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이런 시련이
김강현이 망설임 없이 지원서에 사인한 이동훈을 보며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하여간 고집은 예나 지금이나...’
최근 들어서 이전과 완전히 다른 생활을 하면서 여러모로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본질적 매력인 순둥순둥하고 선하게 생긴 마스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 설득하기에는 글렀고, 최대한 도와주는 수밖에.’
하필, 고른 드라마도 까다로운 박은숙 작가의 작품.
박은숙이 누구던가.
근 몇 년간 가장 많은 히트작을 뽑아낸 작가가 아닌가.
어떤 작품에서는 사람들을 울리고, 또 다른 작품에서는 웃게 만들기도 하는,
그야말로 장르와 관계없이 찍는 드라마마다 흥행을 일으키며 이제는 흥행 보증수표라고 불릴 정도.
‘덕분에 캐스팅도 깐깐하기로 유명하지.’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평소 배우들의 이미지에 따라 먼저 러브콜을 보내는 것은 물론이요, 오디션에도 직접 참가하여 캐스팅을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말을 바꿔말하면,
그만큼 이동훈이 따내려는 배역에 수많은 경쟁자가 몰린다는 뜻.
“동훈아, 너 그 작품 박은숙 작가 것 인거는 알고 있지?”
“물론이죠.”
“오디션 빡세게 할 텐데. 어떻게 할래?”
“걱정하지 마세요. 자신 있으니까.”
김강현의 물음에,
이동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전문직 배역.
거기다 한동안 연기를 쉬었던 그였지만, 그런데도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연기의 기본은.’
맡은 배역을 이해하며, 그 특징적인 모습을 얼마나 디테일하게 따라 할 수 있냐의 차이.
그런 면에서 자신은 한의사가 아닌 환자의 입장으로 진료실을 드나들지 않았던가.
이동훈의 머릿속에 그때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허준의 진료 순서와 대화, 환자를 관찰하는 날카로운 시각 등등.
그렇게 며칠 뒤,
오디션 당일.
박은숙이 참가한 배우들의 명단을 체크했다.
역시나 생각만큼 많은 배우가 지원했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에서 배우들이 보여준 모습들이 떠오르며, 이번 작품과 어울리는 분위기인지 파악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그려온 주인공의 모습과 대조하니, 몇몇 배우들은 벌써 어울리지 않음을 알기에 충분했다.
그동안 쌓아온 내공 때문이리라.
그렇게 시작된 오디션.
첫 번째 순서는 유명배우 백일권 씨였다.
‘남성적인 느낌이 강하긴 하지만.’
연기력도 탄탄하고, 여러 장르에서 맡은 배역을 잘 소화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래서 미리 러브콜을 보낸 배우 중 한 명이기도 했지.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백일권 씨. 바로, 시작해볼까요?”
오디션의 장면으로 주어진 짧은 대사와 연기.
백일권이 능숙하게 망설임 없이 돌변했다.
박은숙이 그 모습을 보며 흡족해했다.
지금의 모습만으로도 생각했던 이미지와 엇비슷하게 들어맞는 분위기.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면서 디테일이 추가되면 느낌을 살리기에 충분하겠어.’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그대로의 모습이 나오네요.”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결과는 며칠 내로 알려드릴게요.”
이어서 두 번째.
아이돌 출신 배우 A 씨의 연기가 이어진다.
비주얼은 최고일지 모르나, 주인공의 이미지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뻔한 한국식 로맨스처럼 보이겠군.
유명배우 B 씨.
액션 장르에서는 끝장나던 분위기가 이런 장르와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이어진 오디션의 마지막 지원자.
이동훈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이동훈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반갑습니다. 지원서에 보니 최근 활동한 작품이 몇 년 전이던데, 그럼 그동안 연기는 쉬었던 건가요?”
박은숙이 이동훈의 지원서를 한 번 더 훑어보며 물었다.
“네. 제가 조금 아팠거든요.”
“그러셨군요. 그럼, 우선 연기부터 볼게요. 시작해주세요.”
