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다른 곳으로 가셨거든 >
135화. 다른 곳으로 가셨거든
엘레나가 허준의 허락하에 조금씩 노래를 시작할 무렵,
시장 골목의 아기보살이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버렸다고 한다.
“진짜 그렇게 가버렸다고?”
“그렇다니까? 찬 바람 불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하시더니, 아침에 그대로 가셨다더라고.”
“그래서 어디로 갔다던데?”
“모르지. 그러니까 지금, 동네에서 이 난리가 난 거 아니여.”
“사람이 그래도 정이란 게 있지. 우리가 그동안같이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어떻게 한마디도 없이 그렇게 가버리신다나.”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물론, 이 수군거림은 허준한의원의 대기실의 풍경이었다.
‘진짜 가셨구나.’
허준한의원에서 가장 먼저 출근하는 김예진 선생.
그녀가 아기보살이 떠나는 모습을 유일하게 목격한 사람이었다.
“어? 선생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쉿! 사람들 듣겠어.”
그러더니 김예진을 바라보며,
“기운이 넘쳐 흐르니, 사람들이 선생을 따를 수밖에 없을 팔자네. 그렇다고 조심해. 너무 혼자서 모든 걸 하려고 하다가는 아무리 팔자가 좋더라도 꼬이는 수가 있으니까 말이야.”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허준 선생님한테도 안부 전해주고.”
그게 정말로 마지막이었을 줄이야.
그렇게 사라진 덕분에 최근 오전 진료에 지금과 같은 대기실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대기실에는 동네 사람들도 있었지만, 추석 이벤트로 찾아온 환자들도 꽤 많았다.
강남에서부터 소문을 듣고 찾아온 보약 환자들.
“여기가 태준이 엄마가 말한 거기 맞지?”
“맞아. 내가 여기서 우리 시아버지 공진단 하나 사드렸는데, 그걸 드시더니 요즘엔 자리에서 일어나 매일 산책하러 다니신다니까?”
“그래? 그럼 다른 보약도 잘하겠네?”
“듣기로는 그런데, 조금 까다로운 게 환자가 직접 와서 진료를 보지 않으면 이 프리미엄 보약은 안 맞춰 주신다더라고.”
허준한의원에서 제작된 안내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반 보약과 프리미엄 보약.
일반 보약은 말 그대로 체질이나 증상과 상관없이 누구나 먹을 수 있게 만든 보약이다.
때문에, 그 종류도 굉장히 한정적이었으며 허준이나 유도진의 판단하에 약재의 가감이 없는 아주 순한 보약이었다.
프리미엄 보약은 허준과 유도진 둘이 직접 환자의 진료를 보고 난 다음에 체질과 증상에 따라서 맞추는 보약으로, 환자가 직접 와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다만, 그 효능은 그야말로 엄청났으니,
“아버님~ 조금만 기다리시면 돼요.”
“허허, 이 작은 한의원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리는 것을 보아하니, 믿음직스럽긴 하네.”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 한 분이 대기실을 둘러보며 답했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곧 많은 경험이 있다는 것이기도 했으니, 지금 이 대기실의 모습만으로도 이곳이 평범한 한의원이 아님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그럼요~”
이렇게 보약을 맞추러 온 사람들의 모습과 또 다른 한쪽에서는.
“작년에 여기 총명탕이 열풍이었잖아요. 상위권 학생들이 전부 이 총명탕을 먹고 다들 좋은 대학교 갔다고 소문이 아주 자자해요. 그래서 이렇게 다들 기다리고 있는 거죠.”
“아이고~ 아직 소문 못 들으셨구나?”
“무슨 소문이요?”
“상위권 애들이 총명탕 먹어봐야 몇 점이나 올라가겠어요? 어차피 공부 잘하는 애들인데.”
그 말에 순식간에 쏠리는 시선.
“이건 비밀인데, 작년에 진짜 대박이 난 엄마들은 중위권 학생 엄마들이에요.”
“중위권이요?”
“네. 어머님들도 같은 마음이겠지만, 공부 잘하는 애들이 먹으니까,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이거라도 해주자는 마음으로 구해다 줬겠죠. 그런데 이게 웬걸? 중위권이었던 애들이 점수가 생각보다 많이 올라간 거죠.”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상위권의 학생들이야 어차피 공부하는 법을 알고 있는 학생들이다.
물론, 때때로 천재 같은 학생도 있기 마련이지만, 이는 논외로 치고 대부분은 본능적으로 깨우쳤던, 습관적으로 몸에 뱄던 그것을 익힌 상태라 할 수 있었다.
공부하는 법이 따로 있겠는가.
