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최강의 카드가 있잖습니까
“부탁이라 하심은...?”
밥이 허준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평소에 무언가 따로 부탁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심각한 일 아니니까, 표정 푸세요. 선생님. 예전에 환자로 내원했던 유민정 양이라고 기억하시나요?”
“물론입니다.”
밥이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유민정. 이전에 이곳에서 한창 진료를 받던 환자의 이름.
물론, 지금은 비행소녀단이라는 아이돌의 멤버로서 큰 인기를 얻으며 활약 중인 상황인데,
밥이 그녀를 기억하는 이유는 단순히 아이돌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첫 진료.’
이 한의원에 와서 첫 진료를 본 날 만났던 환자였으니까.
“유민정 양하고 밥 선생님하고 꽤 친하셨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런 편이었죠. 이곳에 내원하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정도는 되었으니까요. 지금, 비행소녀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진료받는 동안에 말이죠.”
“잘됐네요. 제가 밥 선생님에게 부탁할 일이 바로 비행소녀단의 진료입니다. 그쪽에서 부탁이 왔더라고요. 얼마 뒤에 있는 뮤직 어워드에 나간다고 집중적인 케어를 말이죠. 아무래도 이곳에 오기에는 여러모로 애매해서 직접 가셔서 봐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허준의 대답에 밥이 놀라 되물었다.
일반적으로 진료실 안에는 의사와 환자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어디 그렇겠는가.
“네? 그런 중요한 일을 제가요? 원장님이 직접 하시지 않고...”
“아쉽게도 제가 몸이 하나라서요. 선생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대학교 강의에다가 촬영 그리고 한의원과 한방병원에 있는 선생님들의 교육까지. 이 와중에 한의원에 찾아오는 환자들 진료도 봐야 하는데 도저히 시간이 안 될 것 같더라고요.”
“그러면 유도진 선생님은 어떠신지요?”
밥이 허준한의원의 이인자라 할 수 있는 유도진 선생을 추천했다.
실제로 원장님과 비견될 만큼 실력자였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허준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유도진 선생님이 절 죽이려 할지도 모릅니다. 가뜩이나, 요새 휴일이면 한방병원으로 가서 선생들을 교육하느라 쉬지도 못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럼-”
“그러지 마시고, 그냥 선생님이 가시죠. 만약에 어려운 상황을 마주한다면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원장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그렇게 스타엔터테인먼트의 사옥에 도착한 밥.
연락을 받은 지영희 실장이 마중 나와 있었다.
“밥 선생님!”
지영희가 반갑다는 듯이 밥을 반겼다.
그녀도 한의원에 다니면서 밥과 꽤 친해졌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지 팀장님.”
“어머? 팀장이라니요? 저 이제 실장이에요. 팀장이 아니라.”
“아, 죄송합니다.”
“농담이에요. 일단 따라오시죠.”
앞장선 지영희를 따라 걸음을 옮긴 밥.
엔터테인먼트 사옥답게, 들어가는 입구를 지나니 복도 곳곳에 영화 포스터라던가 드라마 포스터 등이 벽 곳곳에 붙어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있는 비행소녀단의 1집 앨범 사진.
앞에 걷던 지영희의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때요? 완전히 다른 애들 같죠?”
“네. 그때랑은 진짜 다르네요.”
“당연하죠. 이제는 어엿하게 데뷔에 성공해서 인기몰이 중인 걸 그룹인데요. 이제 시작이에요. 앞으로 이 복도에 더 많은 사진이 걸리게 될 거에요.”
이렇게 잡담과 함께 도착한 곳은 지하에 있는 연습실이었다.
음악에 맞춰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여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는 아이들과 함께 공연할 댄스팀이에요. 애들은 지금 오고 있으니, 이쪽부터 봐주시죠.”
“알겠습니다.”
지영희가 문을 열자마자,
동시에 코를 자극하는 퀘퀘한 냄새.
이어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빠져들 것 같은 춤사위가 이어진다.
세상에 인간의 몸이 저렇게도 움직일 수 있구나 싶은 움직임이다.
음악이 끝나니,
땀을 뻘뻘 흘리며 춤을 추던 여인들이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아이고~ 나 죽어.”
“언니. 허리는 좀 괜찮아?”
“괜찮기는, 그냥 하는 거지.”
“그러다 진짜 큰일나는 거 아니야?”
그때,
짝-!
지영희가 손뼉을 치니,
그제야 그녀들이 문 쪽을 바라봤다.
“어? 실장님. 언제 오셨어요? 오셨으면 진즉에 부르시지.”
“아니에요. 한창 몰입하고 계셔서. 그보다, 이쪽은 이번 공연 전까지 팀을 케어해주실 밥 선생님이세요.”
