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내가 이래 봬도 한 때는 날아다녔다니까
허준이 짧게 대답하고 그대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바라본 박영철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과연, 소문 그대로네.’
허준에 관한 소문 중에는 당연히 이런저런 질환이나 지병을 치료해 용하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그 외에도 강직하고 우직한 굽힐 줄 모르는 성격에 관한 이야기들도 있었다.
돈을 많이 준다고 먼저 치료를 해주지도 않는다던가,
이전부터 따로 VIP라 불리는 환자들을 나눠두지 않는다든가 하는 등의 소문 말이다.
여기에 더해서 과잉진료를 권유하지 않는다는 소문도 함께였으니,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사람이야.’
그리고 이런 사람을 섣불리 건드린다는 것은 되레 화를 부르게 될 터.
그때, 허준이 건물로 들어서자 같이 선거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허, 어이가 없네. 우리 의원님이 어떤 분이신데.”
“하여튼 요즘 젊은 친구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대체 기본이 안 되어있어. 기본이.”
“그러게 말입니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인데. 쯧쯧.”
그들을 바라보는 박영철의 눈이 매서워졌다.
비록, 같이 운동을 하고는 있으나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적인 관계일뿐.
‘이렇게 눈치가 없는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한다니.’
그 눈빛을 느낀 탓일까.
그중에서 한 명이 놀라 되물었다.
“아니, 의원님 속이 많이 상하셨나 봅니다?”
그러자, 박영철의 표정이 순식간에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
“아닙니다~ 목이 따끔거려서요. 자, 이어서 해볼까요?”
그날 저녁.
진료 마감 시간이 되어갈 때쯤.
허준의 진료실 모니터에 박영철의 차트가 올라왔다.
허준이 치료실에서 치료를 마치고 나와 손 소독제를 바르면서 메시지를 보냈다.
문이 열리고,
아침에 만났던 박영철과 다시 만나게 된 허준.
“어서 오세요. 박영철 씨. 이리로 앉으시죠.”
“안녕하세요. 이허준 선생님. 아침에 뵙고 또 뵙네요.”
박영철이 사람 좋은 얼굴로 인사한다.
역시나 정치인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발걸음을 옮겨 진료실을 두리번거리면서 의자에 앉았다.
“진료실 분위기가 아주 좋은데요? 이래서 환자들이 허준 선생님을 좋아하나 봐요? 저 접수하고 꽤 오래 기다렸거든요.”
“환자가 많다 보니.. 그리고 진료할 때, 편안한 분위기는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요. 접수하신 내용을 보니까 목이 아프셔서 오셨다던데, 어떻게 아프신가요?”
“뭐랄까.. 이게 목이 좀 따끔따끔한 것 같기도 하고,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목소리가 계속 갈라지고요.”
“확실히 그렇게 들리는 군요.”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하면서 들리는 목소리 사이사이에 쉬어있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다른 곳은 괜찮으신가요? 몸에 열이 조금 있다던가, 머리가 지끈거리던가 한다는 거요. 날씨가 쌀쌀해서 온종일 밖에 서 계셨으면 꽤 추우셨을 텐데.”
“그 이야기를 들으니, 몸도 좀 으슬으슬한 것 같기도 하네요.”
“일단은 제가 한번 보도록 하죠.”
허준이 손바닥으로 박영철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열기가 살짝 있네.’
감기 기운이 있는 듯싶다.
다행히 심한 편은 아니고, 하루 푹 쉬면 괜찮아질 정도의 약한 기운이다.
“손을 이리로 올려주시겠어요?”
이어서 진맥.
특별히 그렇다 할 만큼 나쁜 것은 없었지만,
딱 한군데 위장으로 흐르는 기운의 흐름이 정체되어 있었다.
위장은 음식물을 소화 시켜 모든 장부에 기운을 공급하는 장부.
그런데, 다른 장부들이 멀쩡한 데 반해서 이렇게 위장만 안 좋게 느껴진다는 것은.
어떤 지병의 초기증상이거나.
외부요인으로 인해 최근에 안 좋아졌다는 뜻일 터.
“최근에 뭐 체했다던가, 속이 더부룩하지는 않으십니까?”
“그걸 어떻게?”
허준의 물음에 박영철이 살짝 놀랐다.
속이 더부룩하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추운 데서 오래 서 있다 보니까, 소화가 좀 덜 되는 기분이기는 합니다.”
“그렇군요.”