효율에 따라 각자에게 맞는 방법을 나눌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 기본은 책상에 앉아서 학문을 익히는 것에 집중하는 것.
즉, 집중력의 싸움이라는 소리다.
중위권 학생들과 상위권 학생들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이 집중력이었으니, 머리를 맑게 해주며 집중력을 키워주는 총명탕의 덕을 가장 많이 보게 된 까닭이었다.
이렇게 허준한의원은 매우 바쁜 나날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허준의 앞에 새로운 환자가 나타났다.
이재혁. 초진.
속이 더부룩해서 방문했다고 한다.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났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더위로 인해서 입맛이 없다가 찬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니 사라졌던 입맛이 돌아오는 게 당연한 법.
괜히. 가을이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지.
치료법은 간단하다.
침이나 뜸 한두 방이면 더위로 인해 늘어졌던 장기들에게 자극을 줘서 금세 균형을 맞춰 주는 것.
그것이 소우주라 불리는 인체의 신비겠지.
어쨌건 진료를 시작해 볼까.
허준이 메시지를 보냈고, 곧이어서 문을 열고 이재혁 환자가 진료실로 들어왔다.
그런데,
<개 버릇 남에게 못 준다.>
* 진행도 : 0%
* 보상 : 포인트 2000
‘퀘스트라니? 이름부터 불순하네.’
평범한 환자일 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미 익숙한 허준이라 아무런 표정의 변화없이 자연스럽게 환자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이재혁 님.”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재혁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러면서 허준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더 젊잖아?’
평소라면 절대 찾아오지 않을 한의원이었으나, 조금 알아보니 동네에서 소문도 좋고 무엇보다 얼마 전 친구 박철웅의 바뀐 모습 때문에 찾아온 그였다.
소싯적부터 한동네에 살던 친구였기에, 그의 술버릇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그 친구는 동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술고래.
그랬던 박철웅의 바뀐 행동.
그 좋아하던 술을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가다니, 솔직히 말해서 충격이었다.
40년을 함께해왔으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으니까.
다른 친구들과 전후 사정을 따져보니 여기서 치료를 받은 다음에 벌어진 일이라는 결론이 나왔으니,
죽자사자 아팠으면 당연히 병원으로 달려갔겠지만, 은근히 당기는 통증 같은 게 있던 터라, 호기심 반, 치료 반의 생각으로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배가 아파서 오셨다고요?”
“네. 요즘에 약간 이렇게 잡아당기는 것 같기도 하고, 살짝 누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요.”
“그래요? 그럼, 일단 제가 한번 눌러봐도 될까요?”
허준이 진맥을 잡기 전에 먼저 촉진을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소화가 안 된다면 명치 언저리에 있는 위장에 통증이 있을 터.’
그렇게 위장이 있는 부분을 살짝 눌렀는데.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이나 환자의 모습이 전혀 미동도 없었다.
아무리 약한 통증이라도 있다면 호흡이나 눈빛부터 바뀌는 법인데,
그럼 위장은 아니라는 뜻이다.
혹시 심장인가?
많은 사람이 가슴의 답답함에 소화가 잘 안 되는 것처럼 느끼는 경우가 많았으니,
허준이 누워있는 이재혁의 심장 쪽을 살짝 눌렀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다.
‘다행이네.’
그렇게 촉진을 이어 나가는데,
어느 순간 귓가에 들리는 거친 호흡 소리.
신장이었다.
그때,
“아, 선생님. 거기는 제가 예전에 수술을 받은 적이 있어서요. 아직도 아픈 것 같네요.”
“수술이요?”
“네. 몇 년 전에 결석이 생겨서 수술했었거든요.”
결석. 말 그대로 맺을 결에 돌 석.
몸안에 돌이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신장에서 만들어진 이 결석이 방광으로 내려와 요도 쪽에서 발견되면 요도결석.
신장에서 발견되면 신장결석이라 한다.
둘중에 뭐가 더 위험하냐? 고 묻는다면 당연히 여러 질환의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신장결석의 승리겠지만.
만약 어느 게 더 아프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요로결석의 손을 들어줄 것이었다.
요로결석은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통증을 가져다주는 질환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군요. 다시 자리에 앉아 주시겠어요?”
허준이 무언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장결석은 재발률이 꽤 높은 질환.
“손을 이리로 올려주세요.”
때문에, 확인을 위해 본격적으로 진맥을 잡은 허준이었다.
신장의 기운이 허하고, 방광 또한 약하다.
게다가 미묘하게 느껴지는 열기.
한의학의 관점에서 결석은 신장이나 방광의 열기로 인해 진액이 메마르면서 발생한다고 보기도 한다.
