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이제 식구들도 준비해야지
살다 보면 종종 신기한 증상을 경험하게 된다.
교통사고가 특히 그러하다.
정말로 아주 살짝 부딪혀서 넘어진 뒤에,
그 자리에서 괜찮냐는 물음에.
“네. 괜찮은 것 같아요.”
라고 답하면서 툭툭 털고 일어나 멀쩡하게 걷다가도 며칠이 지나거나,
또는 그날 밤이 되면 기분 나쁘게 쑤신다거나 욱신거리는 통증이 생기는 경우.
아니면 실제로 병원에서 여기저기 수술이나 치료를 끝내고, ‘이정도면 퇴원하셔도 되겠는데요?’라는 말을 듣고 퇴원해도 지금의 최은영 환자처럼 시간이 지나 통증이 생기는 경우가 바로 그것들이었다.
때문에, 입원실에 누워있는 동안에도 최은영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걸.
똑똑-
“최은영 님. 아침 드실 시간이에요.”
처음으로 누군가 와서 깨울 만큼 푹 잠이 들었던 것이다.
‘벌써 아침 시간이라고?’
최은영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스마트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정확히 아침 8시하고도 3분.
진짜로 아침 식사시간이다.
이게 대체 얼마 만에 정신없이 잠을 잔 걸까.
대체 무슨 변화가 생긴 거지?
이날을 기점으로 조금씩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허준의 처방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최은영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호전되었고.
그것을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당연히 환자 본인인 최은영이었다.
당장 해가 떨어져도 매일 느껴오던 통증이 사라진 상태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녀에게 생긴 이 작은 변화를 도영철을 필두로 입원실 식구들도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하루 세끼의 밥을 먹고, 프로그램대로 같이 운동을 함께하는 등,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바로 입원실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
최은영은 입원실에서도 홍일점.
게다가 그녀의 나이는 젊은 환자들에게는 친구뻘이요, 연세가 조금 있는 환자들에게는 딸이나 사촌뻘이었으니,
입원해 있는 환자들은 혹시나 그녀가 불편하지 않을까 더욱 신경을 쓰면서 생활하는 것이 당연했으리라.
그래서 서로 인사하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친해진 환자들.
그들이 그녀의 변화를 보며 중얼거렸다.
“요새 은영이 얼굴 많이 좋아지지 않았어?”
“그러게. 느낌이 온다, 느낌이 와.”
“김 씨,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아마, 조만간 퇴원할걸?”
김 씨라 불린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자, 옆방의 젊은 친구가 물었다.
“김 씨 아저씨는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내가 여기 중에서 가장 오래 입원해 있었거든. 그러다 보니, 퇴원할 때가 되는 사람들을 보면 빡 하고 느낌이 온다 이거지. 이게 말로 설명하기는 좀 어려운데, 일단 얼굴빛이 벌써 달라져. 왜 옛말에도 그런 거 있잖아.”
김 씨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번엔 도박판이 벌어진다.
지겨운 입원생활의 낙중 하나다.
“자 그럼, 갑니다 가요. 난 2주에 천 원.”
“그럼, 난 3주.”
···
이렇게 최은영의 상태가 호전되어 가고 있을 때,
허준의 진료실에서는 또 다른 환자의 상태가 좋아지는 중이었다.
바로, 김현우 학생.
소화가 잘 안 되어서 찾아왔다고 했지만, 그건 증상 일부에 불과했던 환자.
* 진행도 : 55%
허준이 김현우의 옆에 나타난 진행도를 확인했다.
이렇게까지 빠르게 치료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새로 얻은 진맥의 위력 때문.
지난번 처방인 온기탕으로 몸의 기운을 북돋우는 데다가, 경맥의 흐름을 위해 폐와 대장 그리고 위장에 도움이 되는 혈 자리에 침과 뜸으로 도움을 주니,
허준이 물끄러미 김현우를 바라봤다.
처음 진료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틱 증상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는 모습.
게다가 이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여드름까지 많이 사라진 모습이다.
피부는 폐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니, 저렇게 좋아지고 있다고 몸이 말해주고 있었다.
“어머님. 요즘엔 어떠세요?”
허준이 김현우의 옆에 앉아 있던 어머니께 물었다.
그러자,
“아이고, 정말 많이 좋아졌습니다. 선생님. 예전에는 몇 분에 한 번씩 목을 돌리던 행동이 요즘엔 하루에 두어 번 정도로 줄었습니다.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 슬슬 온기탕 대신에 염증에 도움이 되는 탕약으로 바꿔볼까 합니다.”
