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날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어느새 새벽 2시.
김예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렸다.
“휴~ 드디어 어느 정도 정리됐네.”
방송이 나간 뒤에 몰려든 신규 가입 회원들을 정리해서 인근에 있는 선생님들과 연결해 주었고, 일반 자원봉사를 지원하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로 곳곳으로 배치를 끝낸 것이었다.
당장 매주 행사가 이어지는 만큼, 혜민서의 방문을 원하는 곳들도 대충 배정까지 마친 상황.
‘일단은 가장 급한 일은 처리했고.’
이정도까지 하는데 3주 가까이 걸린 것 같다.
출퇴근도 해야 하는 데다가, 무엇보다 워낙 많은 연락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졌으니까.
어쨌든, 이제 남은 것은 여기저기에서 들어온 후원금 정리와 여기저기서 협력하자는 단체들을 비롯해 기타 잡무들이 남아 있었다.
‘아무래도 단체와 관련된 일은 원장님과 상의하는 편이 낫겠어.’
그렇게 다음 날.
일찍 출근한 김예진.
평소처럼 치료실을 돌아보며 깔끔하게 정리를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둘 한의원 식구들이 출근하기 시작했다.
“어? 김 쌤? 벌써 다 정리해 놓으신 거예요?”
“그~ 러게요? 어쩌다 보니..”
“참, 김 쌤도 가끔 보면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다니까요?”
이제는 얼핏 보기에도 배가 돋보이는 윤다희가 웃으며 말했다.
“그보다 윤 쌤. 아직 괜찮으신거 맞죠?”
“물론이죠. 검사도 꾸준히 받고 원장님도 자주 진료 봐주시잖아요. 그 덕분인지 아주 건강하다는데요? 오히려 너무 큰 거 같다는 이야기도 하더라고요 병원에서.”
“다행이네요. 그래도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바로 말해주세요.”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
데스크 팀을 비롯해 진료팀 선생님들도 하나둘 출근하기 시작했다.
‘오늘 유도진 선생님은 휴무시구나.’
그때, 한의원 문을 열고 들어온 허준.
“원장님. 오셨어요?”
“좋은 아침입니다. 김 선생님.”
“네. 좋은 아침이에요.”
“참, 김 선생님에게 할 말이 있는데, 잠시 들어오시겠어요?”
“마침, 잘됐네요. 저도 원장님과 상의할 일이 있었거든요.”
그렇게 진료실.
밥 선생의 가방이 걸려있는 것으로 보아하니, 아마 2층에 진료를 돌러 갔나 보네.
허준이 외투를 벗고 가운을 걸치며 물었다.
“먼저, 말씀하시죠.”
“네. 다름이 아니라...”
김예진이 허준에게 준비해온 서류를 건넸다.
허준이 뭔가 싶어 그 서류를 넘겨 보는데,
“이건...?”
“네. 이번에 방송 나가고 늘어난 혜민서 회원들 명단입니다.”
“엄청 많네요? 김 선생님 힘드셨겠어요. 이거 다 정리하시느라.”
“아니에요. 그냥 뭐... 할 만했어요.”
괜히 그동안의 고생이 떠오른 탓일까.
그녀의 얼굴에 묘한 살기가 느껴진다.
‘김 선생님의 저런 표정은 처음이네.’
“정말 감사드려요. 진작 말씀하셨으면 도와드렸을 텐데. 제가 나중에 맛있는 거라도 대접할게요.”
허준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왠지 지금은 이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받은 이 명단의 숫자가 대략 허준이 알고 있던 혜민서 선생님들의 숫자보다 많았기 때문이었다.
대충 어림잡아도 이전과 비교하면 3배 가까이 늘어난 규모.
게다가 그 늘어난 규모를 통솔해서 점조직처럼 지역별로 이미 배정까지 마친 상태였으니,
‘김 선생님이 아니면 큰일 날 뻔했어.’
이거 아무래도 사람을 더 늘리던가 해야겠는걸.
김예진이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알겠어요. 그보다 그 뒤쪽을 봐주시겠어요?”
그 말에 허준이 페이지를 뒤로 넘기자.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액수의 후원금의 목록이 보였고.
몇 페이지를 더 넘기니,
그곳부터는 이런저런 업체부터 단체들의 연락처까지 주르륵 정리되어 있었다.
“방송 나가고 난 뒤에 연락이 온 곳들이에요.”
