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자네가 오늘 만나야 할 사람
이제는 어엿하게 진료실에서 1인분을 해내는 로버트 킴. 아니, 밥.
환자들도 처음에는 호기심 반 의심 반의 눈빛을 보냈었으나, 지금은 밥 선생을 찾아오는 몇몇 고정환자도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영어로 대화하여 잘 이야기가 안 통할 것 같은 모습을 가진 그였지만,
허준의 진료를 보조하는 동안에 이것저것 많이 배웠으니 사람들의 선입견을 깨트리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몇몇 환자의 경우에는 어렸을 적에 유학 생활을 하면서 한의학에 대해서 잘 이해를 못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사람들은 특히나 밥을 더욱 좋아했다.
한의학적인 요소를 느낌 그대로 외국식의 표현으로 풀어내면서 환자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줬기 때문이리라.
어찌 됐거나 점심시간.
진료실에서 나온 밥을 본 데스크 선생들이 불렀다.
“밥 선생님. 빨리 오세요. 점심 드셔야죠.”
“네~ 지금 갑니다!”
그렇게 시작된 점심시간.
자연스럽게 모여있는 한의원 식구들 사이에서 살짝 긴장한 얼굴로 거리감을 둔 선생이 있었으니,
“이두철 선생님?”
“아, 네.”
“제가 그 옆에 앉아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밥이 이두철의 옆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저기... 여기서는 원래 이렇게 점심을 먹나 보죠?”
“네. 특별한 일 없으면 매일 이렇죠.”
아직도 이 모습이 낯선 이두철.
태용한의원에서는 아무리 친해도 이렇게 간호조무사 선생님들과 한의사들이 모두 모여서 먹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도시락이라니.
어쨌든 당분간 이곳으로 출근하게 되었으니, 빠르게 적응을 해야겠지.
그렇게 젓가락을 들어 도시락을 먹는데,
그 맛이 심상치 않았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밥이 물었다.
그도 처음에 정확히 저런 모습이었으니까.
“맛이 썩 괜찮죠?”
“네. 생각보다 훨씬 맛있네요?”
“여기가 음식 퀄리티가 좋더라고요. 입원실 환자들도 먹는 음식이라 건강 생각해서 간도 적당하고.”
“그래요? 그건 몰랐네요.”
“그보다 원장님과 함께 한 오전 진료는 어떠셨어요?”
그 물음에 이두철이 오전 진료를 보조하며 본 모습들이 떠오른다.
“정말, 배울 게 많더라고요. 물론, 허준 원장님이야 혜민서 활동 때에도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는데. 이게 또, 진료실에서 모습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더라고요.”
대답을 들은 밥이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보내는 따듯한 눈빛.
“그래요? 아마, 오후에는 더 신기한 것을 많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서는 허준이 고요한을 비롯해 데스크 팀과 식사 중이었는데,
김예진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참, 원장님. 박상준 씨 기억나세요?”
“박상준 씨요? 물론이죠.”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꺼멓게 죽은 발을 가지고 한의원을 찾아온 젊은 산악인.
진료실 벽 한쪽에 있는 사진의 주인공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데.
“박상준 씨. 이번에 수능 본 거 모르시죠?”
“그래요?”
“왜~ 제가 몇 달 전부터 아는 동생 있다고 총명탕 지어갔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어느 날 갑자기 김 선생이 오더니 총명탕을 지어달라고 했었었지.
친한 동생에게 선물로 주려고 한다더니,
그 주인공이 박상준이었나 보다.
“네. 기억합니다.”
“그거 박상준 씨가 이번에 수능 본다고 해서 제가 선물로 준거였거든요.”
“아니, 그런 거면 저한테 미리 말씀하시지...”
“그러려고 했는데, 박상준 씨가 그러더라고요. 원장님 바쁘실 텐데, 굳이 말하지 말라고. 나중에 다 끝내고 들리겠다던데요?”
“그랬군요. 그래서 수능은 잘 봤대요?”
“네. 잘 봤대요. 그것도 엄청. 최상위권으로.”
“진짜요? 정말, 잘됐네요. 이거 선물이라도 줘야겠는걸요? 다음에 오면 꼭 말해주세요.”
오랜만에 들은 반가운 이름에 허준의 기분도 좋아졌다.
뭔가 환자들이 잘되었다는 이야기나 소문을 들을 때면,
‘나 한의사 하길 정말 잘했어.’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때,
“그래서 한의대 지원할 거래요.”
“네!? 아니, 왜...”
요즘에는 예전과 달라서 최상위권이면 당연히 의대를 가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한 허준.
그런 허준의 되물음에,
“그야, 당연히 원장님 때문이겠죠.”