물론, 다른 장부의 균형이나 비위의 기능부전으로 진액이나 체액의 생성이 적어 발생하는 때도 있겠지만,
‘이건 오랜 습관이 문제겠군.’
재발이 되었다는 것은 결국 근본적인 원인을 고치지 못했다는 뜻일 터.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직 제대로 통증이 느껴지기 전의 단계라는 것이다.
즉, 결석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작은 크기의 결석이라는 것이었다.
처방법은 먼저 침을 이용해 신장과 방광에 도움이 되는 혈 자리를 보하고, 신장과 방광의 열을 내려주는 대시호탕이나 작약감초탕이 좋겠군.
그러나 그전에 환자와의 이야기가 먼저였다.
“평소에 물을 자주 드시나요?”
“네? 아, 네. 수술한 이후로 물은 꼬박꼬박 자주 먹고 있습니다.”
“그럼 술은요?”
“술은... 많이 마시지는 않는데, 아무래도 종종 반주로 조금씩 마시는 중입니다.”
“잠은 푹 주무시는 편입니까?”
“글쎄요. 잠을 자기 위해서 밤마다 한 잔씩 하는 중이라서.”
역시, 습관이 가장 큰 문제였다.
오히려 이렇게 술을 조금씩 마시는 것이 몸에는 더욱 해롭기 마련이었으니,
‘몸 안의 장기들이 이미 거기에 적응해서 움직이고 있겠지.’
덕분에 물을 많이 마시는 습관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거기에 숙면을 통해 충분한 휴식으로 열이 내려가야할 장부들의 열이 식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데, 그건 왜 갑자기 물으시는지요?”
“아무래도 신장에 다시 결석이 생기신 것 같아서요.”
“네!?”
이재혁이 놀라 외쳤다.
"병원에가서 한번 검사를 받아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이어진 허준의 대답에 이재혁이 고민했다.
과거에 얼마나 고생이 심했었는지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그러다가,
“저... 선생님. 혹시, 여기서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가능합니다. 아직 증상이 심한 편은 아니라서요. 다만, 제 말대로 따라주셔야 합니다.”
* * *
그날 저녁.
진료가 끝나고 탕전실에 남은 허준과 유도진 그리고 밥 선생.
셋이 분주하게 약을 만드는 중이었다.
탕약에 이어서 경옥고부터 공진단 같은 온갖 보약들까지.
“이곳에서의 마지막 이벤트일 지도 모르니, 그동안 감사한 마음을 담아서 만들어보도록 하죠.”
이 말을 시작으로 벌써 며칠째, 이어지고 있는 연장 근무.
하지만 그 누구 하나 불평은 없었다.
그만큼 페이라던가, 휴가 또는 일종의 보람 등을 각자 느끼는 중이었으니까.
물론, 이 중에서 보람을 느끼고 있는 것은 당연히 밥 선생이었다.
‘이게 진짜 사향?’
값비싼 재료인 진짜 사향은 처음 봤으며, 또 허준 원장이 직접 만드는 약은 어떻던가.
처음 보약을 만들었을 때의 모습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보통 처방전에는 약재의 비율이나 그램 수가 정해져 있었기에, 무게를 재서 달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허준의 경우에는 그저 약재를 손으로 잡아 넣는 것만으로도 처방전 그대로의 약을 만들고 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탕약을 거쳐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물론, 이는 유도진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언젠가는 할 수 있을 거야.’
라는 자신감이 샘솟았으니 보람 차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2층의 탕전실에서 화기애애하게 보약들이 완성되어가는 동안 1층에서는,
“왜 또 왔어? 샘플이 벌써 나오지는 않았을거 같은데.”
“아~ 도움받을 일이 있어서 말이야.”
최은진이 김예진에게 말했다.
“별건 아니고, 혜민서 행사가 여기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곳에서도 이뤄진다면서?”
“맞아. 그런데 왜?”
“그 모습을 촬영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너한테 연락처나 계획표 같은 것을 좀 받으려고.”
“알았어. 보내줄게.”
“참, 그리고.”
최은진이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여기 시장에 아기보살이라는 용한 분이 계신다면서?”
“그분은 갑자기 왜?”
“그냥, 용하다고 해서 나도 온 김에 점이나 봐볼까 했지. 올해는 남자 복 좀 있으려나?”
김예진이 최은진을 빤히 바라봤다.
미신도 믿지 않는 사람이 갑자기 점을 보겠다니, 웃기는 이야기다.
“뭐, 말해주기 싫으면 말고. 어차피 이 동네에 있지 않겠어? 빨간 깃발 찾아가면 그만이지.”
“그럴 필요 없어. 다른 곳으로 가셨거든.”
“뭐!?”
최은진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