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왜 진즉에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접수를 마친 박문식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눈앞에 들어오는 층수별 안내문.
3층 양방진료실과 각종 검사실.
4층 한방진료실, 치료실
5층 물리치료실. 도수 치료실
6층부터 다시 8층까지 한방진료실과 치료실.
9층은 탕전실이라 적혀있고 10층부터 위로는 입원실과 식당 그리고 사무실 등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야 할 곳은 4층이었다.
띵동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박문식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는데.
‘뭐야 이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데스크 앞에 있는 의자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데스크 직원이 박문식에게 말했다.
“어서 오세요. 1층에서 접수 신청하고 오셨나요?”
“네. 접수하고 왔습니다.”
박문식이 접수 표를 건넸다.
“잠시만요. 아, 네. 확인됐습니다. 이허준 원장님 진료 보러 오셨죠?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네.”
앉을 자리가 마땅치 않아 잠시 서서 기다리는 박문식.
그런 그의 귓가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온다.
“엄마. 여기 진짜 잘한다니까? 내 친구 용선이 알지? 걔네 엄마도 여기 와서 진료받고 싹 나았대.”
노모를 모시고 온 중년의 여인부터,
“여기가 그 유명한 허준 원장님이 진료하신다면서?”
“그래서 그런가? 이거 사람이 너무 많은데? 다음에 다시 와야 하는 거 아니야?”
“온 김에 조금만 기다려 보자. 생각보다 대기인원이 빨리 줄어들더라고.”
“그래?”
바쁜 일이 있는지 중얼거리는 두 청년까지.
그때, 데스크 앞에 서서 이야기를 하던 한 사람의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나는 이허준 원장님 진료받으러 온 건데. 다음 진료는 6층으로 가라니? 이게 시방 무슨 말이여? 왜 원장이 직접 안 해주고.”
“그곳에 전문적인 선생님이 계시거든요. 그래서 그러실 거예요.”
“그래?...”
“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위에 계신 원장님들도 전부 TV에도 나오고 굉장히 유명하세요. 다들 실력도 쟁쟁하신 분들이거든요.”
3층에 있는 각종 검사실.
그리고 갑자기 4층을 뛰어넘어 5층에 있는 물리치료실과 도수 치료실.
보통의 경우라면 아래층에 각종 검사실과 현대의학의 치료실을 모아두는 게 정석이었지만,
이렇게 4층에 허준의 진료실이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이곳이 현대의학으로 따지면 일종의 진단 과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병원을 찾은 환자들은 대부분 허준의 소문을 듣고 찾아오기 마련.
그 환자들을 전부 치료하면서 새롭게 몰려드는 사람을 진료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허준이 찾아온 환자의 진료를 보고 처방을 내린 뒤에 다른 선생들을 주치의로 임명한다.
그러면 그에 따라서 치료를 이어나가는 시스템.
물론, 허준과 다른 선생들과의 수준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이미 혜민서로 활동하면서 모두가 어느 정도 수준에 올랐으니,
일반적인 질환에 대해서는 모두가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환자가 이런 방식으로 치료를 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허준뿐만 아니라, TV에 나온 유도진이나 김태식 원장 등을 직접 찾아 진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상황을 모르는 박문식에게는 이 모습이 영 믿음직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결국, 치료는 다른 선생들이 한다는 거잖아?’
그렇게 몇 분을 기다리니.
드디어 전광판에 올라온 접수번호.
“1번 진료실로 들어가실게요.”
박문식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허준이 그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박문식 님.”
박문식이 무뚝뚝하게 고개만 살짝 꾸벅 숙였다.
그런 그의 한쪽으로 퀘스트가 나타나 있다.
* 보상 : 포인트 3000
단순하게 보상만 적혀있는 퀘스트.
‘이젠 진행도도 보여주지 않네.’
뭐 그리 큰 상관은 없었다.
굳이 진행도가 아니더라도, 포인트를 얻으면 치료가 된 것일 테니까.
게다가 환자의 표정이나 진료를 보면서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
“일단, 이리로 오셔서 앉으시겠어요?”
안내에 따라 발걸음을 옮긴 박문식.
허준이 그의 움직임을 눈에 담으며 차트를 확인했다.
‘증상이 안 적혀있네.’
이건 보나 마나 두 가지 중에 하나다.
