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조금씩 시작해 보시죠 >
134화. 조금씩 시작해 보시죠
화면 안에는 허준이 고개를 살짝 돌려서 무언가를 바라보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뭔가 보는 것 같은데?”
“그렇죠? 저만 그렇게 느낀 거 아니죠?”
사실 사람이 어딘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신입이 이렇게까지 말한 이유는 화면 속의 허준에게서 느껴지는 이질감 때문이리라.
재생되고 있던 영상 속에서의 허준은, 끊임없이 진료하면서 침과 뜸을 이용한 비슷비슷한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상황에서 잠시 멈춘 것 같은 모습을 보였으니.
이는 마치 컴퓨터가 렉이 걸렸다던가, 로봇이 잠시 멈춘 것 같은 모습처럼 느껴진 것이었다.
게다가 하필 영상 안에서 그가 바라보는 방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또한 한몫했다.
같이 활동하는 선생님이나,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도 아무것도 없는 그저 텅 빈 허공이었으니까.
“그렇네...? 대체 뭘 보고 계시는 거지? 종훈아, 혹시 저 방향에 뭐가 있었는지 기억나?”
최은진도 그 모습이 퍽 이상해 물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것 같은데요? 저기 그냥 평범한 방이었으니, 아마 있어 봐야 그냥 벽이었을 거예요.”
“그래? 그럼, 대체 허준 선생님은 뭘 보고 있는 거지?”
“에이~ 다들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세요? 허준 선생님도 사람이잖아요. 사람. 영상 보시면 아시겠지만, 벌써 2시간 동안 쉬지낳고 진료만 보셨으니, 잠시 숨 돌리시는 중이겠죠.”
“그런가?”
영상 아래 나타난 시간을 보니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지는 최은진과 그 뒤에 서 있던 신입.
듣고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긴, 촬영하면서 보여준 모습이 비정상적인 거지.’
최은진이 촬영 때 보여준 허준을 비롯한 혜민서 선생님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답했다.
“그래. 그 말이 맞네.”
그렇게 이어진 작업은,
“퇴근 안 하세요?”
“먼저 가. 나 앞에 넣을 장면만 한번 찾아보고 가려고.”
“아~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들어갈게요~ 내일 봬요.”
퇴근 시간이 지나도록 이어졌고.
홀로 남은 최은진은 작년에 찍은 영상의 원본을 확인하고 있었다.
‘어떤 부분을 넣어야 이쁘게 나올까.’
고심과 함께 선별하기 시작한 장면들.
어차피 허준 선생이야 워낙 장면이 많아서 고르기 쉬울 테고.
나머지 다른 선생님들의 임팩트가 있는 장면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러다가 무언가를 발견한 최은진.
“뭐야?”
작년에 찍힌 영상 중에서 허준 선생님이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목덜미로 소름이 쫘악 하고 올라오며 얼마 전에 있었던 술자리에서 들은 이야기가 재생되었다.
“오늘 모두 고생 많으셨어요. 한잔 시원하게 받으세요. 혜민서 선생님들께서 촬영 협조도 해주셨는데 제가 시원하게 한잔 살게요!”
“하~ 역시 이런 맛이 있어야지. 허준 그 친구는 다 좋은데, 이런 부분이 영 아쉽단 말이야.”
“어? 허준 원장님 아직도 술 안 드시나 봐요?”
“그럼. 세상에 독종도 그런 독종이 따로 없다니까? 환자들 봐야 한다고 아예 한 방울도 입에 안 대더라고.”
김태식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말하자,
옆에 있던 박용준이,
“아마 허준 선생님은 스트레스도 진료 보는 거로 푸실걸요?”
라며 농담을 건넸다.
“근데, 허준 선생님이 그렇게 실력이 좋아요?”
그 물음에 김태식과 박용준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최은진을 바라봤다.
“PD님 허준 선생님 소문 못 들어보셨어요?”
“무슨 소문이요...?”
“허, 박 원장. 설명 좀 해드려.”
박용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섰다.
“우리 허준 선생님이 어떤 분이시냐면요.”
워낙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으니, 당장 머릿속에 기억나는 것만으로 한참을 설명한 박용준.
그중에서는 동네 시장 골목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인 아기보살과 허준의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장 골목에 용하다고 소문난 아기보살이라고 불리는 무당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한동안 허준 선생님을 피해 다닌 일이 있었죠.”
“왜요?”
