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만약 그게 맞다면
빙상장에 들어선 양쑨이 가볍게 몸을 풀고,
몇 바퀴를 돌면서 워밍업을 시켰다.
‘느낌이 좋아.’
최근 침을 맞고 난 뒤부터,
무거웠던 몸이 가볍게 느껴진다.
아니, 그냥 가볍게 느껴지는 것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몸에 힘이 넘쳐나는 것 같다.
‘이틀 동안 제대로 못 달려봤으니.’
가볍게 속도를 서서히 올리는 양쑨.
코끝으로 느껴지던 차가운 공기가 이제는 느껴지지 않는다.
차가웠던 공기는 오히려 달구어진 몸을 식혀주듯이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상쾌하게 느껴졌고,
그것을 연료 삼아 몸은 한결 더 열을 올리기 시작한다.
사각- 사각- 거리는 소리에서,
샥샥-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 소리조차 잊게 된다.
몸이 기억하는 데로,
여태까지 훈련해 왔던 대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처음 이곳에 도착할 때 든 복잡한 생각조차 사라지기 시작한다.
여기에 오기까지 흘린 피와 땀.
유복하지 못한 가정환경부터 열악한 훈련 환경 등등.
이 모든 잡념이 완전히 사라지고,
남아있는 것은 오로지 감각뿐.
‘손가락 끝, 스케이트 날 끝까지 느껴지는 것 같아.’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가볍게 손가락을 대어 코너를 돌 때마다 몸이 신호를 보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제대로 돌기 시작한 양쑨이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기 시작했고,
1500m의 질주를 끝내자 눈에 들어오는 시야.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지?’
자신을 바라보면서 무언가 웅성거리는 것 같은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동시에,
허억- 허억-
뱉어내는 거친 호흡.
터질 듯이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는 덤이다.
그렇게 속도를 줄이며 빙상장을 돌다가 자신을 기다리는 코치에게로 갔는데,
“양쑨! 정말, 대단해!”
“네? 갑자기 그게..”
“신기록이라고!”
코치가 멈춰있던 타이머를 보이며 말했다.
멈춰있는 시간은 2분하고 23초.
한국과 중국 캐나다와 유럽 등, 쇼트트랙 강국이라 불리는 선수들의 기록이 2분 10초 대인 점을 고려하면 별 볼 일 없을지도 모르는 기록이었으나, 양쑨이 기록했던 가장 좋은 기록을 경신한 것이었다.
그것뿐만이었으면 코치가 이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눈에는 앞으로 더 좋은 기록을 낼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이리라.
‘몇 군데만 조절하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기록이 나올 거야.’
“정말요?”
“그래. 자세도 이전과 비교해서 아주 안정적이고, 무엇보다 집중력이 예전과 완전히 다르던데? 대체, 무슨 일이야?”
“저... 그게 오늘 훈련하는데, 느낌이 좋았어요. 마치, 내 몸이 내가 생각하는 데로 움직인다고 할까?”
“그래서?”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어요. 심지어 이 스케이트 날 소리도요.”
이야기를 들은 코치가 양쑨의 두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좋아! 지금처럼 꾸준히 훈련하자고.”
어떤 느낌인지 말로 전해 들었기에 자세히는 모르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을 알고 있는 그였다.
운동선수들은 곧 필연적으로 어떤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데,
그 한계를 깨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피와 땀을 흘려야 한다는 것.
물론, 그렇다고 전부 그 한계를 깬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랬으면 슬럼프에 빠져서 은퇴한다던가 하는 선수들이 생겨나진 않았을 테니까.
어찌 됐건, 지금은 양쑨이 그 한계를 깨고 성장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 말을 들은 양쑨이 순간 울컥했다.
그녀도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고, 실제로도 느꼈기 때문이리라.
만감이 교차한다.
자존감, 행복감, 억울함. 등등.
처음 이곳에 와서 훈련하다가 다친 순간에는 너무 억울해서 잠까지 설쳤던 기억.
그러다가 우연히 찾아간 허준 선생님에게 도움을 받아 이렇게 되기까지.
처음 꿨던 꿈을 다시 되찾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양쑨은 차오르는 숨을 몰아 뱉으며 힘차게 포효를 내질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나라 선수와 코치들.
그중에서 노란 머리를 한 선수와 코치가 말을 이었다.
“깜짝이야. 저 선수. 누구예요? 힘이 넘치네.”
“양쑨이라고 대만 신인 선수야.”
“대만에도 저런 선수가 있다고요? 한국이랑 중국 일본 말고도 저런 괴물 신인이 있을 줄이야. 게다가 자세도 좋은 것 같고.”
