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원래 세상일이란 것이 다 그렇지 않던가.
조금만 규모가 커져서 말에 힘이 실릴만하다 싶으면 여기저기서 온갖 매혹적인 제안이나, 그 목소리를 죽이기 위해 여러 일이 벌어지는 법이었으니,
세상 경험 많은 박진석과 김정우 두 사람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드는 것이 당연했다.
그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에 대해서는 이미 허준 선생과 이야기를 끝냈으니까요.”
최인호가 웃으며 답했다.
그 자신감 있는 모습에 두 눈이 휘둥그레진 두 한의사.
“그게 무슨 말인가?”
“그래. 자세하게 설명 좀 해보게.”
“사실은 촬영 전에 허준 선생에게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최인호가 그때 일을 떠올렸다.
평소처럼 면접과 병원 공사현장 그리고 법적인 문제와 부수적인 일들을 처리하고 퇴근하는 중이었는데,
“응? 이 친구가 웬일이지?”
허준에게서 전화가 오는 것이 아닌가.
보나 마나 또 뭔가 부탁이 있나 보네.
그러나 그 부탁이 결코 미운 것은 아니었기에 최인호가 피식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어차피 이제부턴 같은 식구이기도 하고.
“무슨 일인가? 자네가 전화를 다 하고.”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상의? 병원에 관계된 일인가?”
“아마 그럴 것 같아서요.”
“그래? 자네 지금 어딘가? 잘됐군. 퇴근길인데 잠시 들리도록 하지.”
그렇게 늦은 시간 탕전실에서 만난 두 사람.
최인호가 도착해서 공진단을 만드는 허준의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볼 때마다 감탄스럽군...”
이미 여러 번 봐왔으나, 볼 때마다 신기한 것은 어쩔 수 없었으니.
그것은 공진단의 크기 때문이리라.
‘환자들의 체질과 상태를 고려해서 약의 크기가 각각 다르게 만들다니.’
많은 경험으로 축적된 감각에서 나오는 것일 터.
용하다는 사람들의 말이 아깝지 않은 그런 재주를 지닌 한의사였다.
“오셨어요?”
허준이 집중을 끝내고 나서야 뒤에 있는 최인호를 발견하고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곧 추석이라서 아주 바쁘겠구만.”
“네. 아무래도 이번이 마지막 추석이 될 테니까요.”
“그렇겠지...”
최인호도 이 시장에 애정이 있었던 터라,
아쉬운 듯이 말을 줄였다.
“그보다 아까 하던 이야기나 마저 들어볼까?”
“아, 네.”
허준이 촬영 협조의 제의를 받은 것을 최인호에게 말했다.
물론, 독자적인 판단으로 이미 촬영하겠다고는 결정한 상태지만, 아직은 그 결정을 무를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넨 이번 기회에 혜민서를 더욱 키우고 싶다. 이 말이지?”
“맞습니다. 아무래도 이번이 적기인 것 같아서요.”
“그렇긴 한데, 아마 어느 정도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 여기저기서 태클이 들어올 텐데?”
“그래서 제가 원장님께 상의를 드리는 겁니다. 내년에 준비 중인 한방병원에도 영향이 가지 않을까 해서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한방병원이건, 병원이건 또는 다른 어떤 사업일지라도 브랜드와 이미지는 중요한 법.
어떤 조직이건 규모가 커질수록 문제는 생기는 법이었으니, 분명히 아직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혜민서라 할지라도 완벽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혜민서와 한방병원에 모두 속해있는 선생들로 인해 한방병원의 이미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으니,
최인호가 미간을 짚으며 고민하더니 허준에게 물었다.
“한 가지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시지요.”
“자네가 혜민서를 키우고자 하는 이유가 뭔가?”
‘포인트를 위해서요.’
그 질문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당연히 이것이었다.
실제로 처음 혜민서를 만든 이유가 바로 퀘스트를 효율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였으니까.
하지만 과연 그것뿐일까.
그동안 혜민서라는 이름 아래에 겪어온 많은 일들.
얼굴을 전부 기억할 수는 없지만,
행사가 끝날 때 즘이면 느껴지는 미소와 눈빛들.
그리고 여태까지 함께 해오며 변해가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그런 사람들이 뒤에서 받쳐줄 때마다, 온몸에 힘이 넘쳐 흐른다.