“그거야 선생님이 알아서 잘해주시겠지요. 지금 이 정도만으로도 저는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김현우의 보호자 박현숙이 고개를 연신 꾸벅였다.
어릴 때부터 틱을 고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병원을 전전긍긍했던가.
심지어 정신과까지 찾아갔지만 끝내 고치지 못했고,
덕분에 이제는 반쯤은 받아들인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속이 더부룩하다는 말에,
침 잘 놓는 한의원이 있다고 해서 찾아왔을 뿐인데,
‘틱을 고쳐주실 줄이야.’
아직 완치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그녀였다.
허준이 김현우에게 물었다.
“김현우 학생. 요새 학교생활은 어때요?”
“조, 좋아진 것 같아요.”
틱이 이렇게까지 사라졌는데도 먼저 말을 걸면 긴장부터 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이 놀림을 당했을까.
“자, 오늘부터는 숨 천천히 들이마시고 천천히 말해보는 거예요. 어깨 펴고 말할 때는 대화하는 사람과 눈을 마주 보고요. 제가 김현우 학생의 틱과 속 안 좋은 것은 고쳐줄 수 있지만, 자연스럽게 말하고 표정을 짓는 것은 내가 대신 못 해주거든요. 그건 김현우 학생의 몫이니까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봐요~ 한결 좋아졌네요. 앞으로는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럼, 친구들도 다시 만들 수 있을 테고, 여자친구도 사귈 수 있을 거예요.”
“저, 정말요?”
김현우가 허준을 바라봤다.
비록 말은 더듬었으나, 이전과는 다르게 눈이 빛나고 있었다.
“물론이죠. 그럼, 진료실에서 보도록 하죠.”
* * *
강남의 한 술집 안.
앳된 얼굴의 남녀 몇이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대박. 그래서 누나 몇 개 틀렸어?”
“너는?”
“난 5개. 아~ 나 하나 찍었는데 찍은 건 맞고 푼 게 틀렸네. 이번 수학 문제 27번 너무 어렵지 않았어?”
“그건 원래 어려운 문제잖아.”
“그런가, 아 아깝네. 그래서 누나는 몇 개 틀림?”
“나? 난 4개.”
바로 이번에 수능을 본 수험생들.
그런 그들이 술집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짜증 나네. 내가 삼수했으면 4개도 안 틀렸을 듯?”
“너,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지?”
“에이~ 그럴 리가.”
“그러다 죽는 수가 있다? 그보다 오빠는 어때?”
“상준이 형 점수는 뭐하러 물어. 보나 마나 우리보다 잘 봤겠지.”
산만 타다가 이번에 제대로 공부를 한 뒤 수능을 본 박상준.
박상준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나도 4개 틀렸어.”
“뭐? 4개나?”
“대박.. 형이 웬일이야?”
“국, 영, 수 합쳐서.”
그 말에 건너편에 마주 앉아 맥주를 홀짝이던 여자가 눈을 흘겼다.
“오빠 지금 되게 재수 없는 거 알지?”
동시에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웃음소리.
이렇게 분위기가 좋은 이유는 당연히 이들이 이번 수능을 잘 봤기 때문이리라.
이렇듯 이번 수능의 승리자들이 모였으니,
당연히 이어지는 이야기는 앞으로 어떤 대학에 갈 것이냐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넌 어디 쓸 건데?”
“나? 안 그래도 지금 고민 중이야. 경영이나 경제로 가자니 왠지 폭망할 것 같고... 아직 시간 있으니까 조금 더 생각해보려고.”
“나도 고민되네.”
“그러게 요새 과 잘못 택하면 ‘문송합니다’ 하면서 다녀야 한다는데, 차라리 이럴 줄 알았으면 수리 가로 칠 걸 그랬어.”
“너 수리 나형인데도 5개나 틀려놓고?”
“그건...그렇네?”
그러다가 그들의 시선이 박상준을 향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수험생 중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가진 그.
“형은 어디 갈 생각이야?”
그 물음에,
박상준의 입으로 모두의 시선이 모인다.
“나? 한의대 가려고.”
“한의대?”
웅성거리는 수험생들.
당연한 일이었다.
한의대 입결이 예전처럼 엄청 높은 시대가 아니었기에,
그가 맞은 점수가 너무나 아까웠기 때문이리라.
“진짜로?”
“어.”
“점수 아깝게 왜 하필 한의대야? 차라리 나였으면 의대 갔을 듯.”
“그러게. 나도 오빠 점수면 의대 바로 박았다. 한의대 보다는 의대가 훨씬 좋잖아.”