“원래, 그런 곳이 올림픽이잖나.”
“승부욕이 불타오르네요.”
또 다른 곳에서는,
“지난번에 봤던 모습과는 너무 다른데요? 2분 23초? 이 정도면 꽤 위협적인 기록이네요. 지난번 기록은 얼마였어요?”
“내가 알기로는 이렇게 안 빨랐던 거 같은데? 내 기억에 없는 걸 보니.”
“이게 올림픽인가?”
“신경끄고 우리도 슬슬 몸 풀자고.”
전 세계의 최고 선수들이 모이는 만큼,
언제 뒤집혀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바로 올림픽이었으니,
“그러고 보니, 저 선수 며칠 전에 부상으로 서울에 진료받으러 몇 번 갔다 왔다던데?”
“서울이요?”
“응. 서울에 있는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왔다나 봐. 지금은 팀 닥터인 중의사에게 치료받는 중이고.”
중국 팀.
“흥, 그래 봐야 우리한테는 안되지.”
“한국 선수 훈련하는 거나 지켜보자고.”
그리고 팔짱을 낀 채, 기분 좋다는 얼굴로 신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양쑨과 코치를 바라보는 한 남자.
대만팀의 팀 닥터인 진웨이였다.
‘정말, 대단하다.’
물론, 여기서 대단하다는 것은 양쑨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서울에 있는 한의사 이허준 선생을 뜻했다.
며칠 전,
혜민한방병원 허준의 진료실.
언제나처럼 침을 맞기 위해 찾은 양쑨과 통역사 그리고 진웨이.
평소처럼 진료를 끝낸 허준이 통역사 김서진에게 진웨이를 찾았다.
“김서진 씨. 진 선생님을 불러주십시오.”
“무슨 일이시냐고 합니다.”
진웨이의 완전히 달라진 태도.
이것은 통역을 맡은 김서진이 가장 먼저 느낄 수 있었다.
당장, 말투와 억양부터 공손하고 높임말을 썼으니까 말이다.
“다름이 아니라, 이제 양쑨 선수가 진료받으러 나오기 힘들 거라고 하던데요.”
“네. 맞습니다. 이제 동계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서, 이렇게 왕복으로 진료를 받으러 다니기에는 무리가 있답니다.”
“그래서 제가 진웨이 선생님께 대신 치료를 부탁드리려고요. 양쑨 선수가 이쪽에 누워주시겠어요?”
그렇게 시작된 허준의 치료.
치료방식은 간단했다. 침으로 몇 군데 혈도를 자극하여 원만하게 회복시키는 과정이었으니까 말이다.
진웨이가 허준이 알려준 자리를 꼼꼼하게 체크하며 익혔다.
‘이렇게 해서 열기를 빼고 아래쪽의 찬 기운을 자극하여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
볼 때마다 놀랍지만, 직접 이렇게 설명까지 들으니,
정말, 대단한 의술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바로,
다 배웠다고 한순간 허준이 부탁한 처방이었다.
“부탁이 있는데, 이틀 정도는 격한 훈련을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네요.”
“이유를 물으십니다.”
“비워냈으니, 다시 차오를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그날의 일을 떠올린 진웨이.
같은 의료인으로서 경외심이 들었다.
‘아무래도 나중에 왕걸륜 선생에게 거나하게 한잔 사야겠군.’
진웨이가 발걸음을 옮겨 양쑨에게 다가가 말했다.
“양쑨 선수. 오늘 치료 하러 가시죠.”
* * *
설 연휴가 끝나고,
다시금 바빠진 혜민한방병원.
허준이 동생 이진희와 함께 출근했다.
처음 건물을 보자마자 입이 떡 하고 벌어진 동생의 모습.
“정말, 여기서 근무한다고?”
“창피하니까, 조용히 그냥 따라올래? 올라온 김에 부모님 보약이나 가져가라고 데려왔더니.”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니,
로비의 직원들이 깍듯하게 인사한다.
“원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네. 좋은 아침이에요.”
그런 그녀들의 시선이 허준의 뒤를 따라 움직이는 이진희에게로 향한다.
누굴까? 하는 그런 의문의 시선이다.
허준도 그 시선을 얼핏 느꼈으나,
가족인데 뭐.
그렇게 엘리베이터.
이어서 9층의 탕전실.
어젯밤 퇴근 전에 허준이 직접 만든 보약과 공진단이었다.
그리고 동생 이진희의 체질에 맞는 약도 함께.
“이거 다 들고 갈 수 있지?”
“물론이죠. 오라버니.”
평소 원수 같은 동생이지만,
아침에 용돈을 조금 먹였더니 대답부터 씩씩하네.
