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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하는 한의사-189화 (189/230)

189화. 준비하셔야 할 것 같아요

솔직히 남들보다 잘살았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아왔다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번듯한 직장과 따스하게 등을 뉠 수 있는 집.

그리고 그 집에서 인생의 반을 자신과 함께하기로 약속한 부인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까지.

물론, 이제는 머리가 좀 커서 그런지 어릴 때와 같은 귀여운 맛은 없었지만.

그래도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이뻐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들 이렇게 살고 있었으니까.

그러던 이재웅의 삶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불과 1년 전쯤이었다.

“이재웅 씨?”

“네?”

“검사 결과 간의 상태가 좀 안 좋네요. 기능이 많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과도한 음주 및 흡연을 자제해 주시고, 충분한 휴식과 운동을 권해드립니다.”

평생 건강하게 살아왔던 그에게 노랑 신호등이 들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대한민국의 가장이라면 간이 피로한 것 정도는 패시브지 않던가.

이런저런 회식에, 남들과 경쟁하려면 야근은 필수. 여기에 더해서 진급을 위해서는 친목까지.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큰 병원에 가서 검사했음에도 특별한 병의 진단을 받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간이 안 좋다는 비슷한 이야기뿐.

조금 조심하면 되겠지.

그때부터였다.

시력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한 것은.

처음에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야근 좀 하고 잠을 제대로 못 자다 보면 눈이 살짝 뽀얗게 보인다던가, 불빛이 번져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은 평소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나이쯤 되면,

‘노안이 올 때가 되긴 했네.’

그래서 안과에 찾아간 이재웅.

검사 결과 노안에 난시도 살짝 있다고 한다.

이 나이에 수술할 수는 없고,

그렇다면 당연히 안경을 써야겠지.

그렇게 생전 처음 써보는 안경.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금방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뭐야?”

잠에서 깬 이재웅이 세수를 하고 안경을 썼는데,

안경을 쓰기 전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닌가.

렌즈에 기스라도 났나.

그런데 이게 웬걸.

“시력 검사 다시 한번 받아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렌즈에는 문제가 없어요.”

“네?...”

안경집을 찾아가니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안과를 갔더니 이번엔 큰 병원으로 가보라며 의뢰서를 써준다.

그리고 큰 병원에서도 딱히 이상한 것은 찾아내지 못했다.

“시력이 이렇게 갑자기 안 좋아지셨다고요?”

“네. 처음 노안이 와서 안경을 맞췄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이렇게...”

“일시적인 현상일 수 있어요. 안경을 처음 써보시는 거라고 했죠? 그러면 아무래도 눈에 피로가 더해져서 그럴 수도 있고요. 검사 결과는 딱히, 특별한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거든요.”

이때만 해도 그 이야기를 듣고 안도할 수 있었다.

검사 결과 특별한 이상이 발견되지도 않았다 하고, 실제로 며칠 뒤에는 다시 이전의 시력으로 돌아왔으니까.

문제는, 그 뒤였다.

처음 느꼈던 그 감각이 몸을 서서히 조여오는 것처럼 이재웅의 눈은 서서히 나빠지는 중이었다.

병원에서도 여러 검사를 해봤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이상하네요. 검사 결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아무래도 유전병이나 희귀병인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정밀 검사를...”

이제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 이야기.

가족들에게 대체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평화로운 삶과 가정이 깨지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래서 굳게 마음을 먹은 이재웅. 혼자서 이 싸움을 이어나가기로 결정했다.

인터넷에서 이런저런 사례들을 전부 검색해서 확인하고,

혹시나 해서 눈에 좋은 영양제라던가 운동도 함께했다.

그러던 와중에 발견한 어떤 블로그의 한 문장.

“예전 허준한의원에 있던 허준 원장님 덕분에 딸 아이의 병을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눈이 그 아래의 내용을 받아들인다.

-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딸은 매일같이 손가락이 탱탱 불고 염증으로 고통에 시달렸었는데, 동네에 소문 듣고 찾아간 한의원에서 그 이유를 밝힐 줄이야.

처음에는 그 원인을 듣고 황당했습니다. 허리가 삐뚤어져서 그렇다네요. 당연히 헛소리인 줄 알았죠. 우리가 한두 번 속는 것도 아니고, 보나 마나 약 팔려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손가락이 아픈데 척추가 안 좋아서 그랬다고?’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금 자신의 상태도 말이 안 되기는 매한가지.