이동훈이 숨을 들이쉬고는,
오디션 파트의 장면을 시작했다.
“어서 오세요. 김 아무개 씨.”
인사와 함께,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어지는 안내.
“이쪽으로 앉아주시겠어요?”
당연히 편안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함께한다.
그런 이동훈의 눈이 마치, 환자가 앞으로 다가오는 모습을 쫓듯이 움직인다.
이어서,
그날 허준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리며 허준이 된 이동훈.
약 3분여간 정도 이어진 연기와 짧은 대사가 끝나고,
이동훈이 다시 이동훈으로 돌아왔다.
앞선 배우들처럼 수고했다는 인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짝짝짝짝-
울려 퍼지는 박수 소리.
이동훈이 부끄럽다는 듯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제야,
“정말, 잘 봤습니다.”
“그, 예전에 이동훈 씨 맞으시죠?”
“네. 배우 이동훈입니다,”
“그때와 이미지가 달라지셔서 몰라봤어요. 어쩜 연기를 이렇게 잘하세요?”
이동훈의 연기에 심사를 맡은 사람들이 놀랍다는 듯이 칭찬이 이어진다.
그리고 이는 박은숙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거다!’
이동훈이 눈으로 어딘가를 쫓는 모습부터, 대사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모습까지.
자신이 생각했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분명, 앞에 오디션을 본 배우들도 전부 잘했지만,
지금의 연기는 무언가 반 발자국 더 나아간 그런 모습이었다.
‘지금, 모습은 마치...’
박은숙이 드라마를 끝내고, 쉬면서 다음 소재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영감을 얻은 그 모습을 떠올렸다.
시작은 보조작가에게서 온 카톡이었다.
TV에서 나온 장면으로, 다큐멘터리인데,
대사는 드라마 작가가 쓴 것 같은 장면이었다.
한의사가 환자들에게 이쪽으로 오라는 그 모습.
그때의 울림에서 시작된 것이 바로 지금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때의 감동이 다시 한번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머릿속에는 내심 점찍어뒀던 배우들의 모습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잘 봤습니다. 조만간 연락드리도록 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이동훈이 힘차게 대답하며,
오디션장을 빠져나갔다.
오디션장에 남아있는 박은숙과 심사를 맡은 관계인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모두가 같은 마음인가 보네.
* * *
혜민한방병원의 병원장실.
최인호가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김 대표님이 직접 전화를 하시다니, 좋은 일이라도 있나 보네요?”
“아, 좋은 일은 아직 모르겠고,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김강현이 엊그제 전해 들은 오디션 결과를 떠올리며 답했다.
생각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조건.
아니, 애초에 조건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까다롭다고 알려진 박은숙 작가가 직접 연락해 온 것부터가 이상했으니까.
어쨌거나, 배역을 따낸 이동훈을 위해서 김강현이 직접 나선 것이었다.
“부탁이요?”
“네. 예전에 허준 원장에게 진료를 받았던 이동훈이라고 기억하시죠?”
“물론입니다.”
“그 친구가 이번에 배역으로 한의사를 맡아서요. 그래서 한동안 거기서 선생님들이 진료하는 모습을 체험했으면 합니다.”
그래서 혜민한방병원을 방문한 이동훈이 병원장실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병원장님. 이동훈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최인호라고 해요. 일단, 앉아서 이야기를 할까요?"
따듯한 차와 함께,
최인호가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제가 김 대표에게도 미리 이야기는 해뒀지만, 환자들의 개인정보는 민감한 사안이거든요. 절대로 유출되는 일이 없어야 해서요. 이건 일종의 안전장치라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이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거 허준 원장님이 전해주라더군요.”
“이건...?”
쇼핑백에 담긴 무언가를 열어본 이동훈.
안에는 80년대에 쓸 것 같은 안경집과 무스, 그리고 새하얀 가운이 들어있었다.
“이걸 왜 저에게?”
“일단 사용해 보시면 알 겁니다.”
