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좀이 쑤셔서요 >
126화. 좀이 쑤셔서요
허준의 집.
치킨집 마감 이후 오랜만에 밥을 먹은 뒤, 그동안 쌓여있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엄마, 많이 좋아지셨다면서요?”
“그럼~ 네가 보내준 공진단 먹으면서 운동 좀 다녔더니, 금방 좋아지더라고.”
“다행이네요. 진희가 같이 운동 잘 다니나 봐요?”
“그럼~ 애가 이제야 철이 좀 들었나 봐. 매일같이 퇴근하고 나면 산책하기 바쁘거든.”
허준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 엄마의 원활한 치료를 위해 허준이 동생에게 용돈을 쥐여주며 부탁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엄마, 그거 다 돈 받고 하는 일이라고요.’
어찌 됐건 지금 눈앞에 앉아있는 엄마를 살펴보니,
많이 좋아지신 듯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얼마나 있을 거니?”
“아, 그렇게 오래는 못 있을 것 같아요. 일요일에는 올라가 봐야할 것 같아요.”
“그래도 지난번보다는 조금 길게 있네?”
“네. 한의원에 믿을 만한 식구들이 있거든요.”
“잘됐네.”
엄마가 기뻐하는 모습에 허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휴가를 온 김에 이번에는 제대로 푹 쉬다 가야지.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등장한 동생 이진희.
“뭐야? 엄마. 오빠 왔다고 집에 빨리 들어오라고 한 거였어?”
오자마자 허준을 바라보며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더니 털썩 주저앉아 신발을 벗으며,
“아오, 내가 그것 때문에 오다가...”
중얼거린다.
허준이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쟤는 언제 철들려나 쯧.’
어쨌거나 허준의 눈에 들어오는 높은 굽의 구두와 그 위에 있는 발목.
아무래도 오다가 접질렸나 보다.
“야, 그대로 가만히 있어. 내가 봐줄게.”
“왜? 됐어. 파스 붙이고 하룻밤 자면 금방 괜찮아져. 아프면 내일 한의원 가서 침 맞지 뭐.”
“그 침 놓는 한의사가 나거든?”
“아, 맞다.”
허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가 동생을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
이어서 손끝으로 살살 누르며 반응을 살핀다.
환자의 표정, 미묘한 움찔거림, 호흡.
그리고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열감까지.
‘이정도면 침 한두 방이면 깨끗하게 낫겠는데?’
수없이 진료하고 치료한 경험이 정답을 내놓는다.
“그대로 있어 봐. 침 가져올 테니.”
허준이 방으로 들어가 배낭에서 챙겨온 침을 하나 꺼내왔다.
물론, 소독용 솜도 함께.
그리고 다시 제자리에 앉아 자세를 잡자,
이번에는 이진희가 되물었다.
보통 접질려서 한의원에 가면 침을 맞는 것은 당연한데,
침을 놓기 전에 눌러보면서 진찰을 하는 과정이 지금과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손으로 누르면서 여기가 아프시죠?
또는 누르는 와중에 환자가 통증을 호소하기 마련이.
그래서였을까.
“오빠. 제대로 눌러본 거 맞아?”
“야야. 진희야. 걱정하지 말아라. 이 아빠가 다른 건 몰라도 네 오빠한테 침 맞고 손목 괜찮아졌잖니.”
“그건 그런데...”
못 미더워하는 동생에게 샤워를 막 끝내고 나온 아빠가 대신 답했다.
“그러게. 엄마도 약 먹고 많이 좋아졌잖아. 한 번 믿어봐.”
그 뒤를 이어서 엄마도 응원한다.
허준이 못말리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엄마나 아빠의 증상과 비교하면 이건 그냥 감기도 아니고 코 흘리는 정도일 뿐인데.
어찌 됐거나 지금 눈앞에 있는 동생은 환자.
“걱정하지마.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그러면서 망설임 없이 들어간 침.
이 거침없이 찔러 넣는 모습에 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통 한의원에서는 침을 가볍게 톡 쳐서 넣고, 그 뒤에 이어서 다시 힘을 가해 찔러 넣는 데 반해,
지금의 모습은 마치 로봇이 찔러넣기라도 한 듯 멈춤없이 논스톱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리라.
“아들... 너, 침 많이 놓나 보네?”
몇 년간 치킨을 튀긴 그였기에,
지금 허준이 침을 놓는 장면을 보고 정확히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떤 느낌인지 어렴풋이 느낀 그였다.
달인.
초밥을 몇 년을 쥐다 보면 밥알의 개수가 일정하게 나오는 것처럼.
