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침술 lv. 9
‘기의 흐름을 도와준다니.’
설명만으로도 어떤 느낌인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진맥으로 인해 경맥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침이란 애초부터 기가 흐르는 데에 있어서 영향을 미치는 것이 당연했으니,
허준의 머릿속에 몇몇 증상으로 내원한 환자들의 얼굴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래. 그런 증상에서 아주 효과적이겠어.’
이렇게 만족스러워 해야 했을 허준의 얼굴에는 살짝 아쉬운 표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애초에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오랜 시간을 들여서 얻은 능력치 포인트를 침술에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언제 또 얻을 수 있을지 모르는 능력치 포인트.
당연히 능력을 올리는 데에 있어서 가장 많은 포인트가 필요한 ‘진맥’에 사용하려 했는데,
「‘진맥을 올리기 위해서는 능력치 포인트 2개가 필요합니다.」
라는 메시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경맥을 직접 느끼고 볼 수 있는 다음 단계가 궁금했었는데.
‘쉽게는 안 주겠다. 이 말이겠지?’
예전부터 어렴풋이 느껴왔던 게,
보다 확실해지는 기분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다음 날 출근한 허준한의원 식구들.
기존에 허준한의원뿐만 아니라, 태용한의원의 인원들이 합쳐지면서 이전보다 식구가 늘어난 모습이었다.
“아이구 삭신이야, 허준 원장 그러니까 방송 나가서 살살 좀 하지 그랬어.”
김태식이 허준의 진료실에서 목을 돌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하..”
허준이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러자,
“얼씨구? 이 친구 웃는 것 좀 보게? 하긴, 그게 차라리 덜 재수 없긴 하다만.”
그리고 그 옆에서 마찬가지로 스트레칭을 하던 박용준이 되물었다.
“그런데, 원장님. 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아~ 그게 뭐랄까... 설명하기가 조금 어려운 것 같은데. 손끝에서 느껴졌거든요. 그 안쪽에 있는 부분이. 손으로는 자극이 갈 것 같지가 않아서 볼펜을 침 대신에 사용해 본 거고요.”
시원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허준.
그리고 그 대답을 듣고 있던 김태식이 박용준을 나무랐다.
“거봐. 보나 마나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했잖아.”
“그러게요.”
아쉽다는 듯한 표정의 박용준.
그런 박용준을 향해 옆에서 손목을 돌리며 밥이 답했다.
“그래도 저는 언젠가는 다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역시, 밥 선생은 한결같아서 참 좋아. 그런데, 우리 이두철 선생은 왜 이리 안 와?”
“잠깐, 화장실 들렀다가 온다고 하셨어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료실 문이 열리며 이두철이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딱 맞춰서 오셨는걸요.”
오늘 허준한의원에서 근무할 다섯 명의 한의사들이었다.
유도진과 고요한 선생은 휴무로 인해서 출근하지 않았고,
탕전실의 업무를 맡아주셨던 김정우 선생님은 태용한의원 식구들이 오면서부터 이제는 자신이 없어도 될 것 같다면서 한의원을 떠나셨다.
‘뭐, 그동안 정말 많이 도와주셨었지.’
지금, 남은 것은 임무 분담.
허준이 진료실 안에 있는 식구들을 둘러봤다.
한의원의 진료실 개수는 세 개.
여기에 최근에 많아진 환자로 2층의 입원실 하나를 임시진료실로 사용하는 상황이었다.
즉, 네 개의 진료실 그리고 네 명의 한의사가 진료를 볼 수 있다는 뜻.
‘일단 심하게 아프거나, 위중한 환자의 경우에는 2층에 올라가기 힘들 테니.’
2층 진료실은 밥 선생이 적임자겠군.
그리고 1층은 당연히 많은 경험과 실력을 입증한 김 원장과 박 원장이 맡았으면 좋을 것 같네.
최근에 방송 이후에 몸이 결린다거나, 담이 걸렸다면 여기저기에서 많은 환자가 몰려왔기 때문에.
그 환자들의 진료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보기 위한 배치였다.
“두 원장님께서는 저와 함께 1층 진료실을 맡아주십시오. 그리고 밥 선생님은 2층의 임시진료실을 맡아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원장님.”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보나 마나, 오늘도 빡세게 달릴 것 같은데요?”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한 두 원장과 밥 선생의 대답.
이어서 아직 이름이 불리지 않은 이두철을 바라보며 허준이 말을 이었다.
“이두철 선생님께서는 탕전실을 맡아주시겠어요?”
“아, 네... 알겠습니다.”
이두철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면서 답했다.
엊그제에도 출근해서 종일 탕전실 업무를 봤기 때문이리라.
‘태용한의원 탕전실과는 난이도 자체가 다른데...’