“그보다 이 꽉 막힌 목소리만 시원하게 뚫어줬으면 좋겠네요. 용각산으로도 뚫리지를 않으니...”
“용각산이요?”
“네. 아무래도 이런 시기에는 필수용품이죠. 워낙 인사도 많이 해야 하고 소리도 쳐야 하고 하니까요.”
그 대답에서 정답을 알아낼 수 있었다.
범인은 용각산. 용각산에 들어있는 다량의 사포닌을 대사시키지 못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래서 위장이 이렇게 되었던 거였군.’
그렇다면 처방은 간단하다.
위장으로 흐르는 족양명위경 위정격 혈 자리를 침으로 다스려 흐름을 돕고, 갈라지고 탁해진 목소리에는 위장에 영향을 주지 않는 향성파적환을 사용하면 될 터.
“알겠습니다. 일단은, 침 치료와 향성파적환을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막힌 피리를 뚫어서 소리를 내게 하는 약이라고 효과가 좋을 겁니다. 거기에 더해서 오늘처럼 밖에 오래 서 계신 날에는 꼭 따듯하게 푹 쉬시는 게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집안에서는 말을 최대한 줄이시고요. 그럼, 치료실로 가실까요?”
* * *
며칠 뒤,
선거운동 현장.
유동인구가 많은 강남역 입구 앞에서 또다시 두 색깔의 후보가 맞붙게 되었다.
벌써 며칠째 이어진 강행군.
그동안 함께 한 사람들의 얼굴에 피로감이 서려 있었다.
“날이 좀 춥지만, 오늘도 파이팅 합시다!”
박영철의 말에 사람들이 한껏 파이팅을 외쳤다.
전형적인 리더십의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을 반대편에서 지켜보는 또 다른 남자.
“영철이 쟤는 대체 뭘 먹어서 저렇게 건강해? 목소리도 멀쩡하고 얼굴도 훤해진 것 같은데?”
“의원님. 혹시... 며칠 전에 기억나십니까? 한방병원에서요.”
“한방병원?”
“네. 거기 있는 이허준 선생이라고 유명한 한의사가 있는데, 거기서 진료를 받고 나왔다더라고요.”
“그래?”
김준식이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몸에 좋다는 것은 자고로 나눠 먹어야 맛있는 법.
그렇게 김준식이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차를 타고 향한 한방병원 1층 로비.
데스크의 여직원이 친절하게 맞이했다.
“아~ 내가 컨디션이 조금 안 좋아서 진료를 좀 볼까 하는데.”
“아 그러셨군요? 혹시, 예약은 하셨나요?”
“아니. 그 여기에 이허준 선생이라고 있지? 그 친구를 만나려면 몇 층으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허준 원장님은 4층에 계시는데, 진료 접수를 해드릴까요?”
“그렇게 해줘요.”
그래서 찾아간 4층.
점심시간이었지만, 꽤 많은 사람이 기다리는 중이었다.
김준식이 옆에 서 있던 보좌관에게 턱짓하자,
보좌관이 데스크로 향했다.
“네~ 어떻게 오셨을까요?”
“우리 의원님께서 진료를 받으려고 하는데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김준식 의원님입니다. 며칠 전에 여기 앞에서 선거운동도 하셨던.”
“아, 여기 있네요.”
보좌관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속삭였다.
“저희 의원님께서 바쁘신 몸이라서 그런데, 혹시, 바로 진료를 볼 수는 없을까요?”
“죄송합니다. 그건 조금 곤란할 것 같아요. 앞에 먼저 오신 환자분들이 많으셔서요.”
“그건 저도 압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드리는 거잖습니까.”
그때 막, 점심을 먹고 돌아온 허준.
웬 남자가 데스크의 선생에게 속삭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허준이 다가가 말했다.
“선생님. 무슨 일 있으세요?”
“아, 원장님. 그게...”
남자가 고개를 돌려 허준을 보더니,
“이허준 선생님이시죠?”
“네. 제가 이허준입니다.”
“저는 김준석 의원님을 보좌하고 있는 이윤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의원님이 선거운동으로 바쁘셔서 혹시,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까 해서요.”
“도움이라면...?”
이야기가 이어지는 와중에 답답했는지,
김준석이 직접 걸어와 허준을 불렀다.
“이허준 선생이죠?”
“네. 그런데요?”
“김준석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네. 반갑습니다.”
“제가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런데, 진료를 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접수하시고.”
허준이 모니터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기에 접수번호 뜨면 진료실로 오시면 됩니다.”