“아니. 난 한의대에 갈 거야.”
박상준이 가슴속에 품은 꿈을 떠올렸다.
허준 선생님을 만나면서부터 바뀐 새로운 꿈.
침과 뜸은 어디든 가지고 다닐 수 있었고,
그것은 곧 이런 도시가 아닌,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
‘산도 보고, 환자도 보고.’
그 꿈을 떠올리자, 벌써 가슴이 설렌다.
동시에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웃음.
“갑자기 뭐야? 저렇게 웃는 거 나 처음 봄.”
“나도...”
그렇게 허준이 퍼트린 씨앗이 싹을 피워 올리는 중이었다.
* * *
평범한 허준한의원의 진료를 마치고.
허준이 진료실에 앉아 기지개를 켰다.
“수고하셨습니다. 원장님.”
“밥 선생님도 수고하셨어요. 오늘은 일찍 퇴근하세요.”
“아닙니다. 제가 2층에 입원실 올라갔다가 퇴근하겠습니다.”
“그럼, 그러도록 해요.”
그렇게 밥이 진료실을 나서고,
홀로 남은 허준이 생각에 잠겼다.
‘이거 아무래도 보정이 된 것 같은데?’
무려 오늘 초진 환자 중에서 퀘스트가 생겨났는데,
그 보상이 이전보다 줄어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만성위염으로 찾아온 환자.
56세. 윤지웅. 보상은 1000포인트.
‘그냥 기분 탓인가?’
만성위염뿐 아니라, 만성이란 단어가 들어간 질환 자체가 쉽게 낫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말 그대로 만성이 될 만큼 많은 시간 동안 진행되온 질환일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고작 1000포인트라니.
아무래도 새로 얻은 능력으로 인해 뭔가 난이도가 낮아져서 인지 보상이 줄어든 느낌이 드는 허준이었다.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오늘은 최인호 원장과 만나기로 한 날.
주문받은 탕약을 달이고 있다 보면 오시겠군.
그렇게 2층의 탕전실로 향한 허준.
한의원 식구들이 하나둘 인사하면서 퇴근하기 시작했고,
입원실 진료를 보러 간 밥 선생을 비롯해 유도진 선생도 일이 있다면서 오늘은 일찍 퇴근한다며 떠나간 상태.
당연히 우리의 칼퇴전문가 고요한 선생은 정각이 되자마자 귀신같이 사라진 상황이다.
‘탕전실은 혼자 쓰는 게 편하긴 하지.’
탕약을 열심히 달이고 있는 허준의 귓가에 문 여는 소리와 함께,
이어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열심이네. 미안해. 차가 좀 막혀서 말이야.”
“괜찮습니다. 덕분에, 오늘 달이려고 했던 탕약들 거의 다 끝낸 중입니다.”
“그래. 마침, 잘됐군.”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보자고 하신 겁니까?”
최인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자네 방송 때문에 그렇지. 자네의 출연이 확정됐어. 프로그램은 ‘건강의 제왕’이라고 무슨 프로그램인지 알고 있나?”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TV를 자주 보지 않는 허준이지만, 종종 이슈를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검색어 순위에 갑자기 생각지도 못하는 음식이나 재료들이 올라온다고 하면 대부분 건강의 제왕에서 나온 바로 그 재료들이었다.
‘그만큼 사람들의 관심도가 높다는 뜻이겠지.’
“네. 알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야채들을 이슈로 잘 만드는 방송이잖아요?”
“잘 알고 있네? 거기에 자네가 패널로 들어가서 건강이나 간단한 진료 등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시범을 보여야 할 거야.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제가 이래 봬도 강의만 몇 번짼데요.”
이미 강의도 여러 번 한데다가, 다큐멘터리도 촬영을 두 번이나 하다 보니 카메라도 꽤 익숙한 허준이었다.
“좋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 출연 전에 잠깐 자네에게 도움이 될만한 친구와 미팅을 가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이제 슬슬 자네 식구들 좀 빌려 가야겠어.”
“허준한의원 식구들을요?”
“그래. 우선은 데스크의 김예진 선생부터 입원실의 도영철 선생까지.”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선생님들이 필요한 일이 뭐가 있겠는가.
답은 하나였다.
“그 말씀은...?”
허준의 물음에 최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뿐만 아니라, 이제 식구들도 준비해야지.”
“알겠습니다. 한의원 식구들에게 전해놓도록 하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의원에서 한방병원으로 넘어갈 때가.
그리고 그것은,
‘더 많은 환자를 볼 수 있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