그 아래로 많은 댓글이 달려있었다.

보통 이런 글에는 반응이 없던가 광고 또는 의문을 제기하기 마련인데, 여기는 오히려 동조하는 내용의 글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중에서 찾을 수 있는 혜민한방병원의 이름.

한방병원에 도착한 이재웅은 꽤 오랜 시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인터넷에서 찾았던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시력이 떨어지셔서 오셨다고요?”

“네. 저는 지금, 시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증상을 조금 더 자세하게 말씀해주시겠어요?”

이재웅이 그간 있었던 일을 허준에게 설명했다.

허준이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정리해나가기 시작했다.

‘굉장히 꼼꼼한 성격이시네.’

환자 대부분이 증상을 대충 설명했지만,

이재웅 환자는 사소한 일들까지 하나하나 놏치지 않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을 듣자,

뭔가 알아차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허준.

‘눈은 간의 구멍이라고 했지.’

동의보감에 나오는 말이다.

그만큼 간과 눈은 밀접한 관계라는 것.

물론, 당연히 오장의 균형인 목화토금수의 이치도 함께다.

그러므로 간이 가지고 있는 목의 기운과 밀접한 수의 기운을 가진 신장이 서로 물리는 관계였으니 염두에 둬야겠지.

간과 신장이 건강하면,

눈이 맑아지고 어둠이 걷힌다는 것이 여기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두 손을 이리로 올려주시겠어요?”

이어진 진맥.

역시나 예상대로다.

‘간의 기운이 허하다.’

당연히 신장의 기운 또한 매한가지.

하루이틀사이에 나빠진 것이 아니란 뜻이었다.

경맥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허준에게는 지금의 문제가 한눈에 들여다보였다.

물론, 이전에도 간의 허증으로 찾아온 수많은 환자가 있었지만, 왜 이재웅 환자의 증상만 다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얼굴이 제각각이듯, 몸의 반응도 제각각인 것이 세상의 이치.’

즉, 어떤 사람은 같은 간의 허증으로 피로감과 무력감 또는 근골격계나 다른 증상들이 나왔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환자의 경우에는 그것이 눈으로 나타났다는 뜻이다.

간과 신장의 보신을 위해서는 보약을 처방해야 할 것 같네.

허준이 천천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예전에 검사하셨을 때, 간의 기능이 많이 떨어져 있다고 안내받으셨죠?”

“네. 맞습니다.”

“지금 시력이 이렇게 급격하게 떨어진 것도 바로 간의 영향인 것 같습니다.”

“간이요?”

“네. 한의학에서는 눈을 간과 아주 밀접한 관계로 보거든요. 일단은 간이 굉장히 안 좋은 상태입니다. 한의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간의 기운이 굉장히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죠. 가장 좋은 치료방법은 보약으로 허해진 간에 기운을 북돋아 주는 겁니다.”

보약이라는 단어에 이재웅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이야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비싼 것, 그리고 그 비싼 것을 떠나서 간이 안 좋을 때, 술은 기본이고 한약도 조심하라는 글귀가 떠오른다.

“간이 안 좋은데, 보약은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그러다가 괜히...”

그 대답에 허준이 단번에 심리를 꿰뚫었다.

아무래도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찾아오는 환자 중에는 이런 경우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럴 땐, 환자와의 신뢰 관계를 먼저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렇다면 침과 뜸을 이용해서 먼저 호전시켜서 신뢰를 얻는 것이 우선일 터.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은 침과 뜸으로 치료를 시작해보도록 하죠.”

“침과 뜸이요?”

“네.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자면, 무릎 뒤쪽에 있는 음곡혈이라는 곳과 앞쪽의 곡천혈이라는 곳에 뜸을, 여기 손목에 있는 경거혈과 발목 앞쪽의 중봉혈에 침을 놓을 겁니다.”

“정말, 그게 전부인가요?”

“한군데 더요. 여기에 더해서 정명혈이란 혈에 시침할 생각입니다.”

“정명혈이요?”

허준이 차트에 그려진 인체도의 얼굴 쪽에 점을 찍었다.

그리고 그 점이 찍힌 곳과 허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는 이재웅.

