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니들은 어떤 거 만들고 싶냐 >
120화. 니들은 어떤 거 만들고 싶냐
김정남 환자의 입원은 한의원 식구들에게도 낯선 모양이었다.
“원장님. 입원시키시는 거예요?”
“네. 며칠간 상태를 지켜봤는데, 아무래도 입원치료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허준이 식구들에게 차분하게 설명을 했고, 식구들이 곧이곧대로 허준의 처방을 받아들였다.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환자에 관한 처방이라면 언제나 그의 말이 정답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입원해야 한다는 허준의 말에 가장 좋아한 것은 바로,
김정남의 딸 최점순이었다.
“아버지가 입원하셔야 할 것 같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혹시, 어디가 더 안 좋아지신 건가요? 병원에서는 별말 없었는데.”
“아~ 그건 아니고, 아무래도 식단과 치료 주기가 신경이 쓰여서요.”
“잠시만요. 선생님. 그럼, 제가 먼저 우리 오빠들과 이야기를 좀 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참, 그리고 이것도 한 번 봐주시겠어요?”
“이건...”
김정남의 딸 최점순이 허준이 건넨 서류를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서류와 허준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별 내용은 아니고, 만약에 아버님께서 입원하신 다음에 상태가 좋아지신다면 우리 치료 사례로 사용하고 싶어서요. 단골이시니 이미 알고 계시겠죠? 우리 입원실에 환자분들 입원하실 때 쓴 서류요.”
“그럼요~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요.”
이미 동네에서 유명한 이야기였다.
입원하는 환자들의 치료과정을 사진과 기록으로 남겨 사용하는 대신에 입원비를 깎아준다는 것.
지금 허준이 건넨 서류에 바로 그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이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연세가 조금만 젊으셨어도 고민조차 하지 않고 수술부터 받으시라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에서는 환자분의 선택이 우선이니 일단은 최선을 다해서 치료해야 할 것 같아서요.”
이어진 허준의 말에 최점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혹시나 입원 중에 상태가 안 좋아지시면, 그때는 제가 바로 병원에 가시라고 말할 생각입니다.”
마지막 이야기에 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요즘 들어서 아빠가 한의원에 갔다 와서 식욕도 조금 돌고, 몸에 활기를 찾아서 그런지 틈 만나면 한의원에 오가며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지 않던가.
특히, 허준 선생님에 대한 칭찬은 입에 침이 마를 일이 없을 정도였으니,
그런 선생님이 직접 병원에 가라고 하신다면, 아무리 엉덩이가 무거운 아빠라도 움직이지 않을 수는 없을 터.
“알겠어요. 여기에 사인하면 되는 거죠?”
그렇게 허준한의원 입원실.
“대체 저분은 누구야?”
“손, 발 보니까 멀쩡해 보이시는데?”
“우리 같은 환자는 아니신 것 같아. 연세부터가.”
김정남이 나타나자 보인 환자들의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허준이 입원실에 입원을 허용하는 경우는 매일같이 치료가 필요한 중증의 동상이나 화상 환자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교통사고 환자가 몇 번 입원을 원한다면서 찾아온 적도 있었지만,
이곳의 입원 시설이 깔끔하기는 해도 요즘 유행처럼 번진 호텔식의 입원실과는 거리가 있었으니, 김정남의 등장은 환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 시각.
1층 허준한의원의 진료실.
“저... 원장님?”
입원실 당직을 맡고 있는 도영철 선생을 허준이 호출했다.
“아, 도영철 선생님 오셨군요.”
“부르셨다면서요? 무슨 일이신지?”
“별일은 아니고, 좀 전에 새로 올라가신 환자분 보셨죠?”
“네. 내려오면서 만났습니다. 듣기로는 1인실 쓰실 분이시라고.”
“맞습니다. 연세가 있으시니, 조금 신경 써서 봐달라고요.”
“알겠습니다. 원장님. 그 외에 혹시, 제가 따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있을까요?”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분이 암 환자시거든요.”
“암이요?!”
“말기는 아니고 초기 위암입니다.”
위암이라는 말에 역시나 도영철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마치, 왜 암 환자가 여기에 입원하냐는 듯한 반응.
그때,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바로, 지금 그런 겁니다.”
“이런 거라니요?”
“반응이죠. 선입견으로 인한.”
“아... 죄송합니다.”
도영철이 무슨 말인지 곧바로 이해하고 고개 숙여 사죄했다.