“어? 아, 네.”
댄스팀 팀장 최지나가 밥을 바라봤다.
당연히 하얀 가운을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멀뚱히 서 있는 외국인.
‘외국에서 오신 선생님이신가?’
하긴, 해외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얼핏 들리는 중이니.
그때,
“로버트 킴입니다. 밥이라고 불러주세요.”
너무나 명확한 발음의 한국말이 들려온다.
덕분에 당황한 최지나.
“최, 최지나라고 합니다.”
“밥 선생님. 부탁 좀 드릴게요. 제가 일이 아직 남아있어서.”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해볼까요?”
그렇게 이어진 진료.
역시나 허준의 예상대로 댄서들에겐 직업병이라 할만한 질환들이 있었다.
바로, 관절의 문제.
일반인에 비해서 워낙 관절의 움직임이 많았기에,
여기저기가 상하는 것은 기본이요.
심할 때는 통증이 있는 경우에도 참는 경우도 허다했다.
덕분에,
‘이거 관절은 물론이고, 관절 주변 근육들의 상태도 심각하네.’
하긴, 아까와 같은 춤사위를 매일 몇시간씩 반복한다는데 남아날 리가 없겠지.
게다가 한의원을 찾아오는 환자의 경우라면 보통은 허리가 아프면 허리가.
무릎이 아프면 무릎이었지만,
댄서들은 달랐다.
왜 원장님께서 이것을 챙겨주셨는지 이제야 알겠어.
“밥 선생님. 잠시만요. 약침 좀 많이 챙겨가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라면서 챙겨 준 약침들.
역시 원장님이시다.
“이쪽도 아프시죠?”
“어? 네. 맞아요. 그걸 어떻게?”
“원래 이 위쪽이 아프면 이 아래쪽에 있는 근육에도 부하가 많이 걸리거든요. 풀어주실 때에는 이렇게 위에뿐 아니라 아래쪽에도 신경을 써 주시는 게 도움이 많이 될겁니다.”
밥이 능숙하게 통증이 있는 근육을 찾아냈다.
그러고는 침을 꺼내 들었는데,
최지나가 화들짝 놀라 움찔 거린다.
“왜 그러시죠?”
“그거 침 아니에요?”
“네. 그런데요?”
그러더니, 당황한 표정으로 밥과 그의 손에 들린 침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그때, 연습실 문이 열리면서 유민정을 비롯한 비행소녀단의 멤버들이 들어왔다.
“어? 밥 선생님이다!”
“밥 선생님? 진짜네?”
“오랜만이에요. 여러분. 다들 좋아 보이네요.”
밥도 하던 행동을 멈추고 그녀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자,
“너희들이 이분을 어떻게 알아?”
“왜 모르겠어요? 우리 민정이 얼굴 고쳐준 곳에 계신 선생님이신데. 우리도 덕분에 관리 좀 받았죠.”
그 대답에 최지나가 다시 한번 더 밥을 바라봤다.
유민정의 치료는 꽤 유명한 일화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밥 선생님이 여기는 웬일이세요?”
그 물음에는 뒤이어 등장한 지영희가 대신 답했다.
“대표님께서 준비하셨어. 너희들 뮤직 어워드 나가기 전에 컨디션 관리 차원에서 말이야. 그래서 밥 선생님이 와 계신 거고.”
“정말요?”
“아싸! 그럼, 보약도 맞춰 주시나요?”
데뷔 이후에 인기를 얻어 몇 달간의 강행군.
그것을 버티게 해준 것이 있었으니, 바로 허준한의원에서 맞춘 보약이었다.
그런 허준한의원에서 컨디션을 관리해주겠다니,
이렇듯 신나는 분위기가 되는 것이 당연했으리라.
“당연하지. 그러니, 순서대로 기다렸다가 아프거나 불편한 거 있으면 다 말해.”
“네!”
다시 이어진 진료.
밥이 최지나의 환부에 정확하게 침을 찔러 넣기 시작했다.
허준에게도 칭찬받을 정도로 감각이 좋은 밥.
거기에 많은 임상을 거치며 단련된 침술은, 그녀에게 침과 약침의 효과를 제대로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뭐야? 아까까지 묵직한 느낌이던 허리가?..’
내심 놀라는 최지나.
그 옆에서 밥이 진료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비행소녀단의 리더이자,
맏언니 이윤경.
“진짜 오랜만이시네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 쌤.”
“그러게요. 저도 반갑습니다. 여러분이 잘돼서 기분이 좋네요. TV에 틀면 종종 얼굴이 보이더라고요.”
“감사해요. 전부 선생님들 덕분이에요.”
“그럼, 이제 컨디션에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네.”