거기는 천천히 느긋하게 탕약들을 제조해도 충분했지만,
며칠 동안 이곳의 탕전실에서 업무를 보면서 느낀 것은 여기는 쉴 시간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끊임없이 주문이 들어왔으니까 말이다.
그때,
“역시! 우리의 자랑. 탕전실의 망령!”
박용준이 이상한 별명을 부르며 믿음직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김태식도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힘내라고. 이 선생이 든든하게 뒤에서 받쳐주니까, 우리가 맘 놓고 진료를 볼 수 있는 게 아니겠나?”
“알겠습니다.”
허준도 며칠 전부터 계속 탕전실을 도맡은 이두철 선생이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이것이 최선임을 알았기에.
“맞아요. 이두철 선생님이 계셔서 허준한의원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조금만 더 고생해주십시오.”
가볍게 칭찬했다.
그러자,
이두철의 눈이 빛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 탕전실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역시, 이 선생님은 생각보다 사람이 단순하다니까.’
그리고 그게 장점이기도 하지.
어느새 이두철의 성격을 파악해버린 허준이었다.
“자, 그럼. 진료 시작해 볼까요?”
“네!”
그렇게 시작된 진료.
허준의 앞에 초진 환자가 들어왔다.
이름은 백승원.
역시나 담이 걸린 것 같다면서 찾아온 환자다.
“아이고~ 선생님. TV에서 보고 찾아왔습니다.”
“목이 아프시다고요?”
“예~ 예~ 잠을 잘못 잤는지, 일어났는데 목이 안 돌아가서요.”
“제가 한번 볼게요~”
허준이 일어서서 앉아 있는 백승원의 뒤로 돌아가,
목 주변을 살짝살짝 누르면서 손끝에 집중했다.
‘이쪽에 담이 걸린 게 맞네.’
이런 자세라면 아마도 옆으로 누워서 보다가 잠이 들었다든가 했나 본데?
이제는 담이 걸린 위치만 보고도 어떤 이유로 담이 걸렸는지 짐작이 되는 허준이었다.
“혹시, 소파에서 TV 보시다가 그대로 주무셨나요?”
“어? 어떻게 그걸...?”
“종종 그런 분들이 여기가 아프다고 찾아 오시더라고요.”
허준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백승원이 감탄한 눈으로 자리로 돌아가는 허준을 쫓았다.
“선생님. 진짜 대단하시네요.”
“아닙니다. 혹시, 모르니 진맥 한 번 잡아 볼게요.”
그렇게 이어진 진맥.
위의 기운이 허하다.
‘체질도 위가 약한 체질이기도 하고.’
처방은 담 걸린 환부를 풀어주기 위해서 침을 사용하고,
위장에 도움이 되는 양곡과 해계혈에 침을 놓으려는 찰나,
‘잠깐.’
허준의 눈에 부자연스러운 경맥의 흐름이 느껴진다.
위장과 관련된 경맥의 중간이 제대로 흐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방을 바꾼다.
담이 걸린 목은 침으로.
그리고 경맥의 중간에 있는 저 자리. 천추혈.
위장과 관련된 경맥인 족양명위경에 있는 혈 자리 중에서도 대장의 모혈이라 불리는 아주 중요한 혈 자리다.
여기서 모혈이라는 것은 장부의 기운이 모여드는 중요한 혈 자리를 뜻한다.
‘대장의 컨디션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군.’
허준의 머릿속이 다시 한번 회전한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하자면.
자세로 인해서 담이 걸린 것은 담이 걸린 것이고,
위장의 맥이 약한 것은 체질이요. 천추혈 주변 경맥의 흐름이 약해져 있었으니.
‘제대로 소화와 흡수를 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 터.’
위장이 약한 체질이라 할지라도 젊고 건강할 때는 그렇게까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다만, 나이가 들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기운이 빠지면서 병의 원흉이 되거나 질환으로 이어질 뿐이었으니.
바꿔말하면, 여러 습관이나 운동으로 위장의 건강을 챙겨 주면 보다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뜻이다.
허준이 환자에게 물었다.
“혹시, 술을 자주 드시나요?”
“아니요~ 저는 술을 별로 안 좋아해서.”
환자의 나이는 50대.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 위장의 기운이 빠지기 시작한다라.
“그럼, 밥을 빨리 드신다거나, 국물이 없으면 밥을 못 드신다거나 그런 스타일이신가요?”
“어? 그걸 어떻게..? 네. 아무래도 회사생활 하다 보니까 습관이 돼서...”
“식사 이후에는 시원한 물도 한 컵 하시죠?”
놀란 얼굴의 환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나 위에 무리가 되는 일들이 반복되어온 상황.