“좋아. 그럼 잘 돌아가고~ 난 이만 바빠서.”
“뭐야, 구경시켜준다면서? 이게 끝이야?”
“구경? 알아서 보고 가. 나 아침부터 진료 있거든.”
그렇게 동생을 보낸 허준.
4층의 진료실로 내려와 스트레칭을 마치고,
가운을 입으며 심호흡을 했다.
‘알아서 잘 가겠지.’
그럼, 진료를 시작해 볼까.
이런 허준의 생각과는 다르게,
한방병원 안에서는 빠르게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 속보. 허준 원장님 아침에 여성분과 함께 출근.
- 김 팀장님 아니에요?
- 그러면 제가 여기에 안 올리겠죠. 모르는 분입니다. 진료받으러 오신 분도 아니고요.
- 어? 저도 본 것 같아요. 엘리베이터에서 식당으로 올라가시던데요?
등등,
사실 원장의 여자친구가 이렇게까지 이슈가 되는 일은 없다.
실제로 박용준의 여자친구가 병원에 왔을 때도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겼으니까 말이다.
다만, 그것이 허준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가 과거에 벌였던 이야기가 이미 병원 안에 잔뜩 퍼져있었기 때문이리라.
그것도 소문이 그렇듯이 언제나 과장되기 마련이었으니,
덕분에, 이 이야기는 각 층에 있는 원장들에게도 빠르게 전해졌다.
‘음?’
그 이야기를 듣고는 별생각 없는 유도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그와는 다르게,
진료실을 박차고 가장 먼저 나온 박용준.
옆 진료실의 김태식에게 달려갔다.
“원장님! 허준 원장님 여자친구분이 병원에 오셨다던데요?”
“뭐...?”
“안 궁금하세요?”
“박 원장. 허준 그 친구가 여자친구 사귈 시간이 어딨어? 맨날 진료 보고 탕약 내리고 주말에는 봉사에다가 쉬는 날에는 강의나 방송나가기 바쁜 친구인데. 쓸데없는데 용빼지 말고, 진료 준비나 하자고.”
“듣고 보니... 그렇네요.”
생각해 보니 말이 안 되는 일이었기에,
금세 이성을 되찾은 박용준.
“진료 준비나 하러 가야겠어요.”
그렇게 한바탕 소문과 함께 혜민한방병원 진료 시작.
허준의 진료도 시작되었다.
“변비 때문에 오셨다고요?”
“네. 이게 너무 약 먹으면 좋아졌다, 약 안 먹으면 다시 심해졌다 해서요.”
“알겠습니다. 진맥부터 한번 잡아 보도록 하죠.”
간단한 질환.
그리고 침 몇 방에 뜸 몇방. 아주 간단한 처방.
허준도 환자도 둘 다 만족스러운 그런 진료다.
그렇게 이어진 진료에 나타난 한 환자.
* 보상 : 5000
불친절한 그것과 함께,
환자의 퀭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이름은 최민영.
증상은...
‘불면증?’
“어서 오세요. 최민영 씨. 이쪽으로 앉으시죠.”
터벅터벅 걸어오는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힘이 없다.
퀭한 눈과 약간 멍한듯하고 생기 잃은 눈.
‘전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생기는 증상들이군.’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왜인데.
퀘스트가 나왔다는 것은 여태까지 만나본 병이 아니라는 뜻일 터.
“안녕하세요. 선생님.”
“네. 안녕하세요. 최민영 씨.”
“제가 여기저기 병원을 다 다녀봤는데, 아직 원인을 못 찾아서요.”
“그럼, 일단 들어볼까요?”
“제가 친구랑 같이 사는데요. 그 친구가 자꾸 밤만 되면 중얼거리는 거예요. 그래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처음에는 그냥 잠꼬대거니 했는데... 문제는, 이게 매일 이어진다는 거죠.”
“그러니까... 친구분이 매일 밤마다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에 잠을 제대로 못 잔다는 거죠?”
“네. 맞아요.”
“친구분과는 이야기를 해보셨나요?”
“물론이죠. 제가 친구한테 그 말을 했더니 믿질 않더라고요. 그래서 확인해보기로 했죠. 친구가 잘 때 스마트폰으로 녹음을 켜놓고 잤거든요. 그런데, 그럴 때마다 귀신같이 조용한 거예요.”
이거 뭔가 이야기가 이상한데?
친구를 데려와 확인해 볼 수도 없고.
그때, 무언가 떠오른 허준.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났다. 이것과 비슷한 증상을.
‘만약 그게 맞다면.’
“알겠습니다. 우선 진맥을 잡아 보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