기계만큼 정밀해진 숙련자.
“제가 그래도 좀 많이 놓아본 편이죠.”
허준이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러고는,
“그대로 가만히 움직이지 말고 기다려. 나 샤워하고 나올 때까지만.”
라고 말한 뒤, 쿨하게 화장실로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샤워를 마친 허준이 발목에 있는 침을 뽑았다.
알코올 솜으로 깔끔하게 뒤처리까지 끝내고는 아까와 같이 만져보는 허준.
“좀 어때?”
“뭐야, 이거?”
이진희는 아까와 다르게 거의 느껴지지 않는 통증에, 발목을 천천히 돌리면서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대박...”
“야야, 그렇게 너무 팍팍 움직이면 안 돼. 그러다가 잘못하면 또 덧나.”
그러면서 눈빛이 달라져 있는 이진희.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오는 아빠.
“아들. 요새 나도 좀 아픈 거 같은데?”
“안 그래도, 그래서 준비해 온 게 있죠.”
허준이 왕뜸기를 꺼내며 미소지었다.
* * *
다음 날.
어젯밤에 있었던 진료 때문인지, 허준네 가족들의 얼굴이 한결 밝아져 있었다.
물론, 허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엄마의 진행도였지만,
* 진행도 : 67%
‘열심히 침을 놓은 보람이 있네.’
그렇게 식탁에 마주 앉은 가족들.
“잘 잤어? 아들?”
“엄마도 잘 주무셨어요?”
“그럼, 덕분에 아주 푹 잤다. 너희 아빠는 옆에서 아주 곯아떨어졌더라.”
왕뜸기의 따듯함이 노곤한 몸을 나른하게 만들어준 탓일 터.
“안 그래도 저 왕뜸기 엄마, 아빠 쓰라고 가져온 거니까, 종종 사용하세요. 제가 사용법 알려드릴테니까요.”
“알았다. 아침 먹자.”
그렇게 화기애애한 식사시간.
그리고,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어, 그래. 아들. 무슨 이야기?”
“혹시, 서울로 다시 올라오고 싶은 생각은 없으세요?”
내려오는 기차에서 생각했던 주제였다.
근래 한의원이 커지면서 벌어들인 소득으로 기존에 있었던 대출도 다 갚은 상태.
게다가 새롭게 일을 시작하면 기본 연봉이 꽤 높았기에 가족들이 함께 살아갈 집을 구
하기에는 충분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집 대부분은 은행 것이 될 테지만.’
이 뜬금없는 물음에,
허준의 아버지 이도형이 헛기침을 하며 어젯밤 이야기를 떠올렸다.
“저 내년에 지금 하는 한의원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
“왜? 잘 된다고 하더니?”
“아, 재개발된다고 해서요.”
“그래? 잘됐네. 그럼, 어쩔 수 없지.”
“네. 그래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거든요.”
“그야 뭐,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그러더니 갑자기 오늘은 서울에서 살 생각이 없냐니.
아무래도 우리가 신경이 쓰였나 보네.
“괜찮다. 우린 지금 만족해.”
“그래도 서울에 친구분들 많으시잖아요.”
“이 나이쯤 되면, 다들 가족들 보고 사는 거지. 누가 친구들 근처에 있다고 자주 만나고 그럴 수 있을 거 같니?”
그때,
“나도 여기가 더 좋아. 기껏 여기 친구들 만들었는데, 서울로 올라가면 또 멀어지잖아. 물론, 서울이 좋은 것도 있긴 하지만.”
“너도?”
허준이 의외라는 듯이 동생을 바라보다가,
“일단은 알겠어요. 혹시라도 나중에 마음이 바뀌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그렇게 아침 식사와 대화가 끝나고,
허준이 느긋하게 휴가를 만끽하고 있는데.
‘시간이 안가...’
출근해서 진료를 보다 보면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문제였는데,
지금은 시간이 너무 안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TV를 틀었는데 재미도 없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려도 마찬가지.
게다가 오늘은 금요일.
덕분에, 가족들은 모두 출근한 상태.
그런 와중에 허준의 눈에는 여전히 꾸준하게 메시지가 나타나면서 포인트를 얻고 있다고 알리는 중이었으니,
‘이것 때문에 더 시간이 안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 아니야?’
평소와는 다른 속도감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책이라도 챙겨오는 건데.
그러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허준.
‘그래!’
왜 진즉에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허준이 한의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김 선생님.”
“어, 원장님? 휴가는 잘 보내고 계시죠?”