이건 퀘스트와 관련이 없는 감정.
한의사가 아닌 그저 한 사람으로서의 바람이었으니까.
허준이 웃으며 답했다.
“사람들이 웃는 게 좋아서요. 더 많은 사람들이 웃으며 살았으면 좋겠거든요.”
살짝 뜸을 들인 허준의 대답에,
최인호가 탕전실이 울리도록 통쾌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좋아. 내가 몇 가지 생각해 뒀던 일이 있는데 말이야. 오늘 자네의 대답을 듣고 결정했네.”
“그게 무슨...?”
“그거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일단 촬영은 자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대신 조건이 있어.”
“그게 뭡니까?”
허준의 되물음에,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나면 다른 TV 프로그램에도 나갈 준비를 해두게.”
“다른 프로그램이라면 건강 관련 프로그램 같은 거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 자네를 스타 한의사로 만들어야겠어.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
이야기를 듣던 김정우와 박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 다행이야.”
“그러게. 최 원장 자네 보기보다 더 대단한데?”
“아닙니다. 선생님들이 잘 이끌어 주신 덕분이죠.”
최인호의 대답에 두 노인이 환하게 웃었다.
빈말이라도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법이지 않던가.
“근데, 정말 그게 가능하겠나?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한의사라...”
“물론입니다. 허준 그 친구의 능력은 선생님들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 * *
추석 연휴 중 추석 당일이 지나자,
허준한의원에도 슬슬 변화의 조짐이 일어나고 있었다.
초진 환자들이 이전에 비해서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리 자막표시를 해달라고 했으니 망정이지.’
이미 작년에 돈쭐을 내주겠다며 찾아온 수많은 환자로 정신없는 며칠을 보냈던 허준이었기에, 이번에는 진료가 필요한 환자 이외에는 내원을 자중해 달라는 부탁의 메시지를 내보냈다.
당연히 아픈 환자들의 진료를 위해서라는 멘트와 함께.
그래서 지난번처럼 마구잡이로 붐비는 일은 없었지만, 새로운 환자들의 방문은 늘어나고 있었다.
특히, 그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환자가 바로 암 환자들이었다.
이는 아마도 김정남 할아버지의 모습 때문이겠지.
덕분에 허준의 진료실.
“선생님께서 위암을 치료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어요. 부탁드립니다. 어떻게 안 될까요?”
눈앞에 있는 환자는 초기 암이 아니다.
게다가 이미 꽤 진행된 상태.
“죄송하지만, 병원으로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환자와 보호자가 원한다면 이곳에서 치료해 볼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른 모든 방법을 해본 뒤의 최후의 상태여야만 한다는 것이 의료인으로서 허준의 판단이었다.
그러자, 실망스럽다는 듯이 나가는 환자와 보호자.
차라리 실망스러운 눈빛이 낫다. 원망하는 눈빛보다는.
그래도 모든 암 환자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 한의학적인 치료가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예를 들자면, 암 수술 전이라던가.
또는 수술 후와 항암치료를 할 때라던가 등등.
이 중간중간에 최상의 컨디션을 끌어올려 주면 분명히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덕분에 2층에 남아 있던 1인실에 새로운 환자들이 함께하기로 했다.
다음 진료는 바로 엘레나.
진료실 문이 열리며 그녀가 들어왔다.
80%가 넘어선 그녀의 진행도.
그것과는 별개로,
“원장님. 오늘도 그대로 진료하실 겁니까?”
엘레나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옆에 있던 밥 선생이 더욱 난리다.
최근 그녀와 함께 지내며 종종 노래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천사가 속삭인다나?
“일단, 목소리를 한 번 들어보도록 하죠.”
허준의 말을 밥이 전했고,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이 뒤에 진료실 안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허준이 두 눈을 감고, 목소리에 집중했다.
오감을 넘어서 발달한 육감은 손에만 집중된 것이 아니었으니,
‘아직 묘한 떨림이 남아 있어.’
허준이 손을 들어 엘레나를 멈췄다.
중간에 끊긴 노래.
“이정도면 다 나은 거 아니냐고 묻습니다.”
“조금만 더 참아달라고 전해주세요. 거의 다 왔으니까.”
허준의 말을 전해 들은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치료를 받으며 확실히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정말 밥 선생의 말대로네.’