당연한 일이었다.

정명혈은 눈과 코 사이에 움푹 들어간 부위에 있는 혈 자리였으니까.

“정말, 여기에다 침을 놓는다고요?”

“네. 한 요정도 들어갈 겁니다.”

허준이 엄지와 검지를 벌려 대략적인 거리를 표현했다.

수치상으로는 1치 5푼, cm로 따지면 무려 4.5cm가량 침이 들어간다.

이곳에 자극을 주어 눈에 흐르는 경맥의 흐름을 원활케 하고 간과 신장이 원래의 컨디션을 회복한다면 분명히, 잃어버린 시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이재웅이 살짝 겁에 질려 물었다.

“혹시, 보약을 먹으면 침은 안 맞아도 되는 겁니까?”

“아닙니다. 보약과는 상관없이 이곳에는 무조건 침을 놔야 합니다. 그만큼 치료에 있어서 중요한 자리죠.”

“그... 위험하지는 않겠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이재웅 씨의 도움이 조금 필요합니다. 제가 침을 놓을 때, 신호에 맞춰서 눈동자를 돌려주셔야 하니까요.”

별거 아니라는 듯한 허준의 설명과 태도에 이재웅의 머릿속이 복잡해져 갔다.

그래. 인터넷에서 찾아본 수많은 정보가 있지 않던가.

‘분명, 침을 엄청 잘 놓는다고 칭찬하는 글이 대다수였어.’

“알겠습니다.”

“나가셔서 데스크로 가시면 치료실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곧 뵙도록 하죠.”

그렇게 이재웅이 사라지고,

허준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모아둔 포인트를 사용했다.

‘조금 아깝기는 하지만.’

원래라면 침술을 올리고 싶었으나, 현재의 침만으로는 지금 이재웅 환자에게 도움이 되기에는 부족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침은 보사중 기운을 빼내는 사의 기능이 뛰어나지만,

뜸은 반대로 기운을 불어넣는 보의 효능이 뛰어났으니까.

「‘구술 Lv. 8’에 50000포인트를 사용합니다.」

「‘구술 Lv. 8’이 ‘구술 Lv. 9’가 되었습니다.」

[구술 Lv. 9]

- 온열 효과가 극대화된다.

- 기의 흐름에 도움을 준다.

침술에 적힌 설명과 같은 문장.

하지만,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는 허준이었다.

하나는 빼서 흐름에 도움을 줄테고,

다른 하나는 채워서 흐름에 도움을 줄테니까 말이다.

‘이거면 충분하겠어.’

그럼, 가볼까.

허준이 치료실로 향했다.

*   *   *

“박 쌤. 아까 있었던 일 들었어요?”

“무슨 이야기요?”

“제가 좀 전에 4층에 있는 김 쌤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환자가 시력이 나빠져서 왔다고 접수를 하더래요."

“시력이요?”

“네. 거기서부터 벌써 이상하잖아요? 누가 눈이 나빠졌다고 한방병원에 찾아오겠어요? 안과에 가지. 하여튼 그래서 허준 원장님이 진료를 보셨는데. 글쎄... 침을 여기 눈에다가 이렇게 푹 하고 찔렀다던데요?”

“정말요? 그래서 그 환자분은 어떻게 됐어요?”

“그게... 멀쩡하게 걸어 나가더래요.”

이렇게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는 와중에,

회진을 돌고 있는 허준.

“윤 선생님. 기분은 좀 어떠세요?”

배가 부풀 대로 부푼 윤다희가 웃으며 허준을 반겼다.

“원장님. 너무 좋아요. 원래 굉장히 움직이기도 힘들고, 피곤하다는데. 여기 시설도 좋고, 선생님들도 많이 도와주기도 하고요.”

“다행이네요. 그럼, 어디 진맥 한 번 잡아볼까요?”

허준이 윤다희의 맥을 잡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건강한 맥, 그리고 그 맥 사이로 또 다른 맥이 느껴져 온다.

‘아기도 건강하네.’

그때, 미세하게 느껴지는 감각.

며칠 전 진료 때와는 달라진 묘한 흐름이었다.

‘이건...’

허준이 맥을 잡고 있던 두 손을 놓고는,

웃으며 윤다희에게 말했다.

“윤 선생님.”

“네?”

“슬슬 준비하셔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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