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저도 그래요 >
128화. 저도 그래요
허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일행이 자리를 옮겼다.
물론, 중간에 식사는 조금 뜬금없지만, 배달음식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그렇게 도착한 장소는 장수한의원.
임장수 선생님의 한의원이었다.
굳이 이곳에 오게 된 이유는 하나다.
이 근처에서 가장 가까웠으니까.
한의원으로 들어선 허준이 습관적으로 한의원을 살폈다.
‘개원하신 지는 얼마 안 되었나 보네.’
꽤 넓은 진료실. 그리고 그 진료실 안에 있는 카이로베드까지 모두 새것 특유의 냄새가 남아 있다.
어쨌건 공간이 넓어서 실습하기에는 훨씬 수월하겠는걸.
허준이 카이로베드 앞에 나서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선생들을 둘러봤다.
단 한 명의 한의사도 이탈하지 않고 모두 참여한 모습.
주말인 데다가 저녁이 다 되어가는 시간인 만큼, 각자의 삶 또는 가정이 있을 터인데도 그들이 이렇게 모인 이유는 하나였다.
온라인에서 볼 수 있는 영상이나 치료에 관한 논문이 실제로 진료를 보는 데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던 경험들.
그리고 실제로 같이 행사에 참여하면서 그가 직접 진료하는 모습을 보니, 여러모로 느끼는 점들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한의사들은 종종 일요일이 되면 서울 곳곳에서 열리는 강의에 큰돈을 써가면서까지 참여하기 마련이었으니, 그들이 열정을 불태우기에는 충분한 이유였다.
물론, 새롭게 배운 치료로 돈을 더 벌고 싶다는 욕망부터, 한의학적으로 한 발짝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까지.
각자의 이유는 다르겠지만,
‘상관없지.’
세상 사람 모두가 같을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어찌 됐건 교육으로 인해서 많은 환자가 더 나은 진료를 받게 하는 것이 이 혜민서의 목적 중 하나였으니,
“그럼, 바로 시작할까요?”
당연히 시작은 추나였다.
그동안 해온 순서이기도 했고, 요즘에 유행인 만큼 많은 한의사가 관심을 가지기 때문.
그렇게 임장수 선생님이 실습 대상이 되어 베드위에 누웠고,
허준이 천천히 하나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뚝-
“흐억?”
허준이 잡은 골반에서 들려온 경쾌한 소리.
그리고 동시에 터져 나온 임장수 선생의 신음.
“한 번 더 갈게요. 천천히 숨 들이마시고~ 내쉬세요.”
허준이 신호를 주고, 다시 한번 더 같은 장면이 반복되고 나서.
임장수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몸을 움직여보더니,
“와... 제가 서울에도 몇 번 배우러 갔었는데, 이런 느낌은 처음이에요.”
허준에게 초롱초롱한 눈빛을 쏘아내는 것이 아닌가.
그 말을 시작으로 분위기는 한결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짧게 짧게 한 명씩 돌아가면서 실습이 시작되었고,
허준이 그 옆에서 자세와 힘의 방향 그리고 느껴지는 감각 등의 포인트를 짚어주었다.
그렇게 2시간쯤 지나서 저녁 식사 시간을 가졌고,
식사 후에는 따로 준비된 자료가 없었기에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기로 하였다.
‘어차피 다들 영상이나 논문은 읽어 봤을 테니.’
그에 대한 실전 경험이나 감각들을 답해주는 게 더 도움이 되겠지.
그렇게 각각의 증상이나 진료 과정에 관해서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조용하게 올라가는 누군가의 손.
“선생님. 죄송하지만, 침 한번 맞아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앞으로 나오시죠.”
몸으로 직접 느끼는 것도 훌륭한 교육의 방법이었으니,
마다할 허준이 아니었다.
허준이 앞으로 나서는 한의사를 살폈다.
아무래도 거기가 좋겠네.
한의사들에게 직업병이라 불리는 엄지손가락.
허준이 침을 꺼내 들고 망설임 없이 찔러 넣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
그리고 육감.
덕분에,
“어우~”
침을 맞은 한의사가 느껴지는 자극에 놀라 허준과 손가락에 놓인 침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아닙니다. 선생님들도 조금만 더 연습하시면 충분히 이정도는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공손하게 인사를 하면서 들어가는 한의사.
그를 마지막으로 질의응답 시간이 끝이 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선생님!”
“모두 앞으로도 활동 열심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직접 악수를 하며 인사를 끝내자,
정일현과 임장수가 허준에게 다가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정일현 원장님이 더 고생하셨죠.”