예전에는 몰랐으나, 입원실에서 일하다가 보니 무언가 느꼈기 때문이리라.
밝고 유쾌한 사람들과 좋은 이야기에 좋은 분위기가 함께하면 입원실 환자들의 상태도 같이 좋아진다는 것.
바꿔말하면 안 좋은 이야기나 어두운 분위기라면 분명 환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겠지.
지금 자신이 했던 반응이 대표적으로 후자에 속했다.
단순하게 암이라는 병명을 들었을 뿐인데도 마치, 벌써 안됐다는 듯한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던가.
허준이 도 선생님의 반응을 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다만, 앞으로 조심해 주시면 되죠. 특히, 환자들 사이에서 조심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원장님.”
“그럼, 도 선생님만 믿겠습니다. 참, 스케줄은 다른 환자분들과 그대로 같이 진행해 주세요. 그게 오히려 도움이 될 것 같군요.”
기존에 입원했던 환자들의 경우에는 일정 시간이 되면 아침저녁으로 운동 삼아서 동네로 나간다.
몸을 움직여 자연 치유력을 높이기 위한 치료의 일환이었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도시락 업체에도 따로 연락해 놓겠습니다.”
‘역시 도영철 선생이네.’
일 잘하는 김예진 선생 후배라서인지, 알아서 척척 깔끔하게 일을 처리한다.
그렇게 입원실로 올라가 시작한 첫 치료.
[구술 Lv. 7]
- 보사의 효과가 증가한다.
- 온열의 효과가 소폭 증가한다.
며칠 전에 올린 구술.
이 중에서 새로 추가된 온열의 효과를 치료에 더해볼 생각이었다.
아마 암세포를 죽이지는 못해도,
퍼지는 것을 막는 면역력 향상 효과로는 충분할 터.
그렇게 허준이 처방에 뜸치료를 하나 더 추가했고,
멈춰있던 진행도가,
* 진행도 : 21%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오늘도 온종일 서서 일하는 거?”
“그렇지 뭐, 어쩔 수 있나? 다림질해야 하는데”
김옥순 씨는 세탁소를 운영한다.
덕분에 매일같이 서서 일하기 일쑤.
그 때문에 생긴 하지정맥류로 한동안 고생을 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가볍네.’
이전과 비교하면 무거운 다리는 온데간데없고, 과장 좀 보태자면 젊었을 때처럼 뛰어다닐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것이 전부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간 한의원에서 받은 약이랑 종종 침 치료, 그리고.
“서서 일하시는 시간이 많으신가 보죠?”
“네. 그걸 어떻게?”
“이게 서서 오래 일하는 분들한테 더 잘 나타나는 질환이거든요. 그러니, 퇴근 후에는 꼭 이런 식으로 마사지와 스트레칭을 해주세요.”
선생이 알려준 대로 틈틈이 마사지했더니, 금방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덕분에, 다림질하면서 다리의 통증이 올 때마다, 인상을 찡그리던 그녀의 얼굴에는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찾아 가볼 걸 그랬어.
괜히 진통제 먹어가면서 참아왔던 기간이 억울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옥순 언니. 요즘 통 아프다는 이야기를 안 하네? 옛날 같았으면 다림질 하나 하면서도 두어 번은 말했을 텐데.”
“거봐. 내가 뭐랬어? 거기가 진짜 용하다니까?”
“그래? 그럼, 나도 한번 가볼까? 어깨쪽이 뻐근한데.”
“가봐. 진짜 아주 약손이야 약손.”
“그런데, 사람 많다면서. 갔다가 한참 기다리면 어떻게 해?”
“걱정하지마. 그러면 이제 대로변 쪽에 있는 태용한의원으로 가는 거지. 거기도 잘해. 친절하고.”
“역시, 언니가 최고라니까. 그나저나 오늘도 아주 푹푹 쪄 죽겠네. 이 더위는 대체 언제 가시려나?”
이렇듯 장마는 지나갔지만, 8월의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고 있었으니,
허준한의원을 찾아오는 환자 중에 면역력과 관계된 질환 환자들의 방문이 늘어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장마 때, 몸의 면역력에 무리가 간 상황에서 제대로 회복하기 전에 바로 무더위가 이어지자, 결국에는 버티지 못하고 병으로 이어진 탓이었다.
특히, 가장 흔하게 찾아온 것이 무좀이나 습진, 또는 사마귀 등등의 질환들.
그런 허준한의원의 상황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허준의 뜸이었다.