“그거야 저도 모르죠. 그런데, 용한 무당이 선생님을 피해 다니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했겠어요? 덕분에 한때 동네에서 허준 선생님이 귀신들렸다는 소문도 있었다니까요?”
“귀신이요?”
“네. 물론, 귀신같이 잘 고친다는 의미겠지만요.”
‘왜 하필 그 이야기가 지금 생각나는 거야? 무섭게.’
에이 설마.
그러면서 낮에 봤던 장면을 한 번 더 확인하는 최은진.
확실히 비슷했다. 아니 똑같다.
단지, 시선이 머무르는 시간만이 달랐을 뿐,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모습이나 각도가 두 영상 모두 같은 모습이었다.
최은진이 무의식적으로 영상 속의 허준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눈에 들어온다.
“설마, 소문대로 귀신이라도 보는 거 아니야?”
그 말 때문일까.
괜스레 공기가 차가워진 느낌.
최은진이 좌우를 살피더니 조용히 짐을 챙겼다.
아무래도 나중에 해야 할 것 같다.
* * *
늦게까지 탕약을 달이고 퇴근한 허준이 귀를 후볐다.
‘어디서 내 흉이라도 보나?’
그러면서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기연을 얻고 난 뒤, 이제는 메시지가 나타나는 것에 제법 익숙해진 허준이었지만, 지난 토요일에는 평범한 메시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토요일 혜민서의 의료봉사 현장.
한쪽에서 진료를 보던 허준이 막 진료를 끝내고, 자리를 옮기려던 찰나에 메시지.
「당신의 명성이 퍼지고 있습니다.」
「업적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이어서 퀘스트가 나타났다.
<전국으로>
* 진행도 : 3%
* 보상 : 능력치 포인트 1
‘능력치 포인트라니?’
설마 능력을 선택해서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포인트인 건가.
그렇다면 이건 그야말로 엄청난 보상이었다.
대략적으로 계산해도 5만 포인트를 얻으려면 아무리 빨라도 몇 달은 걸릴 터.
그런데 그 기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말이다.
아마 명성이 퍼질수록 진행도가 올라간다는 뜻이겠지?
즉, 내 이름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알려지는지에 관한 지표였으니,
‘그렇다면 이번 촬영에 더욱 열심히 임해야겠는걸?’
마침, 운 좋게도 TV에 나갈 영상을 찍는 중이 아니던가.
대중매체의 힘은 이미 이전에도 겪어본 적이 있는 허준이었다.
그때, 여기까지 빠르게 생각을 마친 허준의 감각에 무언가가 걸렸다.
어디선가 느껴진 시선.
바로 이곳을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의 그것이었다.
어차피 이것은 나에게만 보이는 것이었기에 절대 들킬 리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괜히 의심의 여지를 남길 필요는 없겠지.
특히나 최은진 PD처럼 무언가에 꽂히면 물불 안 가리는 성격의 소유자는 까다롭기 마련이었으니,
허준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를 이어 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평소처럼 봉사활동이 끝났고.
한쪽에서는 참여한 선생님들에 대한 간단한 촬영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렇게 주말에 나와서 봉사까지 하시는 거. 힘들지 않으신가요?”
첫 질문을 받은 것은 당연히 허준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함께 다닌 김 원장이었다.
우습게도 허준한의원 식구인 유도 진 선생보다 더 먼저 같이 다녔으니까 말이다.
“처음에는 당연히 힘들었죠. 사실 제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다니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당시에는.”
“그래요?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열심히 참여하게 되셨나요?”
“그야 허준 선생님 때문이죠. 어쩌다가 같이 다니게 되었는데, 몇 번 해보니까 좋더라고요.”
진짜 사람 일은 모른다더니, 그땐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몇 번 따라다녔을 뿐인데.
김 원장이 처음 허준과 다녔던 날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뒤에 보이시죠? 이렇게 끝내고 나서 환자분들이 기분 좋게 웃는 모습을 보면 있던 피로도 싹 날아가거든요.”
최은진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큐멘터리를 찍는답시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이미 여러 번 경험해봤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혜민서 선생들의 짧은 촬영까지 끝내고,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들 촬영하시느라 고생 많으셨는데, 시원하게 한잔 어떠세요?”
“역시 배우신 분이군요. 찬성합니다. 모두 같이 갈 거지? 이런 날이 또 언제 있겠어?”
그러자 허준한의원 식구들의 눈이 허준에게 쏠렸다.
