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최대한 뽑아내라고 하셨지
허준한의원 2층의 탕전실.
이진혁이 카메라 앞에서 단련된 미소를 지으며 허준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반갑습니다. 이진혁입니다.”
그러고는 눈치를 살폈다.
작년쯤 최 대표의 부탁을 받고 이 시장 골목에 왔다가 창피를 당했던 그 일의 상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혀 몰라보는 눈치.
‘혹시, 날 기억 못하는 건가?’
작년 이맘때쯤에는 그야말로 최전성기는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이곳저곳에 나올 만큼 인기를 끌었는데.
같은 시장 골목에 있었으면서도 자신을 전혀 모르는 것 같은 허준의 모습이 자존심을 건드린다.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최인호의 목소리.
“허준 원장. 자네 이진혁, 이 친구 기억 안 나나?”
“네? 혹시, 우리가 예전에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요?”
“뭐, 만났다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간접적으로 봤다고는 할 수 있겠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허준의 물음에,
최인호가 털털하게 웃으며 답했다.
“자네. 작년에 태용한의원이 되기 전에, 경희한의원에서 한때 TV에 나오는 유명한 한의사가 와서 진료를 본다고 했었잖아?”
“어?”
그 말을 듣자마자 기억난 허준.
맞아. 그때 환자들 사이에서 열풍이 불었었지.
“기억납니다. 그때 그분이셨군요? 어느 날 갑자기 다른 곳으로 가셨다고 해서 동네 환자분들 몇이 엄청나게 서운해하셨던.”
“맞아. 바로 그 친구야. 뭐, 그때는 개인 사정으로 인해서 예정했던 것보다 더 짧게 진료를 볼 수밖에 없었지만.”
이진혁이 최 대표와 허준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분명 누구 하나 기분이 나쁠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임에도, 눈앞에 있는 둘은 이미 지나간 과거를 담담하게 웃으며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한때의 추억이었었던 것처럼.
‘나만 혼자 과거에 갇혀 있었구나.’
그러면서 왠지 모르게 후련해지는 기분이 드는 이진혁.
허준을 바라보는 표정도 당연히 한결 가벼워진다.
“자, 그럼 일단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를 좀 해볼까?”
“네. 정리도 거의 끝났으니, 바로 따라 내려가겠습니다.”
“알겠네. 그럼, 먼저 내려가서 기다리도록 하지.”
그렇게 1층으로 향하는 두 사람.
이진혁이 최인호에게 물었다.
“이허준 선생이 탕약을 이렇게 늦게까지 직접 달이다니 환자가 꽤 많은가 봅니다?”
“허? 자네 작년에 여기서 근무할 때, 못 봤었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진혁이 이곳에서 일했을 당시에는 언제나 칼퇴를 했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허준에 관한 이야기를 제대로 듣기도 전에 환자와의 안 좋은 소문으로 이곳을 떠난 터였으니, 제대로 무언가를 알기도 전에 사라진 셈.
그저 그 환자를 허준한의원에서 치료했고,
환자가 잘 치료받았다는 이야기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최인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진혁을 바라봤다.
쯧쯧 이러니, 그런 소문에 휘말릴 수밖에.
한의원에 찾아온 환자를 내쫓았다는 소문.
내쫓긴 환자가 울며불며 시장 골목을 방황했다는 바로 그 소문의 주인공.
물론, 최인호는 그 소문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이진혁과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고, 이 녀석이 소문처럼 환자를 내쫓는다는 일을 할 정도로 멍청한 녀석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문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던가.
실제로는 하지 않은 일도, 조금만 와전되면 본인도 하는 일이 되어있는 것이었으니,
‘평소 품행을 단정히 하라는 옛말이 틀린 것이 없다는 뜻이겠지.’
매일 성실하게 환자의 진료를 보며 늦게까지 한의원에 머무르며 탕약을 내리는 한의사와 칼처럼 퇴근하며 환자들을 가볍게 여기는 한의사의 차이였을 터.
“저 친구는 매일같이 하루도 빼먹지 않고, 출근하는 날이면 저렇게 탕약을 달인다네. 물론, 오전부터 오후까지 직접 진료는 기본이고.”
“네?!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지금 내가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나?”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는지?”
못 믿겠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이진혁.
그리고 그런 이진혁에게 최인호가 답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그게 자네와 저 친구의 가장 큰 차이였다네.”
