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책임지고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흔히 사짜가 붙은 전문직들 사이에선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한다.
“아, 내가 20년만 일찍 태어났으면 한자리했을 텐데.”
“나도 그때 태어났으면 저 빌딩도 가지고 있을 듯.”
“그러게. 황금기가 지나가서 이젠 빡세게 경쟁해야 한다고.”
의사, 변호사, 판사, 검사 그리고 한의사 등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황금기가 지나갔다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좁은 땅덩어리를 가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세계에서 손꼽히는 경제 대국으로 되는 과정을 겪은 시대였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누구나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때는 그나마 지금처럼 경쟁이 치열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하는 우스갯소리였다.
김정우와 박진석.
황금기를 거치면서 현재 70세가 넘은 두 한의사.
한 명은 침구술에 매진하였고, 다른 한 명은 탕약에 매진하여 큰 성공을 이뤘다.
한의사들이 최고로 각광받던 드라마 허준이 방영되기도 전부터 이미 둘은 환자들이 찾아올 정도로 솜씨가 뛰어난 한의사였으니까.
둘의 도움으로 많은 사람이 불편함을 해소했고,
가끔은 듣도 보도 못하는 질환을 치료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대한민국은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고, 현대의학의 발전 또한 빨랐다.
덕분에, 한의원에서의 진료도 예전과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과학적으로 검증된 현대의학으로 환자들의 숫자는 줄어 들어갔으며, 한의원을 찾는 환자들의 증상 또한 예전과 다르게 말이다.
흔히 그런 말이 있지 않던가.
현대인한테 나타나는 증상은 과거 왕족의 진료기록에서 볼 수 있는 증상들이라고.
그러던 어느 날.
왕진을 나갔다가 운명에 이끌리듯 만난 둘.
“자네가 그 유명한 박진석이군?”
“맞네. 자네가 보약을 짓는다던 김정우?”
둘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동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둘은 빠르게 친해졌고,
“내 평생 탕약을 공부해왔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더군. 끝이 보이지를 않아.”
“나도 마찬가지네. 이 침으로 많은 환자를 치료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한 환자도 많았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아쉬움.
박진석이 자신의 주름진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참, 아쉽네. 아직 가야 할 길이 먼데, 나에게 남은 길은 짧으니까 말이야.”
“어쩌겠나. 그것이 자연의 이치인걸.”
“그래서 말인데, 이제는 제자를 한 번 키워볼까 해.”
“그거 좋은 생각인데?”
그렇게 몇몇 한의사들과 같이 일을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선생님.”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다들 떠나가는 것이었다.
물론, 이해할 수 있었다.
다들 각자의 삶이 있고,
책임져야 할 무게가 있을 테니까.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어. 이제 좀 진료를 볼 정도가 되었다 싶으면 도망가버리니. 쯧쯧.”
“그러게. 제대로 약을 짓는 법을 배우려면 수없이 많은 환자를 봐야 하거늘... 다 시대가 바뀐 탓이겠지. 그래서 말인데,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다네. 한 번 들어볼 텐가?”
“좋은 생각?”
“그래. 우리가 한방병원을 만들어 보는 거지. 요새 규모가 큰 한방병원에서는 직접 한의사들의 교육을 담당할 수도 있고, 그 교육과정을 위해서 참여하려는 한의사들도 많을 테니까 말이야. 그 안에서 연구도 하고, 환자들의 진료도 보면서 한의학을 발전시켜나가자는 거지. 그리고 그것을 계속 물려주는 거야. 어떤가?”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로군. 하지만, 돈이 꽤 많이 들 텐데.”
“자네나 나나, 자식놈들 각자 앞가림할 만큼 다 컸고. 찾아보면 우리와 뜻이 맞는 분들이 계실 걸세.”
그렇게 만들어진 거대한 한방병원.
하늘이 도운 것일까. 갑자기 나타난 이허준이란 한의사의 등장으로 한방병원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데이터가 모이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새로운 치료법을 위해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기로 한 김정우.
그래서 며칠 전,
혜민한방병원 병원장실.
“혹시, 무슨 일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설명하기 좀 복잡한데-”
허준의 물음에 김정우가 답했다.
“흠... 자네 혹시, 활법이라고 아는가?”