역시 방송의 힘은 어마어마하네.
새삼스럽게 대중매체가 가지는 힘을 느끼는 허준.
“이것도 뭐, 김 선생님이 다 알아서 해주세요. 지금, 대표는 선생님이시니까요.”
허준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김예진에게 말했다.
그만큼 그녀는 믿을만한 사람이었으니까.
“제가 정말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전 선생님을 믿거든요.”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요. 한의사협회에서 연락이 왔는데.”
갑자기 한의사협회라니.
거기에서 웬일로 연락이 다 오지?
회비 안 낸지 오래인데.
“방송 나간 뒤에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었어요. 제 생각에는 아마도 지금 혜민서의 이름이 조금 여기저기 나간 상황에서 숟가락 하나 얹고 싶은 것 같아요.”
김예진의 개인적인 판단이었다.
군대에 있을 때도 종종 이런 일을 겪었기 때문이리라.
허준도 무슨 상황인지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긴 최근에 의사협회와 한의사협회에 관련한 뉴스들은 부정적인 게 많은 편이었지.
자극적인 기사로 밥그릇 싸움이라던가 논쟁 등등에 관련된 기사가 가장 많았으니까 말이다.
이때, 최근에 방송으로 대중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준 혜민서의 등장에 숟가락을 얹어 이미지의 변화를 노리겠다는 뜻일 터.
‘그러면 생각보다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한의사협회에 가입하지 않아서 활동하지는 않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현존하는 한의사가 모인 단체 중에서는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런 단체의 지원은 혜민서에게 있어 좋은 영양분이 될 터.
게다가 섣불리 거절해서 미운털이 박히기라도 한다면,
쓸데없는 일에 엮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그럼, 그러라고 하세요.”
“네!?”
김예진이 허준의 대답에 살짝 놀라 되물었다.
그러자,
“대신, 공짜는 아니고요. 받을 수 있을 만큼 지원은 최대한 받은 다음에요.”
허준이 살짝 웃으며 말했고,
그것을 본 김예진은 곧바로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알겠어요. 제가 최대한 잘 이야기해 볼게요.”
“좋습니다. 참, 그리고 제가 할 이야기는 다름이 아니라, 쉬는 날에 함께 가주셨으면 하는 곳이 있어서요.”
“쉬는 날에요?”
“네. 데스크 팀 선생님들께 전부 전해주세요. 휴일에 시간을 좀 비워주셨으면 좋겠다고요.”
“혹시, 일하러 가는 것은 아니죠?”
“물론이죠. 저를 어떻게 보시고... 저 그런 악덕 원장은 아니거든요?”
* * *
일요일.
태용한의원 사람들이 한의원으로 출근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출근이 아니라 원장의 부름에 모여있었다.
김태식과 박용준 그리고 이두철 선생에 더해서 데스크 팀까지 전부.
이는 일요일에 진료를 보지 않는 태용한의원에서는 보기 힘든 일.
아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원장님. 대체 무슨 일 때문에 부르신 거예요?”
데스크의 맏언니 김 선생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김태식 원장에게 물었다.
하도 오래 얼굴을 봐와서 그녀가 독실한 신자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김태식이 꼬리를 말며 답했다.
“죄송해요. 선생님. 교회 가는 날인데 불러서.”
“그러니까 왜 오라고 한 것인지 이유를 좀 말씀해주세요. 아무 설명도 없이 그냥 이렇게 모이라고 하시니까.”
김태식이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자신도 왜 모이는 건지 몰랐으니까.
그때, 문이 열리며 허준한의원 식구들이 들어왔다.
허준과 밥 그리고 데스크 선생 중 일부였다.
입원실과 365일 진료를 보는 허준한의원이었기에,
유도진을 비롯해 남은 인원이 한의원을 맡고 있었다.
김태식이 허준을 보며 반겼다.
자신을 째려보는 이 난처한 상황에서 구세주의 등장이었으니,
“어~ 허준 원장. 잘 왔어.”
“다들 일찍 오셨네요?”
“우리 선생님들이 원래 좀 부지런하시거든.”
그 말에 이어서 박용준이 물었다.
그도 궁금했기 때문이리라.
“그보다, 허준 선생님. 오늘 대체 무슨 일 때문에 모이라 하신 거예요? 유일한 휴일인데...”