이쯤 이야기하고 있을 때,
허준이 한의원으로 들어왔다.
세 봉지의 탕약을 들고서.
“커피는 좀 그렇고, 이거라도 마시면서 할까요?”
“그거 좋지.”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
허준도 촬영을 벌써 두 번이나 했었으니, 이야기는 바로 프로그램에 속해있는 다른 패널들의 이야기가 주제였다.
“그러니까, ‘건강의 제왕’에 나가신다는 거죠?”
“네. 맞습니다.”
“건강의 제왕 패널이 보통 12명 정도 되는데, 이 중에서 보통 한의사가 3명 정도. 의사가 5명 그리고 식품 쪽이나 요리연구가 등 다른 분야에서 4명 정도로 균형을 맞춥니다.”
“되게 잘 아시네요?”
그 물음에 최인호가 답했다.
“저 친구가 얼마 전까지 건강의 제왕 고정 패널이었었거든. ”
“하하, 네. 부끄럽지만. 제가 꽤 오래 나왔었거든요.”
갑작스러운 칭찬에 기분이 한결 좋아진 이진혁.
“이어서 설명하자면, 한의사 패널 쪽에 고정 자리가 한 자리가 있어요. 원래는 저까지 고정이 두 명이었다가 이제 한 자리만 남은 셈이죠.”
“한 자리라면?”
“지금 고정 자리는 바로 케이한방병원의 자리라고 보면 됩니다.”
케이한방병원.
한의사 중에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니, 한의사뿐만 아니라 길을 걸어가는 사람 아무나 잡고 물어봐도 십중팔구는 아는 이름일 것이다.
어디를 가나 흔하게 그 이름을 볼 수 있었으며, 국내 최대규모의 시설을 비롯해 전국에 체인화에까지 성공한 한방병원이었으니까 말이다.
“확실히 그렇겠군요.”
“네. 그리고 그 자리에 앉는 사람들이 전부 케이한방병원에서 좀 유명한 분들이거든요. 덕분에, 다른 한의사 패널들이 편집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물론 저도 꽤 많이 당한 편이고요.”
그때의 일이 분한지 이진혁이 주먹을 꽉 쥐며 말을 이었다.
“뭐, 보통은 태클을 걸면서 편집이 시작되더라고요. 예를 들어 제가 어떤 혈 자리를 이렇게 자극하면 어디에 참 좋다더라. 라고 발표하고 그걸 사람들에게 보여주죠. 그런데, 거기서 이제 다른 의견을 내는 겁니다. 또는 더 획기적인 내용을 가져오기도 하죠.”
허준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방송 분량에는 한계가 있으니, 그 분량을 맞추기 위해서 최우선으로 케이한방병원 쪽 패널의 의견을 반영한다는 이야기로군.
최인호가 고개를 끄덕이는 허준에게 말했다.
“어때? 들어보니까, 이해가 조금 되나?”
“네. 어렴풋이 그러지 않을까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생각했던 그대로 심플하네요.”
“심플하다면 심플할 수 있지. 자본주의에서는 언제나 힘의 논리가 우선이니까.”
“이진혁 선생님. 그럼, 다른 이야기도 조금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진혁이 허준의 공손한 모습에,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죠. 제가 아는 것은 전부 말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를 나눈 뒤,
최인호가 떠나기 전에 허준을 불렀다.
“참, 허준 원장. 김강현 대표 알지?”
“네. 얼마 전에 만나셔서 이야기 잘 됐다면서요?”
“맞아. 그런데 말이야, 김강현 대표가 급하게 한 친구만 좀 봐달라고 하더군.”
“급하게요? 무슨...”
“나도 아직 거기까지는 몰라. 다만, 워낙 간절하게 부탁해서 자네가 좀 봐줬으면 좋겠는데.”
허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1명쯤이야.
“알겠습니다.”
“고맙네. 김 대표에게는 내가 전하도록 하지. 그럼, 조만간 또 보자구.”
“들어가십시오. 이진혁 선생님도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닙니다. 또, 궁금한 점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 * *
이제는 시장 골목의 남은 한쪽마저도 듬성듬성 비어가고 있는 상황.
그 상황 속에서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이야기 들었어? 태용네도 곧 있으면 간다던디?”