“활법이라면.. 들어 봤습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요.”
활법.
요새는 흔하지 않지만, 간혹 길 가다 간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체형교정, 활법, 마사지, 스포츠, 교정술 등등
이런 단어들이 간판에 적절하게 섞여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활법의 역사를 따지면 꽤 복잡해진다.
과거에는 본래 무술가들이나, 또는 차력사들 그리고 스님들이 익히고 있는 건강관리법이기 때문이다.
“활법은 꽤 오랜 전통을 가진 치료법이지, 실제로 추나와 도수치료와도 비슷하고 말이야. 그래서 나는 자네가 가서 활법을 익혀 왔으면 싶네. 한의학과도 꽤 잘어울릴 것 같거든.”
허준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김정우 선생님이 직접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면 전통적인 활법이겠지.’
“안 그래도 궁금하긴 했습니다.”
“자네라면 그럴 줄 알았어. 자, 여기로 가게.”
“여기는... 절이로군요?”
“맞아. 그곳에 계신 정명 스님을 찾아가게. 연락은 미리 해둘 테니.”
“알겠습니다. 그리고 괜찮다면 저 외에도 다른 선생을 한 명 더 데려가겠습니다.”
“다른 선생?”
“네. 제가 장롱면허라 운전을 잘 못 하거든요.”
허준이 활법이란 이야기를 듣자마자,
고타법을 익히고 있는 최허준 선생을 떠올렸다.
‘활법이 추나와 도수치료 같은 개념이라면.’
분명, 최허준 선생에게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할 터.
그 덕분에 산에 오르고 있는 두 한의사.
허준이 눈앞에 보이는 절을 바라보며 외쳤다.
“최 선생님. 빨리 오세요. 다 왔어요!”
최허준이 앞서 올라간 허준을 바라봤다.
땀 한 방울 흐르지 않는 얼굴.
‘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지.’
운동을 즐기신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본 것 같은데,
이상하리만치 체력이 좋다.
아니, 대놓고 좋았다.
여기까지 오면서 쉬지도 않았기 때문이리라.
‘난 그래도 김명훈 관장님한테 PT까지 받는 중인데.’
설마, 보약 때문에?
생각해보니, 허준 원장님이 종종 보약을 직접 달여서 가져가지 않던가.
‘그렇다면 나도 한번?’
그렇게 계단을 올라 절에 도착하니,
살짝 흐른 땀 위로 시원한 바람이 스며든다.
그 상쾌함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허준이 먼저 최허준을 불렀다.
“이쪽은 최허준 선생입니다.”
“반갑습니다. 정명이라고 불러주십시오. 날이 선선하니, 안으로 드시지요.”
* * *
정명이 눈앞에 있는 두 한의사에게 차를 건넸다.
좌측에 앉은 최허준 시주.
‘눈에 힘이 있고, 기운이 넘쳐 보인다.’
활법을 익히기에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네.
이어서 오른쪽에 앉아 있는 이허준 시주.
본래, 연이 있던 한의사 선생에게 부탁을 받은 것은 이쪽인데,
얼핏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묘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산속에서 지내다 보면, 여러 가지를 깨닫게 되기 마련.
특히 자연의 이치를 직접 몸으로 느끼게 되는데,
왠지 지금 앞에 앉은 이허준이란 시주에게서는 오랜 시간 도를 닦은 노승과 같은 눈빛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허어~ 참으로 놀랍도다.’
보통은 속세에 있으면 그곳에 찌들기 마련인데.
허준이 자신을 바라보는 정명에게 말했다.
“김정우 선생님께서 이리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네. 연락 받았습니다.”
“스님께서 활법으로 사람들을 치료해주시고 계시다고 하시더군요.”
“하하, 과찬이십니다. 여기까지 올라올 정도의 사람이라면 이미 환자가 아닌 게지요.”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군요.”
“저는 그저 인연이 되는 사람들에게 살짝 도움을 줄 뿐입니다.”
허준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보통 사람이 아니군.
“이야기가 나온 김에, 바로 시작해볼까요?”
그렇게 시작된 활법의 시범.
최허준이 시범을 위해 엎드렸다.
정명 스님이 그 위로 올라가 교정을 시작했다.