“아~ 죄송해요. 갈 곳이 있어서요. 바로, 출발해 볼까요?”
그렇게 도착한 공사현장.
아니 이제는 공사현장이라기보다는 어엿한 빌딩의 위엄을 갖춘 모습이었다.
‘와, 안 와본 동안에 완전히 달라졌네.’
차에서 내린 일행들 건너편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최 원장님?”
태용한의원 데스크의 간호조무사 선생님들이 가장 먼저 그를 알아보고 외쳤고,
곧이어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모두 환영해요. 쉬는 날에 불쑥 호출해서 죄송합니다. 일단, 따라오시죠.”
그렇게 안으로 들어간 일행들.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눈에 봐도 이곳이 어떤 용도로 만들어진 곳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눈앞에 딱 봐도 데스크처럼 보이는 곳과 환자들이 접수 이후에 앉아서 대기할 것만 같은 모양새의 의자들.
생김새와 디테일은 달랐으나,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한의원의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 설마?”
“맞아요. 내년에 우리가 같이 일할 곳입니다.”
최인호의 대답에 일행들이 각자 두리번거리며 수군거렸다.
“와... 분위기 진짜 좋다. 안 그래요. 김 쌤?”
“그러게요. 굉장히 고급스러워 보이네요.”
“여기면 지하철역이랑도 가까워서 출근하기도 편하겠는데?”
“그러게. 그런데, 진료실은 어딨지? 아무리 봐도 안 보이는데?”
그 물음에, 허준이 답했다.
“진료실은 위층에 있습니다.”
“정말요?”
“그럼, 여기뿐만 아니라, 2층까지 사용하는 거라고요?”
“와...”
“최 원장님. 언제 이런 곳을 다-”
김태식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기대해보라고 했던 말이 바로 이것이었나?
솔직히 상상 이상이었다.
어느 정도 규모는 될 거로 생각은 했는데, 비록 강남은 아니지만 역 근처에 있는 새 빌딩.
거기다가 무려 2층의 규모라니.
그렇게 다들 놀라 하는 얼굴에,
최인호가 웃으며 답했다.
“뭘, 벌써 놀라고 그러나? 그리고 자네들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나 본데.”
“네? 저희가 뭘요?”
“허준 원장. 자네가 대신 말해주게.”
최인호의 부탁에 허준이 일행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우리는 내년부터 이 빌딩 전체를 사용하는 한방병원에서 근무하게 될 겁니다.”
“네!?”
“그, 그러니까. 이 빌딩을 통째로 사용한다고요?”
“맞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 여러분들이 이곳에 온 이유기도 하고요.”
잠시간의 정적.
그 정적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최인호였다.
“자, 간단하게 이야기할게요. 이 병원은 국내 최대규모로 만들어진 새로운 한방병원입니다. 그곳에서 여러분들이 거부하지 않는 이상 그대로 근무를 하게 될 테고요. 물론, 그에 따라 급여조정과 휴무 등이 당연히 새롭게 바뀔 겁니다. 지금보다 절대 불만족스럽지는 않을 테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여러분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규모가 달라지고 시스템이 달라진 만큼, 새로 손발을 맞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다들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최 원장님이라면 믿을 수 있지.”
“맞아, 이거 당분간 교회 못가겠는데?”
등등의 대답들.
허준네 식구들이 허준을 바라봤고, 허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냐는 무언의 물음이었으리라.
“좋습니다. 그럼, 오늘은 간단하게 병원을 둘러보시면서 한 분씩, 개인 면담을 진행하도록 하죠.”
그렇게 최인호와 한 명씩 방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밖에서는 김태식과 박용준이 허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허준 선생님. 이거 다 알고 계셨던 거예요?”
“아, 그게...”
“자네. 실망이야. 이런 엄청난 일이 있다면 진즉에 귀띔이라도 해줬어야지. 함께 한다고 해서 믿고 있었는데, 이건 배신이야 배신.”
“죄송합니다.”
“그러게요. 실망이에요 허준 선생님.”
그리고 면담실 안.
최인호 앞에 앉은 김예진에게 말했다.
“김 선생님은 데스크가 아니라, 다른 일을 맡아줬으면 하네.”
“다른 일이요?”
“자네도 봤다시피, 여기 규모가 엄청나거든. 나 혼자서는 뭐 하기가 어려워. 일도 많고. 그래서 말인데, 이곳의 전반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총무로 와서 날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