“에이~ 제가 우리 이허준 선생님에게 관심이 좀 많습니다. 여기저기에 아는 지인들도 많고, 선후배들도 많-”
“저는 별로 관심 없습니다. 곧, 진료 시간이 다 되어서.”
그렇게 뒤돌아서서 진료실로 향하려는데,
김준석의 말이 들려온다.
“이허준 선생님. 정말, 이렇게 나오실 겁니까?”
허준이 다시 돌아와 김준석에게,
“혹시, 지금 갑질하시는 겁니까?”
“갑질이라니요. 그냥 서로 좋게좋게 가자는 거죠.”
“말씀드렸다시피, 곧 진료 시작입니다. 선택은 우리 김준석 의원님이 하시는 거고요.”
허준이 한 번 더 뒤돌아 그대로 진료실로 들어갔다.
그 모습에 이윤호가 어이없다는 듯이 허- 하고 바라봤다.
‘대체, 뭘 믿고 이러는 거야?’
김준석의 표정도 당연히 좋을 리가 없었다.
이런 대우를 받다니.
그러나 여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이 보좌관. 그냥 가지.”
그렇게 병원을 나선 김준석과 이윤호.
이윤호가 눈치를 살폈다.
이런 일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위인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이허준 저 친구 너무 시건방진 것 같다고 생각되지 않나?”
“네. 맞습니다. 어떻게 의원님에게...”
“그냥 넘어가기에는 기분이 좀 그렇네. 뭐라도 털어봐.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은 없으니까.”
“네. 의원님.”
그리고,
이 이야기는 데스크 선생들을 통해서 병원 곳곳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 *
“선생님들 그 이야기 들으셨죠?”
“그럼요.”
허준의 이야기가 병원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당연히 이 이야기는 데스크의 직원들뿐만 아니라,
“박 원장. 이거 이러다가 큰일 나는 거 아니야?”
김태식이 박용준에게 물었다.
“에이~ 원장님. 요새 시대가 어느 때인데요. 그나저나 허준 원장님 정말 멋지네요. 의술만 멋진 게 아니라 사람도 멋있어... 역시, 최고.”
박용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느긋하게 말하자,
“허준 그 친구답기는 한대. 그래도 그렇지. 상황 봐가면서 그래야지. 정 애매했으면 병원장에게 연락이라도 해보고 그랬어야 하는 거 아니야? 찾아보니까, 그 양반 꽤 끗발 있는 양반이던데.”
“그래 봐야 뭐 어쩌겠어요? 우리가 진료 거부한 것도 아니고,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건 그렇지만... 난 아무래도 걱정돼서 그래.”
물론, 유도진과 이두철이 있는 층에서도 이 이야기는 이어졌다.
“허준 원장님 별일 없으시겠죠?”
“그럴 겁니다.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 말고, 이 처방전 탕약이나 부탁드립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원장님.”
정작 허준 본인은 별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진료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덕분에,
보유 포인트 : 43924
이만큼이나 모인 포인트.
확인을 하는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실시간으로 포인트가 올라가는 중이다.
그만큼 환자들이 치료를 받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 시각 병원장실.
최인호가 창밖을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역시, 허준 그 친구답구먼!”
그런 최인호의 뒤에 서 있던 김예진.
“병원장님. 걱정되지는 않으십니까?”
“걱정? 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잖나.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대책을 세우는 것이겠지.”
“그럼, 일단은 제가 CCTV와 당시 근무하던 데스크 선생님들에게 말해서 자료로 사용할 수 있게 남겨두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김 팀장이야. 그럼 나도 여기저기 한번 알아보도록 하지. 별일이야 있겠냐마는.”
그리고 이 이야기는 병실에까지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 의원이란 양반이 와서 새치기하고 싶다고 대놓고 말했다. 이말 아니야?”
“맞지. 그래서 안 된다고 했더니, 얼굴이 이렇게 시뻘게지면서 병원을 나가더래.”
“꼴 좋다. 우리 허준 선생님이 어떤 분인데.”
“암~ 그렇고말고. 그분이 보실 때에는 그냥 다 똑같은 환자라니까?”
그때, 한구석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노인이 어디론가 메시지를 보냈다.
이어서 병실에 있던 한 환자가 노인에게 물었다.
“영감님. 영감님이 볼 때는 어때요? 예전에 법 공부 좀 하셨다면서요.”
“했지~ 내가 이래 봬도 한 때는 날아다녔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