이야.
그러다가 잘 못 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책임지려고.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손님. 도착했습니다.”
어느새 도착한 한방병원 앞.
유도진이 병원으로 들어서자,
1층의 인포데스크 직원들이 유도진을 살짝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서 오세요. 원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그대로 엘리베이터로 사라지는 유도진을 바라보며,
데스크의 선생들이 속삭였다.
“유 원장님도 지각을 다 하시네?”
“그러게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걸까요?”
“일단, 다른 층 선생님들에게 물어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어?”
그녀들이 이렇게 속삭이고 있을 때,
유도진은 곧바로 병원장실로 향했다.
“자네. 왔나?”
“네. 다녀왔습니다. 병원장님.”
“그래. 고생 많았네.”
최인호가 유도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더니,
“그건 그렇고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이어진 물음에 유도진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한 마디로 답했다.
“허준 원장입니다.”
“응?”
갑자기 허준 원장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이런 의문이 이어지기도 전에,
유도진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어제저녁 탕전실에서 있었던 일부터,
오늘 아침에 동행하여 환자를 깨운 일까지.
“허...”
이야기를 듣는 내내 최인호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물론, 이야기하는 유도진도 그때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게.. 사실인가?”
“네. 전부 제가 직접 보고 들은 겁니다.”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허준의 의술이 뛰어남을 넘어서 용한 줄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런 일까지 해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기에 더해서 찾아오는 괴리감은 덤이었다.
상대는 보통 환자가 아닌 VIP.
보약으로 쓰러졌다는 억지스러운 말로 전면전이라도 벌이겠다는,
그런 사람들이었으니.
‘나였으면, 절대 못 했을 일이겠지.’
아니,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환자의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위해서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물론,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은 의료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성공한다는 보장이 있지도 않은 저런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나만 이렇게 느낀 것은 아닌가 보군.’
지금, 이야기를 하는 유도진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허허... 그래서 허준 그 친구는 지금 어디에 있나?”
“갔습니다. 휴일이라고...”
그 대답에 사레가 들릴뻔한 최인호.
헛기침으로 사례를 다스렸다.
“크흠, 그래. 가서 일 보게.”
* * *
김정우와 박진석 두 노인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
“잘됐군. 정말, 잘 됐어!”
“역시, 하늘이 내린 손재주란 말인가?”
“그나저나 망설임 없이 달려드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먼.”
“그게 허준 그 친구의 최대 장점이지.”
두 한의사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한방병원 안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시작은 박용준으로 부터 였다.
최인호와 친한 선후배 사이였기에, 이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흥미가 생겼다.
방송용으로 쓰기 딱 좋은 내용이었으니까.
그래서 유도진에게 되물은 박용준.
“유도진 선생님 그 이야기 진짜예요?”
“맞습니다.”
박용준의 물음에,
단번에 답하는 유도진.
이것만으로도 이미 게임은 끝이었다.
박용준이 아는 한에 있어서는,
유도진이 맞다고 하면 맞는 것이요.
아니라고 하면 절대 아닌 것이 곧 진리였으니,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시청자 늘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들려.’
“자세히 이야기 좀 해주세요.”
유도진의 설명이 이어졌고,
그 설명을 들은 박용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엄청 놀라운 일이지만,
왠지 허준 원장이 그랬다니,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이렇듯, 한방병원에서 가장 입담이 좋은 박용준에게 이야기가 전해졌으니,
병원 안에 퍼지는 것은 당연히 시간문제.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선생님들. 그 이야기 들으셨죠?”
“허준 원장님 소문이요?”
“네. 제가 박 원장님한테 자세히 듣고 왔는데-”
“에이~ 그거 너무 과장된 거 아니에요? 박 원장님이 원래 이야기에 MSG 잘 치기로 유명하시잖아요.”
같은 반응.
그리고 혜민서 식구들은.
“역시, 원장님은 대단하시네요.”
“저 이름 바꿀까 봐요. 안 그래도, 이름이 허준이라서 가끔 환자분들이 저한테 진료받으러 오시더라고요.”
“에이~ 최허준 선생님 갑자기 약한 소리 하시네요? 환자분들 사이에서 요새 인기 많으시다던데."
“그러게 말이야. 최허준 선생 요즘에 소문이 자자하다니까? 온라인에서는 허준 원장보다 자네가 더 글이 많아.”
최허준이 쑥스러운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허준 원장님하고 유도진 원장님은 왜 안보이세요?"
“아~ 병원장님 호출이요.”
그렇게 병원장실.
허준과 유도진을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오랜만입니다. 선생님들. 그동안 잘 계셨죠?”
강기훈과 그의 여동생 강희윤이었다.
강희윤이 조심스럽게 유도진을 따로 불렀다.
“저... 유도진 선생님. 따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이전처럼 막장드라마 같은 분위기가 아닌,
굉장히 정중한 모습으로.
‘사람이 참...'
그렇게 다른 방으로 향한 두 사람.
그때, 강기훈이 허준을 불렀다.
"선생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허준이 강기훈과 눈을 마주쳤다.
굳건해진 눈빛.
이전과는 다른 그 눈빛 사이로 묘한 쓸쓸함이 묻어 나온다.
‘아무래도 좋은 곳으로 가셨나 보네.’
“선생님 덕분에, 며칠이지만, 행복했습니다.”
“아닙니다.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겁니다.”
허준의 대답에,
강기훈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요.”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받으시지요. 아버지께서 선생님께 꼭 전해 드리랍니다.”
“이게 뭔가요?”
“편지입니다.”
같은 시각.
김예진의 스마트폰으로 메시지가 하나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