이어진 진료에서 밥은 여태까지 배웠던 모든 것들을 이용해 정확하게 진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환자에게 듣고, 직접 확인하면서 진맥까지.
‘전반적으로 컨디션은 좋으나, 기운이 떨어진 것이 느껴진다.’
이렇게 몸이 건강한데도 피곤한 이유는 대부분 음양의 기운이 조화롭지 못하고 균형이 깨져서 발생하는 것이었으니,
아무래도 충분한 숙면이 필요하겠군.
밤은 음기가 왕성한 시간.
괜히 옛말에 밤에는 잠을 자고 낮에는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아무리 젊고 건강한 사람이라도 밤낮을 바꿔서 생활하다 보면 왠지 모르게 피곤함을 느끼는 것과 같다.
아무리 양기가 넘쳐나는 사람일지라 하여도 음기가 충분하지 못하면 그 양기를 제대로 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밥이 증상을 꼼꼼하게 기록한 뒤에, 침을 꺼내 들었다.
“오늘은 가볍게 근육들의 긴장을 풀도록 하죠.”
이어서 멤버들 하나하나의 진료가 이어져 나갔고,
유민정의 차례.
“밥 선생님.”
“유민정 양. 정말, 좋아 보이네요.”
“그런데, 허준 선생님은요?”
“원장님이 워낙 바쁘셔서요.”
“요새 TV도 나오시더니, 여전히 환자들에게 둘러싸여 계시나 봐요.”
“뭐, 그런 셈이죠.”
자연스러운 대화와 함께 이어진 진료에서 유민정 또한 딱히 위태로워 보이는 부분을 찾지는 못한 줄 알았는데.
집중한 상황에서 무언가 느낀 밥이었다.
“그런데, 목소리는 왜 그래요?”
엘레나와 지내면서 상태를 확인하면서 이런저런 소리를 듣다 보니,
귀의 감각까지 민감해졌기 때문이었다.
“네? 아니, 가끔 그냥 가끔 피곤하면 이렇게 잠기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괜찮아요 자고 일어나면 금방 좋아져요.”
“아닌데, 잠시만요.”
밥이 생각에 잠겼다.
허준 원장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머릿속에 떠오른 혜민서 모임에서의 사례들과 자신이 직접 엘레나를 옆에서 치료했던 경험들이 합쳐지면서 머릿속이 번뜩인다.
“아니에요. 성대에 살짝 무리가 간 것 같은데, 제가 방법을 알려드릴 테니···.”
이렇듯, 한층 더 성장한 밥의 모습이었다.
* * *
촤르르륵-
변기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김성렬이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효과가 있어!’
아무래도 환부가 환부이다 보니,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기에는 어려웠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 지긋지긋한 병의 상태는 그의 몸이 가장 잘 알았으니까.
수치심과 자괴감이 드는 자세를 취한지 며칠째.
탁월한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김성렬.
그가 화장실에서 나와 호텔 밖을 내다보니 서울의 꽉꽉 막힌 빌딩 숲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하리.
이미 그의 기분은 그 어느 때보다 상쾌할 텐데.
“세상이 아름답네.”
그렇게 김성렬이 빠른 회복이 되어 가고 있는 동안에,
허준한의원에는 혜민서 멤버들이 모여 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그 혈 자리가 중요하다는 거죠? 엉덩이 사이에 있는...?”
“맞습니다. 다만, 제가 직접 해보니까 아무래도 환자들에게는 거부감이 있을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원장님의 도움이 조금 필요할 것 같습니다.”
박 원장의 물음에 허준이 답했고.
그 대답에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최인호가 말을 이었다.
“확실히 그렇군. 아무래도 남성보다도 여성 환자의 비율이 훨씬 많을 테니까 말이야. 알겠네. 그건 자네 의견대로 시설 적인 면을 보강해서 조치해보도록 하지.”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난 혜민서 모임.
최인호가 허준을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자네한테 알려줄 것이 있어서 말이야. 이번에 주제가 약재의 효능과 성분에 관한 내용이 주된 내용이더라고.”
“그래요?”
“아무래도 최근에 자네가 좀 많이 이슈가 되어서 그런지, 방향을 살짝 튼 것 같은데. 어떻게, 준비할 수 있겠나? 어려우면 내가 도와주도록 하지.”
허준이 잠시 생각에 잠겼는데,
이거 생각해보니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가 아닌가.
‘유도진 선생님이 있잖아?’
“원장님. 혹시, 우리도 선수교체 가능할까요?”
“선수교체?”
“네. 케이한방병원처럼요.”
“뭐, 가능할것 같긴 한데. 그런데, 누구를 대신 내보내려고?"
“우리에게 최강의 카드가 있잖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