김예진의 답이 들려왔다.
이렇듯 시끌벅적하게 마무리된 점심시간.
다시금 진료실에 돌아온 허준과 이두철.
점심에 들었던 반가운 이야기는 한구석에 넣어둔다.
이어서 시작된 오후 진료.
첫 진료는 초진환자였다.
‘음, 어깨가 잘 안 올라가고 아프다라.’
진료실 문이 열리며 환자가 들어온다.
50대가 조금 넘으신 연세.
“아이고, 선생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이쪽으로 앉으시겠어요?”
허준이 환자의 움직임을 확인한다.
역시나 걸어올 때의 모습부터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소문 듣고 찾아왔습니다. 제가 요새 어깨가 너무 아파서요.”
“알겠습니다. 그럼, 한번 볼까요?”
허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자가 아프다는 오른팔을 살짝 들어 올리고는,
다른 손으로 어깨를 살짝살짝 눌러가며 진단을 시작했다.
‘오십견이네.’
동결견, 유착성 관절낭염이라 불리는 흔한 질환.
다만, 이번 환자의 경우에는 그 상태가 조금은 심한 편이다.
왜냐면 팔을 들어 올릴 때마다 환자의 몸이 움찔거리며, 얼굴이 살짝 찡그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곧, 통증이 수반된다는 뜻이었으니.
‘어깨 관절낭의 섬유화가 진행되었군.’
허준이 자리로 돌아와 앉은 뒤,
“손을 이리로 올려주시겠어요?”
진맥을 잡았다.
역시 연세가 있으신 만큼, 몸의 기운이 쇠약해지면서 장부들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
이렇듯 연세가 있으신 분들이 빠르게 회복하기 위해서는 각 장부의 균형은 물론이요, 쇠약한 기운도 끌어올려 줘야 할 터.
균형은 침으로 맞추고, 쇠약한 기운은 왕뜸으로 처방하는 게 좋겠군.
게다가 직접적인 원인인 어깨에는 섬유화된 부분을 도침으로 상처를 입혀 자극하고, 약침을 같이 처방하여 치료할 생각이었다.
“침이랑 뜸이면 충분할 것 같네요. 그런데, 맞으셔야 할 침이 조금 길거든요? 물론, 일반 침보다는 조금 아프고요.”
“많이 아픈가요?”
“아니에요. 다만, 이게 이제 긴장하거나 놀라서 움직인다거나 하면 위험하니까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그럼, 치료실에서 뵙죠. 이도철 선생님. 치료실로 안내해 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이도철이 환자와 함께 진료실을 나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허준이 치료실로 들어왔다.
“자, 편하게 앉아 계세요.”
이두철이 할머니의 몸을 부축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허준의 부탁이었다.
‘도침이라니?’
실제 도침치료를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인 이두철이었다.
애초에 도침치료 자체가 굉장히 위험성이 있었기에, 생각보다 대중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끝난 도침치료.
‘뭐야... 벌써?’
이어서 약침이 들어가고,
허준 원장이 직접 할머니의 어깨를 잡았다.
‘잠깐, 저건 추나잖아?’
카이로베드 위에서 하는 것은 아니나,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지금 하는 게 추나치료의 일환라는 것을.
“아이고~ 조금 아픈 것 같은데?”
“조금만 참아주세요~”
그렇게 몇 번 움직이니,
“어때요? 올라가죠?”
마법같이 안 올라가던 팔이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물론, 끝까지 완벽하게 올라간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랄만한 일이었다.
“올라가네? 어머, 이게 올라가.”
“그럼, 이제 엎드려 주시겠어요? 간단하게 침 맞으시고, 뜸까지 하면 많이 좋아지실 거예요.”
그러면서 재빨리 여기저기에 침을 놓는 허준.
그런데, 그 자리가 심상치 않았다.
‘저기는 대체 왜?’
보통 한의원에서 이렇게 근육이나 관절이 아프다 하면, 직접적인 환부에 놓는 아시혈 외에도 그 자리와 연관이 있는 혈 자리에 침을 놔주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자면 허리가 아프면 허리와 관련이 있는 발등의 태충혈이나 발뒤꿈치에 있는 태계혈 같은 자리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허준이 놓는 자리는.
매우 생소한 자리였으니.
허준이 이두철의 시선을 느끼고는 답했다.
“여기가 경별이 흐르는 자리거든요. 자, 다 끝났으니 이만 진료실로 돌아가도록 할까요? 다음 환자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이어진 진료에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그렇게 진료 마감.
똑, 똑-
“원장님. 마감하겠습니다.”
김예진 선생이 들어와 마감을 알렸고,
허준이 종일 같이 진료실에서 보조를 맞춰 준 이두철을 불렀다.