“사마귀네요.”
“네. 피부과에 가서 냉동치료 하고 사라졌었는데, 또 생겼어요.”
“그게 지금 몸에 면역력이 떨어져서 그럴 거예요. 간단하게 약침이랑 뜸, 그리고 연고 처방해 드릴게요. 금방 괜찮아 질 겁니다.”
허준이 처방을 내렸다.
항염, 항균 작용에 좋은 청열해독탕 약침과 마찬가지로 황금, 황련, 황백, 황기 등으로 제조한 연고.
여기에 뜸이 더해지면 금방 좋아지기 마련.
물론, 그만큼 많은 환자가 왔다 가면서 입소문이 타서였는지 환자는 더욱 많아진 상태였다.
그 때문에 바빠진 것은 1층뿐만이 아니라, 2층의 탕전실.
탕전실로 지원을 나온 밥이 김정우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김정우 선생님.”
“자네 왔나?”
“네. 원장님이 탕전실 지원 가라고 하셨습니다.”
“마침, 잘 왔네.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했는데 말이야.”
탕전실 안에 있는 옹기로 된 탕약기에서는 각종 한약재의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서 김정우가 공진단을 비롯해 환약과 연고 등을 만드는 중이었다.
“거기, 그것 좀 이리로 주게나.”
이미 며칠 동안 합을 맞춰온 탓일까.
탕전실 업무에도 적응한 밥이 능숙하게 김정우와 호흡을 맞췄다.
그렇게 한차례 탕전을 끝내고,
잠시간의 휴식.
김정우가 땀을 줄줄 흘리는 밥에게 음료수를 건네며 말했다.
“첫날에는 탕약도 잘 못 다루는 반쪽짜리 한의사인 줄 알았는데. 이젠 아주 제법이야?”
“아닙니다. 다 선생님 덕분이죠.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뭘, 이제 시작이지.”
“물론입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많이 알려주십시오.”
대답하며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빛.
김정우가 맘에 든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준 원장이 역시 괜히 뽑은 건 아닌가 보구만.’
이렇게 허준한의원의 또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 * *
그 시각 방송국 내 조그만 회의실.
작년에 ‘서울역 사람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찍은 최은진 PD가 누군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야, 최은진. 고집 그만 부리고, 이번에는 드라마나 예능 쪽으로 가자니까?”
“됐어. 선배. 내가 무슨 드라마랑 예능이야.”
“지난번에 네가 찍은 다큐 솔직히 성적 좋았잖아. 이슈도 며칠 됐었고. 그런 감각을 드라마에서 살려보자고 하시더라. 국장님이.”
최은진이 입술을 씰룩였다.
보나 마나 다큐멘터리의 시청률이 워낙 안 나오니 생긴 일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네가 기획안 낸 것들, 다 컷 당했잖아. 그런 거 요새 누가 보겠어, 차라리, 시사프로그램으로 가면 모를까?”
벌써 4개째.
기획안을 내고 반려를 당한 것들이었다.
“선배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뭐, 그런 말도 있잖냐. 일단 유명해지라고. 유명해지면 똥을 싸도 작품이 될 거라고 말이야. 차라리 다른 거로 먼저 자리부터 잡은 뒤에, 다시 다큐로 전향하는 게 낫지 않겠어?”
“알았어. 잠깐만 생각할 시간을 좀 줘.”
“그래. 잘 생각해봐. 국장님이 은근히 기대하고 계시더라.”
그렇게 자리로 돌아온 최은진.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본 팀원들이 눈치를 보며 속삭였다.
‘또, 까였나 본데?’
‘그러게. 비상. 비상.’
“애들아, 중얼거리지 말고 뭐 없냐? 진짜로.”
“글쎄요...”
“그럼, 생각을 바꿔보자. 이번이 우리 팀 마지막 다큐라고 생각하고 만들면, 니들은 어떤 거 만들고 싶냐?”
갑작스러운 질문.
그런 질문에 촬영을 담당하고 있던 팀원이 답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문득, 자신이 찍었던 장면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리라.
“서울역.”
“서울역?”
최은진의 눈이 번뜩였다.
그래. 그거다.
간혹 그런 것들이 있지 않던가.
어떤어떤 다큐 이후에 1년 뒤에 다시 찾아가는 것.
게다가 이 주제라면 작년에 이슈가 조금 되었으니, 명분도 있을 터.
“자, 잠깐. 어디 가시는 거예요?”
“국장실!”