“그래? 하이고~ 하긴, 동네 사람들도 많이 나갔는데, 하나둘 떠나가는 거지.”
“그래서 아지매는 언제 갈 거여?”
“나도 슬슬 준비는 해야지? 참, 정 많이 들은 동네였는디.”
이제 이곳에 남은 사람들은 거의 식당이나 간단한 분식집 같은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거리에 있는 허준한의원에 꾸준히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있었으니,
그들이 오가며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허준네는 언제까지 한 대?”
“허준네는 그래도 조금 더 있을 거라던데?”
“그럼 나도 허준네 나간다는 이야기 들리면 준비해야겠네. 거기 가려고 오는 환자들이 배고플 거 아니여.”
길거리에 앉은 노인들의 수다가 이어졌고,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허준한의원 안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데스크 팀의 최유니 선생.
어제 휴무였기에, 김 선생에게 전달받은 장소로 나갔는데,
이게 웬걸.
깨끗하고 어마어마한 크기의 한방병원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자신을 마중 나온 새로운 원장님과의 면담.
지금보다 훨씬 높은 급여의 이야기는 출근하자마자 그녀의 입을 쉼 없이 떠벌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아직 휴무 날이 아니라서 가보지 못한 윤다희와 이수영 그리고 남복희 선생님까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게 정말이야?”
“네~ 선생님들이 직접 가보셔야 제 말을 믿을 수 있다니까요? 이게 말로만 해서는 그 모습을 다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내년부터 큰 한방병원에서 좋은 조건으로 일할 수 있다는 이런 거지?”
“그뿐만이 아니라니까요? 우리 데스크 선생님들 숫자도 엄청 많아요.”
최유니가 어제 본 간호조무사 선생님들을 떠올리며 답했다.
어떻게 보면 허준한의원에서 처음으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 사람이었으니까.
이렇게 데스크 팀에서 한창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을 때,
허준은 당연히 진료를 보는 중이었다.
그 옆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이두철 선생.
지금 진료를 받는 환자는 입원실의 최은영 환자였다.
허준이 최은영의 몸 여기저기를 감각적으로 느끼면서,
마지막으로 진맥을 잡았다.
‘좋아.’
최근에 새로 내린 처방으로 이미 많이 회복된 최은영.
그런 그녀의 옆에는 더 이상 퀘스트가 자리하지 않았다.
그저 다른 쪽으로,
「포인트를 5000 획득하였습니다.」
라는 메시지만이 남아 있었을 뿐.
굳이 이것이 아니더라도, 허준의 눈에는 이전과는 다르게 활기차게 흐르는 경맥의 흐름이 눈에 들어온다.
추나가 효과가 있었어.
덕분에 잠을 푹 잘 수 있게 되었고, 한동안 멈춰있었던 회복이 다시 빠르게 올라온 것이었다.
‘역시 사람은 잠을 잘 자야해.’
가장 기본적인 이치를 다시 한번 느낀 허준이 최은영에게 말했다.
“이제는 퇴원하셔도 될 것 같아요.”
“정말요?”
“네. 잠도 잘 자고, 먹는 것도 잘 먹고, 틈틈이 운동으로 관리만 해주시면 될 것 같은데요?”
최은영의 눈빛이 촉촉해지며 허준을 바라봤다.
개운함, 기쁨, 통쾌함. 등등.
복합적인 감정을 가진 그 눈빛에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허준.
허준이 최은영의 눈빛을 받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보다, 차 조심하시는 거 잊지 마시고요.”
“그야 당연하죠. 선생님.”
그리고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이두철.
심장이 두근거린다.
나도 저렇게 환자를 치료해보고 싶다.
환자가 저렇게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바라보면 어떤 느낌일까.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순간.
지금, 옆에서 그 순간을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박용준 원장의 한 마디.
‘앞장서서 길을 터주는 선생님들이 계시니까요.’
그래.
나도 열심히 하다 보면 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여기저기 쑤시던 온몸이 왠지 모르게 한결 나아진 것 같은 이두철이었다.
* * *
같은 시각.
휴무를 맞이한 김예진.
그녀가 찾은 곳은 한의사협회라 적힌 명패가 달린 건물이었다.
‘원장님이 최대한 뽑아내라고 하셨지?’
허준한의원의 간호조무사 김예진이 아닌,
혜민서란 단체의 대표 김예진이 각오를 다지며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