“이두철 선생님. 오늘 처음 오셨는데, 수고 많으셨어요.”
“아니에요. 원장님이 고생 많으셨죠.”
“먼저 퇴근하세요. 저는 오늘 입원실 진료랑 탕전 업무도 남아 있어서.”
“아닙니다. 같이 퇴근하도록 하겠습니다.”
“에이~ 첫날인데 그럴 수 있나요? 오늘은 일찍 들어가시고, 그건 내일부터 생각해보도록 하죠.”
이두철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는 다음날이 되어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 * *
미남한의사 이진혁.
깔끔하게 생긴 외모와 신뢰감을 주는 목소리 그리고 전문직의 타이틀은 그를 남들보다 쉽게 방송에 진출시켜 주었다.
덕분에, 방송을 보면서 찾아온 많은 환자가 한의원의 매출을 올려주었고,
한동안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24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이 있었으니,
TV에 출연이 잦아지면서 점차 한의원에 신경을 쓰기가 어려워졌으며 한의학에 대한 경험 또한 같은 경력을 가진 한의사들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는 법.
선택의 순간이었다.
그래서 택한 길은 당연히 방송 쪽의 특화.
즉, 마케팅.
하지만, 어디 방송 업계가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대중들은 늘 새로움을 원했고, 그것은 자신과 같은 포지션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고정으로 나오던 프로그램은 점차 빈도가 줄어갔고,
이제는 뜨문뜨문하게 연락이 오는 이진혁.
덕분에, 찾아오는 환자들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한의원의 매출은 곤두박질치는 중이었다.
‘이번 달은 생각보다 매출이 많이 떨어졌는데?’
그때, 갑자기 연락이 온 최인호 대표.
그 사건 이후로 연을 끊고 살자더니, 이 양반이 웬일이래.
여기서 그 사건은 허름한 시장 골목의 한의원한테 자신이 쪽팔림을 당했던 바로 그 사건을 말한다.
‘그러고 보니, 이 양반 지난번에 운영하던 한의원 죄다 원장들에게 넘기고 한방병원 준비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이렇게 매출이 떨어질 바에야,
차라리 나도 한방병원으로 옮겨 봐?
그렇게 연락한 이진혁.
“아이고~ 최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이진혁 선생. 잘 지내고 있지?”
“그럼요.”
“TV에서 여전히 얼굴이 보이기는 하던데, 요새 프로그램이 좀 줄었나 봐?”
“하하. 제가 한의원이 조금 바빠서.”
“그래? 자네와 이야기하고 싶은 게 조금 있는데, 어때? 만날 수 있겠나?”
“안 그래도 저도 우리 최 대표님 생각이 딱 났습니다. 어디로 찾아뵈면 될까요?”
“주소 찍어줄 테니, 이리로 와.”
이진혁이 최인호를 만나러 갔는데,
그곳에는 커다란 빌딩이 자리하고 있었다.
‘설마... 이게?’
이정도면 가장 큰 케이한방병원만큼 커다란 규모였다.
그렇게 놀란 눈으로 살펴보고 있는데,
“이진혁 선생. 오랜만이야. 자네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군. 늙지를 않아.”
“오랜만에 뵙습니다. 최 대표님.”
“그래. 일단, 가면서 이야기를 좀 하지.”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이어진 이야기는 간단했다.
뭐, 누구와 만나서 방송에 출연할 때의 팁이나 이런 부분들을 알려달라는 것.
“그래서 제가 얻는 것은 뭔가요?”
“허, 사람 참. 급하기는. 자네, 예전에 건강식품 한번 팔고 싶다고 했었지?”
“그걸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물론이지. 그래서 내가 아는 업체를 소개해주도록 할까 하는데. 어때?”
이진혁의 눈에 멀어져가는 한방병원의 아른거렸지만,
그 사이를 욕심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그렇게 찾아온 곳은.
왠지 모르게 낯설면서도 낯익은 장소.
“여기는?”
“맞아. 예전에 있던 그 시장 골목.”
“와~ 이거 완전히 다 밀어버려서 몰라보겠네요. 이쪽도 불이 다 꺼진 거 보니, 조만간 밀어버릴 생각인 것 같은데요?”
그러더니 시선이 멈춘 곳에는 아직 환하게 불이 들어온 곳이 보였다.
바로 허준한의원이었다.
허준이 문이 열리며 들어온 최인호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최 원장님. 이분은?”
“아, 이진혁 선생이라고. 내가 말했던 자네 도우미.”
“반갑습니다. 이허준이라고 합니다.”
“설마...?”
이진혁이 최인호를 바라봤고,
최인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자네가 오늘 만나야 할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