음악에 별로 관심이 없는 허준이었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진 힘을.
“참, 밥 선생님. 요즘도 매일같이 마사지 해주시나요?”
“네. 매일 저녁 원장님께서 처방하신 대로 혈 자리에 마사지하는 중입니다.”
‘어쩐지 생각보다 빠르게 회복된다고 하더니.’
밥 선생의 공이 크네.
하긴, 연휴 기간에 홀로 진료를 도맡을 정도로 성장하긴 했지.
그야말로 크나큰 발전이었다.
물론, 그 바탕에는 밥 선생의 성실함이 깔려 있었겠지만.
허준이 밥 선생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치료실로 안내해 주세요.”
* * *
김예진의 하루가 더욱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연휴가 끝나고 한의원 출근은 해야 했는데, 여기저기에서 온 연락부터 새로 가입을 신청한 선생님들까지 아직도 정리가 다 끝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뭐가 이렇게 많아?’
대충 최은진에게 이야기는 들었지만, 솔직히 이정도일 줄 몰랐다.
응원의 메시지들은 기본이요. 이곳저곳에서 온갖 제의와 후원 제의까지.
일단 이건 나중 문제겠지.
우선은 혜민서에 들어오려고 신청한 선생님들부터 처리하자.
김예진이 집중하여 가입을 신청한 사람들의 목록을 뽑고 지역과 동네를 나눠 새롭게 구성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 일이 꽤 익숙하다는 것.
그렇게 해서 일단 간단히 인원 정리를 끝낸 김예진.
그런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며 또 한 통의 연락이 들어왔다.
‘응? 한국 한의사 협회?’
여기 한의사들이 모인 가장 큰 협회잖아.
-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흠, 이 건은 아무래도 원장님에게 물어봐야겠네.
이렇게 김예진이 한창 일을 하는 와중에,
또 신나게 뛰어다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최인호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스타 엔터테인먼트 대표 김강현.
두 남자가 서로 명함을 교환하고는 악수했다.
“안녕하세요. 김강현이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최인호입니다.”
그저 인사를 나눴을 뿐인데,
두 남자의 눈은 서로를 탐색하기에 바빴다.
‘최인호. 이 사람은 허준 선생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사업가라고 봐야겠군.’
최인호도 그런 김강현을 알아봤다.
‘가볍게 웃는 상이지만, 눈빛을 보아하니 보통내기가 아니겠는걸?’
이미 허준에게 어느 정도 상대에 대해서 들었다.
그와 관계된 연예인들을 치료해 줬다는 이야기부터 최근에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아이돌까지.
‘그래서 전반적인 케어를 원한다고 했었지.’
일종의 협력관계를 뜻하는 것이겠지만.
실상 지금의 허준한의원에서는 전혀 메리트가 없는 이야기다.
보통은 연예인들이 다니는 한의원의 홍보 효과로 인해 매출을 올리기 위함이겠지만, 허준한의원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새로운 한방병원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터.
모자란 매출을 메꿔줄 아주 좋은 파이프라인이 될 것이 분명하다는 게 최인호의 계산이었다.
더군다나 대표인 김강현이 자신에게 먼저 연락하여 찾아온 상황.
그 말은 무게추가 자신에게로 살짝 기울어져 있다는 뜻이었으니,
“연휴 마지막 날인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리 기획사 소속 연예인들의 케어를 맡기고 싶습니다.”
“대가는 당연히 소속 연예인들로 인한 마케팅 효과겠지요?”
“잘 알고 계시는군요. 사실 이런 말 하기에는 좀 부끄럽지만, 우리 식구들이 꽤 몸값이 나가는 편이라서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마케팅을 안 해도 되는 상황이라는 게 허준 선생의 입장이죠.”
그 대답에 김강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다.
최인호가 그것을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합시다. 날짜를 바꾸는 겁니다.”
“날짜라니요?”
“대표님이 원하는 허준 선생은 내년에 제가 원장으로 있는 한방병원으로 오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은...?”
“네. 내년에는 커다란 한방병원에서 대표님이 원하는 회사 식구들의 케어가 가능해진다는 거죠.”
김강현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렇게 쉽게 이야기가 통할 줄이야.
그때,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허준 선생을 TV에 내보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