“덕분에요. 한의원은 별일 없죠?”
“그럼요. 선생님들께서 다들 잘 해주고 계시는걸요. 전혀 걱정안하셔도 될 것 같아요.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아~ 다름이 아니라...”
그렇게 김 선생님을 통해 받은 연락처.
부산 정한의원의 정일현 원장이라는 분이었다.
부산에서 활동 중인 혜민서의 대표를 맡고 계신다고 한다.
‘이러면 시간도 잘 가고, 실제 지방에서 이뤄지는 혜민서의 활약도 직접 볼 수 있겠지.’
그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겠는가.
허준이 그대로 집을 나섰다.
* * *
부산 정한의원.
해운대에 있는 이 한의원은 시장 골목의 낡은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있는 간판은 퍽 잘 어울렸으며, 한의원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존재감을 뽐내는 듯했다.
‘게다가 1층이네?’
허준도 원장인 터라,
멀리서 보니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입지였으니, 일종의 직업병이다.
그렇게 들어선 한의원.
한창 점심시간인지 환자들은 없었고, 간호조무사 선생님들이 점심을 위해 나갈 준비를 하다가 들어오는 허준과 마주쳤다.
“죄송합니다. 저희 지금 점심시간이어서요.”
“안녕하세요. 정일현 원장님을 만나 뵈러 왔는데요.”
“아~ 원장님 손님이셨구나? 잠시만 기다리세요.”
허준이 그대로 한의원을 한 바퀴 둘러보니,
‘완전 옛날 느낌의 한의원이네.’
2층에서 개원했던 한의원보다 더 오래된 느낌의 한의원이다.
한의원 특유의 약재 냄새도 솔솔 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직접 탕약까지 달이시나 보네.
그때, 정일현 원장이 문을 확 열고는 허준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인사했다.
“아이고~ 이렇게 귀한 분이 오시다니. 환영합니다. 정일현입니다.”
“이허준입니다.”
허준이 정일현이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수염도 있고, 나이도 많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눈빛이 선하다.
“원장님. 저희 그럼 먼저 밥 먹고 올게요.”
그렇게 허준과 정일현 둘만 남은 한의원.
이번에는 정일현이 신기하다는 듯이 허준을 뜯어봤다.
“이렇게 젊은 분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허허.”
“아닙니다. 제가 보기보다는 연식이 꽤 됩니다.”
“그래도 어떻게 그런 나이에 이런 좋은 단체를 만들 생각을 다 하셨는지.”
“다른 선생님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가능했던 거죠.”
유쾌하면서도 기분 좋은 대화.
언뜻 보기에는 그저 칭찬 일색뿐인 단순한 대화였지만, 그만큼 서로가 처음 만났음에도 좋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여기 부산에서는 어떤 식으로 활동을 하시나요? 사실 제가 휴가차 내려왔는데, 궁금해서 와봤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뭐, 별다르지 않습니다. 본래 저희 한의사들 몇이 뭉쳐서 만든 모임 같은 게 있었거든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이게 꾸준히 계속한다는 게 어떤 신념이나 이유가 같이 있지 않으면 굉장히 힘든 거니까요. 그래서 결국 하나둘 떠나가서 겨우겨우 유지만 하고 있었는데.”
정일현이 그때 일이 생각난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여기 부원장으로 일하고 있던 친구가 어느 날 혜민서란 단체가 활동한다고 여기에 가입하자고 하더라고요. 그 뒤로는 아주 일사천리였습니다. 젊은 친구들도 자발적으로 모이고 일단, 인원수가 많아지니까 여기저기 구역을 나눠서도 다닐 수 있었고요.”
허준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점점 사람들이 늘어나더니, 어느새 제가 대표가 되었지 뭡니까?”
“그러셨군요.”
“아마, 저와 같은 사람들이 꽤 있을 겁니다. 게다가 선생님들이 공개해주시는 치료법이나 사례들도 정말로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선생이 고마워하고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들으니 힘이 나네요.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는걸요?”
“그래 주시면 좋죠. 특히, 이쪽에는 동상으로 오는 환자들이 꽤 있어서요.”
당연한 일이었다.
부산 근처에는 항구들도 많고, 냉동창고도 그만큼 많았으니까.
“그럼, 내일은 혜민서 행사가 있는 날이죠?”
“물론이죠.”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저도 참여할 수 있을까요?”
“선생님이 직접요?”
“네. 이왕 내려온 김에 다른 분들과 이야기도 좀 나눠보고, 또 집에만 있자니 좀이 쑤셔서요.”
“그래 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