허락을 구하는 괜찮겠냐는 눈빛과 같이 하겠냐는 기대감이 섞인 눈빛까지.
허준이 담담하게 그 눈빛을 받아들이면서,
“모두 고생 많으셨는데, 다녀오시죠. 오늘 입원실 진료는 제가 볼 테니.”
“원장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요.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흔쾌하게 답했다.
그러자 밥 선생과 고요한 선생이 손뼉을 마주친다.
그런 허준이 아까 나타난 메시지를 확인했다.
「포인트를 1000 획득하였습니다.」
이곳의 퀘스트를 완수하고 얻은 포인트.
촬영 때문인지 이번에 온 곳은 그 규모가 꽤 컸음에도 생각보다 수월하게 봉사를 마칠 수 있었으니.
‘이게 다 선생님들 덕분이죠.’
게다가 실제로 한의원으로 돌아가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았기도 했고.
그때,
“에이~ 내가 저럴 줄 알았다니까.”
“어쩔 수 없죠. 입원실 진료는 누군가 봐야 하니까요.”
“그럼 꿩 대신 닭이라도?”
이번에는 유도진에게 묻는 김 원장.
“자넨 어때? 허준 원장이 진료도 봐준다는데, 괜찮지?”
동시에 유도진에게로 쏠린 시선.
“죄송합니다. 저는 선약이 있어서.”
“허~ 허준 선생이야 기대도 안 했는데, 유도진 선생까지 안 갈 줄이야. 됐어, 치사해서 원. 그냥 우리끼리 가지 뭐.”
“그러게요. 그냥 우리끼리 가죠!”
김예진 선생의 호쾌한 대답까지 떠올리며 피식 웃던 허준.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허준이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내고,
책상 앞에 놓인 책을 펼쳤다.
* * *
성대결절로 인해 외국에서 한국까지 찾아온 엘레나.
그녀의 일상은 매일매일 같았다.
적절히 운동도 하고,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일도 한다.
그리고 하루에 한 번은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고 마지막으로는.
“밥~”
바로, 밥 선생을 부르는 것.
엘레나가 밥을 부르자, 방문이 열리며 밥이 나타났다.
“오우~ 미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바로 시작하지.”
밥이 엘레나의 목에 손을 대고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손끝의 감각에 집중하여 무언가 느껴지는 부분을 살짝 압박하기도 하고 잡기도 하면서 풀어나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왜 밥과 엘레나가 한의원이 아닌 곳에서 함께 사는 것인가.
이 일은 엘레나가 처음 온 날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매일 한의원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요?”
“네. 당연히 그래야죠. 그래야 치료 기간이 짧아질 테니까요.”
엘레나는 한국 국민이 아니다.
바꿔말하면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진료 시의 부담이 상당한 편이었다.
당연히 치료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 부담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마련이었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입원으로 빨리 치료하는 게 낫겠지.’
이것이 허준의 생각이었으나,
엘레나의 사정이 생각보다 더욱 넉넉지 않은 듯싶었다.
그때, 허준의 의도를 알아챈 밥이 말했다.
그도 외국인이었으니 그녀의 사정을 더욱 쉽게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원장님. 그럼 하우스메이트는 어떨까요?”
“하우스메이트?”
“네. 물론, 한국의 정서와는 상당히 안 맞겠지만, 제가 뭐 이상한 사람도 아니고. 오히려 매일 케어를 해줄 수 있다면 치료 기간이 더 짧아지지 않겠습니까?”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서는 성인 남녀가 한집에서 같이 사는 것만으로도 이상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나, 어차피 치료가 끝나면 한국에서 살 것도 아니고 둘 모두 외국인이었으니.
‘게다가 밥 선생은 충분히 믿을 수 있지.’
“그럼, 밥 선생이 한번 이야기 해봐.”
그렇게 이어진 설명을 들은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값싼 가격에 통역뿐 아니라 대화까지 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매일 한의학적인 케어를 받으면서 궁금한 점을 물어볼 수 있다는 점 등등.
더해서 한국에서 밥 선생만큼 믿을만한 하우스메이트가 또 있겠는가.
그래서 시작된 하우스메이트.
그 덕분일까.
허준한의원 진료실을 찾은 엘레나의 상태는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60%.’
허준이 진료를 보기 전 진행도를 확인했고,
이어서 진료까지 마친 뒤에 말했다.
“엘레나. 오늘부터 다시 노래를 조금씩 시작해 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