허준이 차트에 적어가면서 처방을 내렸다.
“침 맞으시면 담 걸린 거는 금방 좋아지실 겁니다. 그리고 체질적으로 위가 약한 것은 이미 알고 계시죠?”
“아, 네. 다른 한의원에서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밥은 조금 천천히 꼭꼭 씹어서 드셔주세요. 식사 이후에 찬물도 조금은 자제해 주시고요. 그럼, 치료실로 가실까요?”
그렇게 치료실.
허준이 앉아 있는 백승원의 목 부위에 침을 찔렀다.
그리고 이어서,
아까 봤던 경맥의 흐름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은 천추혈.
‘여기다.’
그곳에 침을 꽂은 뒤에 한 손으로 족위양맥경이 흐르는 곳을 살짝 손에 대니,
약해졌던 기의 흐름이 침이 꽂힌 자리로 서서히 움직이며 채워가는 것이 아닌가.
천천히 조금씩 퍼져나가는 잉크처럼.
어느새 약해졌던 흐름을 채워나가 원래의 흐름대로 만들어 가고 있는 모습.
그것은 황홀한 경험이었다.
그때,
삐- 삐-
침을 놓으며 맞춰 둔 알람이 울려왔고.
치료실을 맡고 있던 김예진이 들어오며 놀란 목소리로 허준을 불렀다.
“원장님? 여기서 뭐하고 계세요?”
“아, 아닙니다.”
‘뭐야, 벌써 시간이?’
한동안 그 모습에 푹 빠져있던 허준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지.
“김 선생님. 뒷정리 좀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원장님. 혹시, 어디 아프신 거는 아니죠?”
“네. 별일 아니에요.”
그렇게 진료실로 돌아가는 허준을 보며 김예진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으셨는데.
그렇게 침을 다 맞고 일어난 백승원.
“어?”
거짓말처럼 움직이지 않던 목이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돌아가네?”
“환자분. 그렇게 막 돌리시면 안 돼요.”
“아, 죄송합니다. 선생님.”
밥을 천천히 꼭꼭 씹어먹으라고 했었지?
찬물은 바로 먹지 말고.
마법 같은 효과를 직접 겪으니,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아까 들었던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분명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흔한 말이거늘.
왠지 모르게 그래야 할 것 같은 백승원이었다.
* * *
한편,
마지막 마무리 공사 중인 빌딩 사무실에 앉은 세 사람.
김정우, 박진석 그리고 최인호가 떨어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호쾌하다는 듯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당연히 그 주제는 허준의 방송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첫 방송부터 그런 일을 벌였다는 거지?”
“네. 맞습니다.”
최인호가 웃으며 답했다.
사실 첫 방송이야 그냥 적응 겸해서 나가고 그다음부터는 이제 제대로 이미지를 빌드업할 생각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허준 원장이 먼저 움직이면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다 자네가 생각한 건가?”
“그럴 리가요. 저도 허준 원장이 그렇게 움직일 줄은 몰랐습니다.”
“이 친구야. 허준 그 친구 성격이 원래 환자를 보면 그냥 못 지나치는 성격인 거 알고 있잖나.”
그때,
옆에 있던 박진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허, 참. 나도 그 방송 봤는데, 확실히 한의학을 아는 내가 봐도 대단한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떻겠어? 그 친구를 본 게 이제 1년 정도밖에 안 된 것 같은데. 완전히 괴물이 다 되었더군.”
“허준 원장이 조금 그런 편이지요. 어쨌든, 방송 덕분에 요즘 허준한의원에는 담 걸린 환자들부터 시작해서 많이들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 말에,
김정우가 살짝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생 꽤나 하겠구만. 내가 탕전실을 조금 더 봐줄 걸 그랬나?”
“괜찮을 겁니다. 태용에 있던 혜민서 선생들이 순환 근무 겸 지원 나가서 잘 해내고 있는 모양이니까 말이죠.”
“다행이야. 그 친구들이라면 믿을 수 있지.”
그리고 그날 저녁.
허준한의원의 진료가 마감된 시각.
모두가 녹초가 되어 퇴근한 한의원에서 허준과 밥이 남아서 남은 일들을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밥 선생님 그거 정리 끝나는 데로 바로 퇴근하도록 하세요. 요즘 피곤할 텐데 무리하지 마시고.”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밥까지 퇴근하고
9시가 넘어서 한의원을 찾은 두 남자.
허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원장님. 전화드렸던 유현중 실장이라고 합니다.”
“이허준입니다. 이쪽이?”
이동훈이 모자를 쓴 채 두리번거린다.
마치, 무언가에라도 쫓기는 것처럼.
그리고 그런 이동훈의 옆에 새로운 퀘스트가 나타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