본인이 진짜 자신의 증상이나 질환을 잘 몰라서 찾아오는 경우.
또는, TV에 나오고 혜민서로 나름 유명해진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서 고의로 적지 않은 경우.
시장 골목에서도 종종 경험했기에,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허준이었다.
그런데,
의자로 다가오는 그의 걸음이 신경 쓰인다.
‘대체 뭐지?’
허리? 아니다.
다리? 다리도 아니다.
물론, 사람의 몸이 좌우대칭인 경우는 없지만,
그것을 감안하고도 묘한 불균형 감이 느껴진다.
‘이건 하체의 문제가 아니다.’
눈이 올라가고,
자연스럽게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이상한 불균형 감의 시작은 바로 환자의 오른팔에서 시작된 것.
오른팔과 어깨의 움직임이 굉장히 부자연스럽다.
그렇게 자리에 앉은 박문식.
허준이 박문식을 보며 물었다.
“혹시, 오른팔 때문에 오셨습니까?”
“네...?”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박문식이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과거 투수였던 그가 지금의 코치가 된 이유.
바로, 오른팔의 부상이었으니까 말이다.
‘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박문식이 놀라 허준을 바라봤다.
“잠시 팔 좀 만져봐도 될까요?”
“아, 네.”
이어서 뭐라 말할 새도 없이,
허준이 박문식의 왼팔과 오른팔을 누르며 확인한다.
‘오른팔이 길다.’
게다가 팔꿈치도 살짝 뒤틀린 모양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잠시, 생각을 해보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은 피부, 나이에 맞지 않게 단단한 체구.’
운동선수일 확률이 높다.
어쩌면 운동선수였을 수도 있고.
즉, 이 불균형은 오른쪽 팔만 혹사한 것에 대한 대가로 보여졌다.
일종의 후유증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오른팔을 이렇게 올려주시겠어요?”
허준의 말에, 박문식이 말없이 따라 했다.
얼굴까지 올라가지 못하는 팔.
‘이정도면 일상생활에서 굉장히 불편하겠네.’
두 손 멀쩡히 있다 보면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이렇게 한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면 그 불편함은 상상을 초월할 터.
“굉장히 불편하셨겠네요.”
허준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박문식.
하지만, 그는 과거에 승부사라 불릴 만큼 빠르게 이성을 찾았으니.
“어떻게,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되물었다.
예전부터 이미 이 팔을 고치기 위해서 여러 병원에 다녔지만,
고치기 애매하다는 말을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때,
허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치료라는 개념을, 일상생활에서의 불편함을 없애는 것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그 대답에 박문식의 눈이 허준을 향했다.
대체 무슨 자신감이지. 여태까지 이런 말을 하는 의사는 못 봤는데.
그렇게 허준과 마주친 두 눈.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가는 눈빛이다.
‘그래. 이곳에 온 이유를 잊지 말자.'
애초에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이던가.
자신이 아끼는 동생을 위해서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직접 치료를 받아보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제가 뭐부터 하면 될까요?”
“일단은 아래층부터 다녀오시죠. 처방은 검사 후에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날 점심.
식당에서 김형식 원장과 허준이 이야기를 나눴다.
“박문식 씨, 검사결과 뼈에는 큰 이상이 없더군요.”
“네. 아까 연락받았어요. 엑스레이 사진도 확인했고요.”
“그런데, 팔꿈치 쪽에 묘한 변형이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 사람 야구선수였던 것 같은데요? 그것도 투수요.”
과거 운동선수들의 진료를 꽤 맡았던 김형서였기에,
단번에 그 특징을 잡아낼 수 있었다.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
“알고 계셨어요?”
“네. 진료하는데, 팔이 한쪽만 길더라고요. 거기에 뒤틀려 있기도 하고, 너무 혹사당한 것 같아서 생각해보니, 야구선수나 펜싱선수가 아닐까 했거든요.”
“역시, 원장님 대단하시네요. 보통 한의사 선생님들은 그런것까지는 잘 모르시던데.”
김형서가 감탄하며 물었다.
“그보다 처방은 어떻게 내리셨어요?”
“일단은 침과 약침 그리고 도침이랑 병원에서 사용할 수 있는 약물들하고 물리치료실과 추나로 치료해 볼 생각입니다.”