그렇게 거울 앞에 서서 안경집에 들어있던 커다란 금테 안경에 새하얀 가운을 걸치니,
영락없이 10년은 늙어 보인다.
“생각보다 효과가 좋은 것 같군요."
최인호가 마음에 든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며,
"4층에서 기다리면 곧 출근할 겁니다."
그렇게 4층으로 내려간 이동훈.
아침 8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출근한 허준을 불렀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제 갓 출근한 허준이 고개를 돌리니,
낯익은 안경이 들어왔다.
엊그제 이동훈이 한동안 한방병원에서 체험한다고 해서 건네준 바로 그것이었다.
“이동훈 씨? 몰라보겠네요. 잘 지내셨죠?”
“그럼요. 선생님 덕분이죠. 그런데, 이 선물은 대체 뭔가요?”
“진료에 문제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협조해 주세요. 머리는 꼭 2:8로 넘기시고요."
“2:8로요?”
허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 그러면 제 진료실에는 못 들어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동훈의 기묘한 체험.
허준을 따라다니는 새로운 선생님의 등장에 여러 사람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시작은 당연히 데스크였다.
“새로 오신 선생님이신가?”
“글쎄, 스타일이 조금 촌스럽긴 한데, 이목구비 보면 훈남일 듯?”
“에이~ 딱 봐도 연세 좀 있으신 분 같은데.”
이렇게 며칠이 지나자,
한방병원에 익숙해진 이동훈이 데스크 선생님들과 종종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와~ 선생님들. 대단하시네요~?”
“아니에요. 우리보다는 진료 보시는 선생님들이 진짜 대단하죠.”
“그럼, 치료실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당연히 환자분 한 분 치료 끝나면 바로 소독하고, 정리하고 기구들도 다시 원위치로 해놔야죠.”
“우리 데스크에서도 고충이 많아요. 그래도 여긴 병원급이라 괜찮은데, 작은 한의원에서는 진상들이 진짜 많이 찾아오거든요.”
“그래요?”
···
데스크 선생님들과 친해지니,
이어서 수련의 선생님들과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휴~ 말도 마세요. 선생님이 인턴으로 오셔서 근무해 보셔야 한다니까요?”
“왜요?”
“당직서면서 환자들 보느라 피곤하지, 선생님들 강의 듣고 숙제에다가 시험준비도 해야 하고.”
그때, 따른 수련의 선생이 거들었다.
“다른 친구들에게 들어보니까, 여기가 진짜 빡세게 굴린다더라고요.”
“그래요?”
“네. 아무래도 첫 기수이기도 하고, 원장님들이 워낙 괴물 같은 분이시라. 특히, 허준 원장님하고 유도진 원장님은 다들 무서워하거든요.”
“맞아요. 이상하게 그 두 분은 약간 다른 원장님들과 다른 분위기라고 할까요?"
이야기꽃이 피어나는 만큼,
이동훈이 한방병원에 스며들고 있었다.
* * *
사람의 몸은 미리미리 시그널을 보낸다.
옛말에 이런 말도 있지 않던가.
번개가 잦으면 천둥이 친 다와 같은.
병도 마찬가지였다.
위장병이 생기기 전에는 속 쓰림이나 소화불량으로 신호를 보내고,
대장이 안 좋으면 설사나 건강하지 못한 변으로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아...”
건장한 체격을 가진 청년.
김정훈에게도 찾아왔다.
샤워를 마친 그의 눈이 욕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머리카락을 확인했다.
대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지 않는.
그야말로 건강의 모범생.
병원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검사도 해보고, 약도 먹어봤다.
하지만,
‘별 효과가 없어.’
오히려 부작용으로 피로감만이 늘어난다.
현대의학으로 할 수 없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한의학과 대체의학이라 불리는 민간요법들뿐.
그렇게 혜민한방병원을 찾은 김정훈.
굳이,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하나였다.
검색해보니 여기가 칭찬이 가장 많았으니까.
데스크로 다가가 접수를 했고,
허준이 진료실에서 차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