“이런 강의를 서울에서는 매주 한다는 거죠?”
임장수 선생이 눈을 불태우며 물었다.
“네.”
“혹시, 저도 참여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언제든지 오세요. 저희는 항상 열려있으니까요.”
그렇게 부산의 혜민서 행사를 끝내고 나서는 허준.
허준이 사라지자,
좀 전에 침을 맞은 한의사 옆으로 다른 한의사들이 몰려들었다.
“진 선생님. 맞아보니까 어때요?”
“느낌이 확실히 뭔가 달라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한번 놔봐도 될까요? 비교좀 해주세요.”
그리고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정일현과 임장수가 미소지었다.
* * *
다음 날.
일요일 아침 허준네 가족은 오랜만에 분주했다.
허준이 쇼핑하러 가자고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가장 분주한 사람은 동생인 이진희였지만.
“백화점으로 가자고?”
“네. 제가 엄마 옷 좀 사드리려고요.”
“됐어. 옷은 무슨. 어차피 입고 다니지도 못할 텐데.”
“그래도 동네 계 모임이라던가, 다른 모임같은 거 나갈 때 입으시면 되죠.”
그러자 옆에 있던 이진희가 냉큼 끼어들었다.
“그래요. 엄마. 옷은 일단 있으면 좋다니까요?”
허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밤늦게 이뤄진 협상.
보나 마나 부모님이 옷이나 선물을 그냥은 안 받을 걸 알았기에, 바람잡이를 해달라는 허준의 부탁과 그 대가를 챙긴 이진희였다.
그렇게 백화점으로 향한 허준네 가족.
아빠 이도형은 괜찮다고 고집을 피우며 함께하지 않았다.
‘뭐,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만.’
어쨌거나 여기저기 돌며 옷을 입어 보는데,
“잘 어울리는데? 우리 엄마 아직 안 죽었네~”
“얘는. 됐어. 이건 영 불편해서.”
“그래? 그럼 저쪽으로 가보자 우리.”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가격이 신경 쓰이시나 보네.
첫 번째 갔던 곳의 옷이랑 세 번째, 그리고 그다음에 갔던 곳의 옷을 마음에 들어 하셨지.
엄마와 아들로 함께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좋고 싫어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허준이 아니었다.
“에이~ 됐어. 영 아닌 것 같아.”
“그래요?”
“응. 그냥 다른 데서 살게.”
“아~ 왜요. 오빠가 엄마 옷 사주고 싶다는데.”
“얘는, 그럼 네 돈으로 사주든가.”
“그건...좀.”
그렇게 백화점을 나서는 엄마와 그 옆에서 설득을 이어가는 동생.
역시 엄마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저 잠깐만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허준이 화장실 핑계를 대고는,
조금 전에 기억해뒀던 옷들을 전부 구매했다.
그렇게 양손에 쇼핑백을 들고 밖으로 나서자,
“아니, 엄마 오빠가 진짜 돈 많이 번다니까? 효도 좀 하겠다는데 왜 그래?”
“효도는 무슨, 그거 다 네 오빠가 힘들게 번 거잖니.”
아직도 티격태격 중인 두 모녀.
그러다가 다가온 허준을 보고 흠칫거리더니.
“어? 그건 뭐야? 와, 그걸 다 사온거야? 나 좀 감동...”
이진희가 옆에서 중얼거렸고,
엄마 이선영이 말없이 다가오더니, 허준을 꼬옥 껴안았다.
그렇게 가족들이 모두 모인 점심시간에는 맛있는 것을 먹으며 오전에 있었던 이야기부터 이런저런 이야기가 이어졌고.
이야기를 듣는 아빠도 흥겨운지 웃음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래. 이게 옛날 우리 집의 분위기였었지.’
허준이 흡족한 얼굴로 가족들을 바라보다가,
“아빠. 이건 아빠 거에요.”
“이게 뭔데?”
“열어보세요.”
자동차 열쇠였다.
물론, 비싼 것은 아니었다.
비싼 거라면 성격상 당연하게 거부했을 테니까.
이 때문에 허준이 고른 것은,
“겨울에 배달하실 때, 차로 다니시라고요. 배달용이라 비싼 건 아니에요. 괜히 골병드시지 마시고. 한 달에 할부금도 얼마 안 나가요. 정 신경쓰이시면 나중에 다시 저한테 주시면 되죠.”
완벽한 명분이 있는 선물이었다.