“이거 벌써 기대되는걸요? 아마, 좋은 결과가 있다면 소문듣고 많은 환자들이 찾아올 겁니다.”
그렇게 마무리된 점심시간.
다시금 진료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 * *
며칠 뒤,
혜민한방병원 병원장실.
최인호가 김예진에게 받은 보고를 떠올리며 미간을 누른 채, 중얼거렸다.
“아직도 입원실을 다 못 채웠을 줄이야.”
개원한 데다가, TV에도 나가고, 마케팅까지 했음에도 입원실이 꽉 차지 않은 상태.
입원실이 비어있든 차 있든 고정적으로 나가는 비용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으니,
‘결국, 입원실이 관건인데.’
대체 어떻게 채워야 한단 말인가.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
똑똑- 소리와 함께 들어온 허준.
“부르셨어요?”
“어. 마침 잘 왔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세요? 얼굴이 말이 아닌데요.”
“여기 앉아 있다 보면 다 이렇게 되는 거지 뭘.”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매출이 영 별로인가 보다.
“다른 건 아니고, 이번 주 방송 때문에 불렀어. 어떻게 하겠나?”
최인호의 물음에 잠시 생각에 빠진 허준.
이전에야 명성 퀘스트도 있었으니 직접 방송에 나가서 명성을 올리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지만,
‘지금은 그렇게까지 큰 영향을 주지는 않지.’
어차피 혜민서란 단체를 알리는 것은 혜민서에 속한 선생 중 아무나 나가도 될 터.
꼭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저도 방송 나가보고 싶어요!”
라고 애타게 울부짖는 박용준 원장이 있었으니.
허준이 입을 열었다.
“박용준 원장이 어떨까요?”
“박 원장? 너무 젊지 않나?”
“오히려 그게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게다가 일단 말하는 것만으로는 박 원장을 따라갈 사람이 이 병원에는 없어 보이는데요.”
사실이다.
언제나 혜민서의 분위기를 책임지는 것은 박용준 원장이었으니까.
“좋아. 박 원장이면 지난 번 김태식 보다는 잘 하겠지. 알았어. 자네는 이만 나가보게.”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말해봐.”
최인호가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다름이 아니라, 엊그제 윤다희 선생님의 진료를 봤는데, 슬슬 휴가를 주실 때가 된 것 같아요.”
윤다희. 허준한의원 때부터 함께했던 식구로 현재는 혜민한방병원의 로비와 데스크 직원들의 교육과 관리를 담당했다.
그런 그녀의 배에는 새로운 생명이 함께했으니,
“윤 선생님. 이제 좀 쉬셔야 할 것 같은데요?”
“벌써요? 아직 괜찮은 것 같은데.”
“아니에요. 무리하지 마시고, 제가 주치의니까 제 말을 따라주세요.”
“물론이죠. 원장님께서 얼마나 큰 도움을 주셨는데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병원장님께는 제가 말씀드리도록 하죠.”
이번 진료에서 드디어 때가 되었음을 느끼고 허준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최인호가 윤다희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녀의 가르침 덕분에 개원 당일부터 지금까지 로비와 데스크 직원들에게 들어온 컴플레인은 0건.
괜히 허준한의원을 이끌어 온 쌍두마차가 아니었지.
“아, 미안하네. 내가 먼저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요즘에 워낙 신경쓸 게 많아서 말이야.”
“매출이 안 올라와서요?”
“뭐, 그렇지. 일단 윤 실장 건은 걱정하지 말게. 내가 휴가뿐만 아니라 예전에 말했던 데로 인센티브까지 지급하도록 할테니.”
“좋네요. 윤 선생님이 들으면 좋아하시겠어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발걸음을 돌려서 나가려는데,
허준의 머릿속에 무언가 번뜩였다.
그러고 보니, 허준한의원에서 꽤 많은 매출 비중을 차지했던 분야.
고3의 총명탕, 다이어트 한약, 유도진의 보약, 그리고 난임 및 출산 전후 진료가 아니었던가.
‘그걸 한방병원에서 업그레이드 시켜서 할 수 있다면?’
“최 원장님.”
“응? 자네 아직 안 나갔나?”
“갑자기 생각 난 건데요. 한방병원에서 출산 전후 진료와 난임 치료는 어떨까요?”
최인호의 머릿속에 벼락이 떨어졌다.
왜 진즉에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