‘확실히 도수치료나 카이로프랙틱 추나와도 비슷하네.’
하긴, 생각해보면 손으로 몸을 만져 고친다고 해봐야 어느 나라든지 거기서 거기가 아니겠는가.
“우리 최 시주님께서는 이쪽으로 몸을 많이 쓰시는군요.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 주십시오.”
“스읍~ 후우~으어?”
허준이 그것을 보며 단번에 묘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치, 추나와 침 치료를 함께 하는 것 같은 경맥의 흐름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경맥의 흐름에 영향을 준다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활법에서 사용하는 여러 방법을 보며 무언가 깨달은 허준.
‘밀고, 당기고, 고타법의 파동 이런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인체는 말 그대로 작은 우주.
이곳에서 이쪽으로 일으킨 파도가 몸 곳곳으로 퍼져나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렇게 깨달음과 함께 한참을 지켜보니,
정명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 되셨습니다. 내려가는 길이 수월해지셨을 겁니다.”
최허준이 천천히 일어나 몸을 움직여보더니,
“와... 엄청 개운하네요? 상쾌한 느낌이 들어요. 원장님도 한 번 받아보실래요?”
“최 선생님. 우리는 받으러 온 게 아니라, 배우러 온 겁니다.”
“아, 참. 그렇죠.”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정명이 말을 이었다.
“가르쳐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무언가를 익히는 것에 있어서 시간이 필요한 법이지 않겠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일단은, 한번 해보시지요. 제가 직접 느끼며 알려드리겠습니다.”
정명이 엎드리고, 허준이 정명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무리 완벽한 사람이라고 해도 좌우대칭인 법은 없었으니,
평생 수련을 해온 정명 또한 마찬가지.
허준이 그것을 찾아내어 말했다.
“스님께서는 왼쪽으로 살짝 휘신 것 같습니다.”
“네.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그럴 땐 아까 제가 했던 반대 방향으로 하시면 됩니다.”
“시작해보겠습니다. 숨을 내쉬어 주십시오.”
조금 전에 깨달은 것들을 섞어 그대로 행동으로 이어나갔다.
손을 타고 느껴져 오는 감각들.
그리고 이 순간.
아래에서 허준의 손길을 느낀 정명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극과 극은 통한다더니, 이미 깨달음을 얻은 시주였구나.’
허준에 이어서 최허준까지 실습을 마친 뒤,
정명이 마중 나오며 책을 한 권 건넸다.
“스님. 이건...?”
“이곳에서 내려온 활법의 기록입니다. 잘 사용해주시고 돌려주셔야 합니다.”
“이런 귀한 것을...”
“아닙니다.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진정 귀한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최허준이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명이 그런 최허준을 부르며 말했다.
“참, 최 시주님께서는 휴일마다 올라오시지요. 아직, 가야 할 길이 먼 것 같습니다.”
최허준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허준이 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미타불.”
* * *
그렇게 휴일을 마치고 출근한 허준.
점심시간이 되자, 각 층의 선생들이 최허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기 바빴다.
허준이 일방적으로 최허준 선생의 휴일을 조정하면서까지 함께 움직였기 때문이리라.
그때마다 최허준은,
“산에 갔었어요.”
“산이요? 산에는 왜요? 허준 원장님 취미가 등산이셨어요?”
“그건 아니고...”
설명하기 바빴고.
마지막에는.
“그럼, 앞으로 휴일마다 산에 가야 하는 거예요?”
“네...”
풀이 죽은 듯이 답하는 최허준.
허준이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 선생님을 위해서 그런 겁니다.’
마음속으로 응원을 했다.
이어서 오후 진료시간.
늘 그렇듯이 많은 환자의 진료를 이어나가는 와중에 올라온 차트.
박세정. 젊은 친구인데,
증상에는 피부병이라 적혀있다.
‘보통 한의원에 오는 피부병 환자는 무좀이라던가 건선, 습진 또는 사마귀 등인데.’
접수할 때, 데스크에서 분명 확인했음에도 이렇게 피부병이라 적어 놨다는 것은 일반적인 질환이 아니라는 뜻일 터.
허준의 메시지와 함께,
박세정이 진료실로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이 눈 주변과 뺨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나타난 퀘스트.
'진료를 시작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