아빠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작년에 날이 추워지면서 아파본 경험이 있었던 탓일까.
헛기침과 함께.
“그, 그래. 고맙다. 잘 쓰고 나중에 꼭 돌려주마.”
받아 들였다.
이렇게 행복한 휴가를 만끽한 허준.
이제는 다시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이제 슬슬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추석에 또 올 거지?”
“글쎄요. 추석에는 못 올 것 같은데요? 요즘에 워낙 바빠서.”
“그래도 종종 전화는 해라.”
“아들. 밥 잘 챙겨 먹고, 도착하면 연락하고.”
허준이 웃으며 인사했고.
옆에 서있는 동생 이진희에게 속삭였다.
“내가 부탁한 거 잊으면 얄짤없는 거 알지?”
“당연하죠. 오라버니!”
부탁한 대로 지키기만 하면 엄마의 치료도 조만간 끝날 터.
왠지 모르게 몸에서 힘이 넘쳐나는 허준이었다.
* * *
허준한의원에서 가장 먼저 출근하는 사람은 김예진 선생이다.
월요일. 매일 바쁜 한의원이었지만, 이날은 특히나 바쁜 날이다.
따라서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나온 김예진이었는데,
‘어? 불이 켜져 있네.’
유도진 선생님이 일찍 나오셨나.
하긴, 유도진 선생님도 출근이 빠르신 데다가 가끔 일이 있을 때는 먼저 와계신 경우도 계셨지.
그렇게 한의원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원장님?”
허준이 있는 것이 아닌가.
“김 선생님 좋은 아침이네요. 여전히 일찍 출근하시네요?”
“웬일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휴가 갔다 왔으니, 좀 일찍 나와서 한 바퀴 둘러 봤죠.”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별일 없었어요.”
“입원실 올라갔더니 사람들이 많이 바뀌었던데요?”
“네. 원장님 휴가 기간에 4명 퇴원하셨고, 5명 입원하셨어요.”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오전에 올라가서 확인하고 온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물론, 암 환자인 김정남 씨도 포함해서.
‘많이 좋아지셨던데.’
“따로 제가 알아야 할 게 또 있을까요?”
“아니요. 특별한 건 없고, 원장님께서 부탁하신 환자분 내원하셨을 때, 유도진 선생님이 진료 보셨으니 직접 이야기해보시면 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도 잘 부탁드려요.”
허준이 진료실로 들어갔고,
하나둘씩 출근하기 시작한 식구들.
그들이 올 때마다,
허준이 직접 인사를 나눴다.
“유도진 선생님. 별일 없으셨죠?”
“좋은 아침입니다. 원장님. 참, 박철웅 환자 진료는 원장님 처방 그대로 이어서 처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으로는 윤 선생.
“어머~ 원장님.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잘 지내셨죠? 거동 불편하시지 않으세요?”
“아직 팔팔해요. 그때 운동하던 게 도움이 진짜 많이 되나 봐요.”
2층에서 소식을 듣고 온 김정우도 오랜만에 내려와 허준을 맞이했다.
“선생님.”
“눈빛을 보아하니, 이번엔 제대로 쉬다 왔나 보네?”
“네.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나니 좋더라고요.”
“좋아 아주 활력이 충만하군. 일단 할 이야기는 많지만, 그건 차차 하도록 하고 최 원장이 자네를 찾더군. 나중에 연락 한번 해보게.”
“알겠습니다.”
“그럼, 난 이만 2층으로 가보겠네.”
“조심히 올라가십시오.”
이어서 남 선생을 비롯한 데스크 팀 선생님들.
그리고 고요한 선생과 밥 선생까지.
“원장님. 휴가 잘 다녀오셨어요?”
“네. 밥 선생님. 저 없는 동안에 진료 잘 보셨다면서요?”
“아닙니다. 아직 모자란 게 많죠.”
“그럼, 진료 준비해 볼까요?”
이렇듯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허준한의원의 진료.
허준이 없을 때도 그럭저럭 잘 돌아가던 한의원에 허준이 합류하니,
그야말로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흐름.
‘역시, 이거지.’
이 흐름을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당연코 데스크에 있는 김예진과 윤다희였다.
“김 쌤. 원장님이 오시니까, 한의원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 같지 않아요?”
“당연하죠.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힘이 나는걸요. 윤 쌤은 안 그래요?”
“저도 그래요.”
그렇게 활기를 띠며 찾아오는 환자들의 치료를 해가는 와중에,
새로운 환자가 한의원을 찾아왔다.
그것도 아주 먼 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